제국의 보석 1장 남파나단령 (4)스승님(수정)
푸른바람·2002. 2. 21. PM 3:17:58·조회 3782·추천 54
제국력 26년
이 마을에 온 뒤 벌써 수년째보는 가을 풍경이었지만 할상 볼 때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기에는 좋은 풍경.. 뒷 산 물든 붉은 빛과 노란 색 단풍들..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일년간 노력의 결실인 황금빛 들판... 거의 일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일생에 이런 평화가 찾아올 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도 읽고 그동안 많이 하지 못했던 검술 수련으로 많이 거칠어 졌던 검술도 다듬기도 하며, 난 요즘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란트 오빠! 손님이 왔어."
내가 있는 언덕 위로 멀리서 신디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님?"
난 천천히 풀위에 뉘였던 몸을 일으켜 신디가 달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신디는 매일 같이 지내는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크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나도 일년전에 비해 키가 좀 크긴 했다. 하지만 신디에 비해서는 그다지 크는 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
"응, 오빠를 급히 찾는 것 같아."
작년 봄 무렵 가이우스가 앞으로 이 마을에 피투안 국에서 함부로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뒤부터 이 마을은 여느 평범한 마을처럼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 아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리투안 제국 자치령에 우리마을이 지정되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드나들게 되었지만, 특별히 나한테 오는 손님은 없었다..올만큼 친한 사람도 없고....
"신디,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어?"
신디는 나에게 달려와 한쪽 팔에 매달리며 말을했다.
"음.. 남자였는데. 오빠보다 키가 크고...검은색 머리에...마음은 오빠하고 비슷하게 하늘색이야.."
누구지? 검은색 머리....친구라고는 리아둠과 클라리, 억지로 친구라하면 할 수 있는 가이우스 정도 뿐이었는데. 만약 내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곱게 신디를 보냈을 리도 없고.
난 신디를 어깨 위에 올려 목마를 태우고 집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신디는 기분이 좋은 듯, 마을 어린 꼬마들이 부르는 것을 본적이 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디, 마을 아이들하고도 친해진 것 같네?"
"응, 오빠."
신디는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고 내 물음에 답을 했다.
"아이들이 괴롭히지는 않아?"
"응,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아! 그런데 오빠."
말을하던 신디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아이들이 오빠보고 무섭다고 그랬는데 내가 아니라고 그랬다. 우리오빠는 좋은 사람이라고 나 잘했지?"
신디는 말을 해놓고 뭐가 웃긴지 혼자 꺄르르 웃었다. 꼬마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익숙한데. 신디를 통해 들으니까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응,신디, 신디는 정말 착하네."
난 내 마음을 숨기고 신디에게 밝게 답을 했다. 하긴 신디의 능력이 향상되면 마음을 숨겨봤자 소용이 없겠지만...아직은 그정도는 아니니까.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작은 우리집에 눈에 들어왔다. 신디가 온 뒤로는 수리도 하고 해서 그렇게 우중충한 느낌은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할 일이 없으면 집안 일이라도 해야지..무위도식 하는건 적성에 안 맞았다. 내가 마을의 여러 종족들에게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힘있는 자를 따르는 성향이 있는 인간과 엘프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족들의 특성 때문에 어쩌다보니, 내가 마을 촌장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어 버렸다.
"신디, 집에 왔다. 이제 내려야지."
"응"
난 신디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난 집 안으로 걸어갔다.
"란트 크리센군 맏습니까?"
집안에 들어가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얼굴... 아니..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검은 빛 머리에...전사임을 증명하는 균형잡힌 단단한 몸...분명히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네, 누구신지..."
"전, 리투안 제국 황제 세레니안느 여제와 당신의 스승이신 파트레아 아인트 슈타이튼 공의 아들, 리투안 제국 근위기사 리아인 슈타이튼 입니다."
왠지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런데스승님의 아들이었나?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본적이 있는 것 같더니..그러고 보니 눈과 머리색을 빼고는 스승님을 꼭 빼닮은 것 같았다. 눈은 스승님 만큼 맑지는 않았다. 하긴 스승님의 눈이 보통 특이한게 아니니까.. 스승님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저랬을까? 잠깐! 그런데 앞에 소개 문구는...? 스승님이 리투안 제국 여황제의 남편이었다니....!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하던 사실이다. 그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황자란 말인가?
"주인님아~~! 다녀왔어?."
부엌쪽에서 얼굴에 미소를 띄운체 밝은 목소리로 말을 하며 클라리는 걸어나오고 있었다.
"클라리, 너 혹시 저사람 아는 사람이니?"
"응, 어릴 때 몇 번 본적 있어.."
클라리가 몇번 봤다는 이야기라면 많은 인연이 있는 깊은 사이란 이야기일 것이다. 클라리의 이상한 화법이라고 해야 하는지. 왠지 사람들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그런지는...모르겠지만.
"레이디 프리안느, 제 생각에는 몇 번 본 사이라고 말할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역시 내 생각이 옳음을 리아인이 바로 증명해 주었다.
"그래, 리아인 황자. 그러고보니 내가 네 밥해주고 놀아주고 기저귀까지 갈아주었던 기억이 다시 생각이 나네..."
"레이디 프리안느, 꼭 그걸 말하실 것 까지는..."
클라리의 말에 리아인인가 하는 녀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사생활의 적발...솔직히 다 큰 남자한테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솔직히 조금...어휴.. 내가 이 녀석을 구해줘야 겠군...
"그런데 무슨일로?"
내 질문에 리아인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황급히 클라리에게서 시선을 때서 나를 향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님께서 곧 깨어나실 듯 합니다. 옐로우 로즈 핀 프리안느 께서 말씀하신 사실이니 정확할 것입니다. 저하고 같이 가서 아버님을 만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스승님이 깨어 나신다니.. 스승님이... 내 눈에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을 오랫만에 느꼈다...
"스승님이 깨어나신다고......"
"하! 오늘, 밥 당번은 스승님 입니다."
"이...이녀석... 스승을 그렇게 부려먹어도 되는거냐.."
오늘도 대련에서 스승님을 이겼다. 검을 떨어뜨리고는 언제나 처럼 이럴 수 없다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스승님. 최근에 들어서는 내가 저녁 밥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내가 대련에서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스승님이 정하신 규칙 입니다."
"이녀석...!!"
펄펄뛰는 스승님을 뒤에 둔체 난 숲쪽으로 걸어갔다. 이 곳에서 지낸지도 벌써 5년이 다 되가는 것 같다. 엄마...시드....아픈 기억이 가끔씩 떠오른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밝게 지내는 것도 스승님 때문이다. 아인트 스승님은 곁에 있기만 해도 주위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숲 속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내게도 맛있는 음식냄세가 가득 풍겨왔다. 스승님이 만드는 저녁 음식들의 메뉴가 대략적으로 머리속에 떠올랐다. 스승님도 원래는 요리를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곁에 있던 동료의 요리솜씨가 워낙 훌륭해서 어깨너머로 몇가지 배운 것이 지금 요리 실력이라던데... 곁에서 배운것 치고는 우리 스승님도 검술 못지 않게 요리도 괭장히 잘했다. 그런데 저런 요리솜씨를 가진 스승님이 그동안 내 맛없는 요리를 별 불평없이 먹을 수 있었는지...조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난 너덜너덜해진 마법책을 가슴쪽에 달린 안주머니로부터 꺼냈다. 8서클... 8서클 마법까지는 다 쓸 수 있었다. 확실하게 8서클 마법을 모든 힘을 다해 써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힘을 줄여서 써볼때는 언제나 성공했었다. 핀 누나가 8서클 부터는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했었기 때문에 나도 마법을 써볼때는 되도록이면 힘을 줄여서 써보곤 했다. 잘못하면 주위 숲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고 한 누나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음식냄세를 맡으며 쉬고 있는 나의 귀에 갑자기 들려오는 말울음 소리와 무기들이 부딪히는 쇳소리. 그것도 한두마리가 아닌....여러마리의 말울음 소리.....왠지 불길한 예감이 날 스쳐 지나갔다. 난 마법 책을 품속에 다시 집어 넣고 집쪽을 향해 바삐 달려갔다.
"스승님! 스승님, 말울음소리가..."
"뭐..? 손님이 오는 거겠지.."
스승님은 아까 식사 당번이 되었을 때 펄펄 뛰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아니에요. 한두마리가 아닌 것 같은데. 무기 소리같은 쇳소리도 들렸어요."
"란트, 사실이냐.?."
순간 스승님의 가볍게 웃고 있던 표정이 급하게 바뀌었다.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스승님. 왜 이렇게 스승님은 내 말을 안 믿는 건지. 난 스승님께 거짓말을 한 적도 없는데. 나 역시 내방으로 급히 달려가 내 검을 들었다. 장미문양의 검. 가끔씩 환청이 들리는 것 말고는 참 좋은 검이란 생각든다. 내가 다른 무기를 써보지는 않았지만. 돌까지도 반으로 잘라버릴 정도면 보통검은 아닐 것이리라.
검을 드는 순간 갑자기 엄마와 시드가 죽던날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즘에 이 꿈을 꾼적이 없는데. 자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생생하게 그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
"란트, 어서 가보자."
스승님의 다급한 목소리, 스승님도 뭔가를 느낀 듯 급하게 서두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네."
무기를 들고 급하게 집밖으로 나왔다. 내 예상이 맞았다. 우리 집 주위를 대략 수백명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히 로브를 걸친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마법사들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란트 크리센... 네 녀석이 미카 공주의 아들인 것을 진작에 알았으면 그 때 네 어미를 죽일 때 같이 죽이는 건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쳐다보았다. 왠지 기분 나쁜 목소리, 내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온 곳을 쳐다보자. 내 눈에 그 존재가 들어왔다. 저..저녀석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눈빛.. 그래 그 때 그 녀석이다! 우리 엄마와 시드를 죽인!
"괴물 사냥꾼, 페아넬리온. 네 녀석이 감히 여기가 어딘줄 알고 국경을 넘어 오는 것이냐! 제국의 법이 두렵지도 않다는 거냐!"
스승님의 목소리였다. 나와 있을 때와 다른 근엄한 목소리. 스승님도 저녀석의 존제를 알고 계셨던 것일까?
"파트레아 아인트 슈타이튼 공작. 당신이 여기 계셨군요. 후후..하지만 슈타이튼 공작 나으리, 우리가 국경을 넘었다는 증거는 거기 두사람 뿐이 아닐까요. 증거를 없애면 그 지엄한 제국 법도 두렵지가 않죠. 천하 제일이라 불리는 당신도 검술 만으로 수많은 마법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백마법사가 아닌 흑마법사를?"
스승님은 아무말 없이 그 나쁜... 그 잊지 못할 악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란트 크리센, 네 녀석도 네 어미처럼 내가 죽여주지. 하하. 아~! 내가 그 동생이라는 오크 녀석도 내가 죽였던가?"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도저히..그리고 엄마.. 시드가 힘없이 사람들에게 밟히던 그 모습... 그 모습이 떠올랐다. 난 검을 빼들고 그 나쁜.. 악당을 향해 뛰어갔다.
"안돼!, 란트 함정이야. 함정! 멈춰."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난 그 소리를 따를 이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녀석을 향해 검을 들고 내리 치려는 순간 어느 쪽에선가 검은빛이 날라오는 것이 보였다. 흑..흑마법인가.. 하지만 이미 난 멈출수 없었다. 전력을 향해 뛰었기에.. 나도 죽는건가. 엄마처럼...그 때 그 흑색 물체와 내 사이에 끼어드는 물체, 아니 사람이 보였다. 스승님.. 아인트 스승님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처럼...똑같이....
"스승님...!"
"하하.. 이래서 진짜 용사는 어리석다니까 자기 목숨보다 다른 사람 목숨 소중히 여기다니 후후. 골치거리도 없어졌고 꼬마 네 차례다. 전원 공격!"
그 악당녀석의 목소리..웃음소리... 내 의식이 점점 희미해짐을 느꼈다. 끓어오르는 마음만큼 또 무섭도록 차가워지는 반대쪽 마음.
"서플라이 바이올로지 에너지 쉴드."
6서클에 적혀 있던 마법인가.. 조금 남아있는 이성으로 스승님께 급하게 썼다. 흰 빛의 투명한 막이 스승님을 감싸는 것을 본 나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디스트럭션 올 아더"
8서클.. 처음으로 풀파워를 써보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여러개의 마법주문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마법캐스트가 끝나자 주위에 마법사인듯 보이는 녀석들은 안티매직을 열심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몸부림은 전혀 소용없이 나에게 검은빛 구체를 날린 놈을 시작으로 한놈씩 입에 피를 뿜으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검을 들고 주위에 있는 녀석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하지만 별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내 이성은 제 3자가 된 기분으로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아니 내 몸이 멈춘순간... 주위에 살아있는 인간은 나하고 스승님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시드를 죽인 그 녀석... 그 녀석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아...어떻게 이럴 수가. 녀석, 도망쳐 버린 것인가?
쓰러지듯 스승님께 회복마법을 쏟아넣고 있는 나에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등을 살며시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누나의 느낌이다. 핀 누나라면....이제 스승님도 사실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나도.. 나는 긴장이 풀리며 어느 순간 잠이들었다.
"괜찮니? 란트..?"
이 목소리.. 눈을 살며시 뜨니 핀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스승님은..스승님은요?"
내 말을 들은 누나의 얼굴에 슬픈 빛이 가득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
"돌아가셨나요?"
고개를 흔드는 누나. 도데체 어떻게 된 일이지 스승님이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왜 누나가 저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아인트가...아인트가 깨어나질 않아...저주마법을 풀었는데도. 깨어나지를 않아..."
누나의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
스승님이..언제나 강하던 스승님이..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스승님이 깨어나질 않는다고..?
"스승님은 어디 계세요?"
스승님의 방을 가르키는 누나. 누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고개를 묻었다. 난 일어나 스승님방을 향해 걸어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난 확인하지 않고는 스승님이 깨어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평소에는 금방 도착하던 그 곳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스승님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스승님의 모습이 보인다.. 평소처럼 여느때와 다른점 없이 그냥 평온하게 자는 것 처럼 보이는 스승님.
"스승님...어서 일어나세요! 스승님! 스승님은 그 정도 마법에 쓰러지실 뿐이 아니잖아요.."
난 스승님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스승님, 스승님의 힘없는 몸은 내 손의 움직임에 맥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란트, 소용 없단다. 그 저주 마법때문에 의식이 이공간으로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아인트가 스스로 이 세계로 찾아오지 않으면 아인트를 깨울 수 없어..."
방문에서 벽을 잡고 간신히 서서 나를 향해 말을 하는 핀누나..
난 그 순간 집을 뛰쳐나왔다. 스승님과 내가 살던 오두막...그 곳을....
"란트, 대련하자." "오늘 수련은 나무하기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이 익숙한.. 다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니..
난 끝없이 달렸다. 어딘지도 모르고 얼마를 달렸는지도 모른다. 산맥을 넘은 것 같기도 하다.. 앞에 숲이 보인다.. 숲...엄마와 시드하고 살던 집... 스승님과 살던 오두막..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모두들 날 떠나버리는 것일까? 왜 모두들...
.왼쪽 허벅지에 달려있는 검으로 부터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또 환청인가....모르겠다.
엄마가 보고 싶다..스승님도... 시드도.....
"주인님......."
옛날의 기억...정신을 차리고 보니, 클라리가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마..난 괜찮아."
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리아인. 스승님의 아들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제가 스승님을 뵐 자격이 됩니까..? 스승님을 그렇게 만든 제가..."
난 갑자기 리아인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미안했다. 그의 아버지가 고작 나 같은놈 때문에 몇년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어야 됬다니.
"물론,당연히 뵐 자격이 있습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우리가족 중 아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고..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란트군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처음이자 마지막제자인 란트군 ..."
아까는 느끼지 못했는데 리아인의 눈빛에선 스승님의 눈에서도 항상 느껴지던 굳은 신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아들은..아들인 것 같다.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다른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아닙니다. 저도 이 마을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많은 종족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니.. 그 것도 피투안 국 영토에서 말입니다. 하긴 이제 제국령이 되었지만.. 그래도 란트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또 란트군이 많은 노예들을 해방 시켰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면으로 볼 때, 당신은 아버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충분합니다."
스승님을 뵈러 간다니....갑자기 무언가 가슴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 엄마, 시드....그리고 스승님 마저 나를 영원히 떠난다면...하지만 다행히도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 출발 하시겠습니까?"
기분이 붕 뜬듯 흥분해 있는 나에게 리아인이 물어왔다.
"별 짐도 없고,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습니다."
난 오랫만에 아주 밝은 느낌의 큰 목소리로 리아인에게 말을했다.
"그럼 지금은 해도 지려하고 당장은 무리인 것 같으니 내일 출발하도록 합시다."
하긴 그 것도 그렇다. 난 한시바삐 스승님께 가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무리를 해서 달려온 리아인도 쉬어야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이오지 않는다. 스승님께서도 어릴 때 몬스터들에게 가족들을 잃으셨다고 하셨었었지. 그래서 일까? 스승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형처럼....난 내 작은 침대에 누워 스승님과 지내던 몇년간의 소중한 추억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주인님아~안자?"
잠이 오지 않아 침대위에서 뒤척거리고 있는 내 움직임에 깼는지, 클라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이 안와서.."
클라리는 다시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난 클라리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가을의 밤하늘은 너무나도 맑아 별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질듯 했다. 하긴 마음만 먹으면 별 하나 정도는 내 머리위로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지만...수많은 별똥별들이 각각 나름대로의 색을 내며 떨어지는 모습을 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가는게 무엇일까?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난 앞으로 어떻게 될까?
평소에는 별로 떠오르지 않던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스승님의 죽음으로 사라졌던 내 자아가 다시 깨어난 걸까.
스승님도...핀누나도..핀누나는 그 사건 후로 한번도 보지를 못했다. 그리고..스승님의 아내 이며 리투안제국의 황제인 그 여자도, 클라리의 옛 주인도... 클라리를 울린 그 술주정뱅이 녀석도.....보고싶었다.. 날 보고 마왕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술을 한번도 마셔본적이 없다.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고...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외로 오크들도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리아둠과 지낼 때도 마신 적이 없다. 하긴 오크들이 술을 만들지를 못해서 안 마시는 것 인지도 모르겠지만..그래서 내가 술을 먹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지금 같은 기분에는 술을 한잔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내 일생에서 내일 여행이 첫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는 엄마하고 마을에서 지냈고.. 그리고 나서 기절한 동안 옮겨져서 스승님과 지내고.. 무의식중에.. 지금 이 곳까지 와서 쓰러져버린..그 후로 이 마을에서 계속 산, 여행이라고는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
난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던 두가지 물건을 꺼냈다. 너덜너덜한.. 8서클 이후로는 보지 않았던 누나의 선물인 마법책... 그리고 엄마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무슨 색인지 딱 설명하기가 힘든 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독수리 모양의 금빛 목걸이..스승님이 쓰러지시기 전의 나하고 지금의 나 사이에 변한 것이 없다면 이 두가지 뿐일 것이다.
별들을 사이로 오랫만에 죽어가는 모습이 아닌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엄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운 모습..그런데..엄마는 엄마의 아빠나 엄마의 이야기를 왜 안해줬을까... 갑자기..그 생각이 떠오른다. 나도 친척이 있었으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도 모를텐데...
그래.. 잠시 생각을 멈추자. 이런저런 의문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 마음의 고통일뿐.
난 잡스러운 생각을 하늘로 날려보내고, 다시 집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주인님아~! 어서 일어나서 아침먹어."
어제 늦게 잠이들어서 그런지 잠에서 깨자 피곤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거실의 테이블쪽으로 걸어갔다. 언제 일어났었는지 신디와 리아인은 벌써 아침을 먹고 있었다.
"오빠 잘잤어?"
"으..응"
신디의 인사에 간신히 답을 하고 나도 테이블에 앉아 스프를 입 속으로 흘려 넣기 시작했다. 클라리의 음식솜씨는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맛있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님 짐은 내가 다 챙겨놨으니까. 주인님 아침만 먹고 어서 출발하기만 하면 돼."
언제나 처럼 내 가까이 꼭 붙어서 식사를 하는 클라리 였다. 요즘 느끼는 점이지만 이런 저런 클라리의 새심한 배려는 고마울 뿐이었다. 가끔씩 달라붙어서 귀찮게 하는것만 안하면 좋을 텐데...
"오빠 나도 같이 갈꺼다. 가도 되지?"
신디는 밥을 급하게 먹은뒤 몇 안되는 자신의 옷가지를 작은 가방에 싸들고 나오며 말을했다.
"응"
난 별 생각없이 답을했는데 왜 두사람이..아니 한명의 사람과 한명의 검이 왜 그렇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할까? 신디를 데려가는게 어때서...? 난 둘의 눈총을 무시하고 묵묵히 밥을 다 먹었다.
"리아둠, 나 잠시 여행을 다녀 올테니까, 이 마을은 잠시 네게 부탁한다."
리아둠은 클라리가 현신한 뒤부터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클라리하고 리아둠은 사이가 별로 좋지를 못했다. 뭐 그렇다고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는 것은 아니고.
"물...론. 걱..정..하..지..말...고 잘... 다..녀..와....."
이제 마을에 쳐들어 오는 사람도 없고, 리아둠 정도면 자잔한 일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리아둠은 오크치고는 괭장히 현명한 편이었으니까.
그리고 클라리와 사이가 좋지 않는 것 말고도 리아둠이 따로 사는 이유가 있었다. 리아둠이 결혼을 한 것이다. 오크들이 암컷하고 사는 것을 결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난 한번도 오크들의 암컷을 본적이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크들은 암컷을 다른 종족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암컷이 귀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난 한번도 이유를 리아둠에게 물은 적이 없고 별로 묻고 싶지도 않다.
"주인님아~! 빨리 나와 이러면 해지기 전까지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집 밖에서 클라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리아둠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볼 수 있기를.."
"믿..을...뿐..!"
간단한 말이었지만 화려한 긴 인사 보다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것 같았다. 난 오크들 집의 천으로 된 문을 들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출발 하면 되는 겁니까?"
문밖에서 클라리 신디와 기다리고 있던 리아인은.. 그러고 보니.. 리아둠과 이름이 거의 비슷하다...나를 보며 조용히 말을했다.
"네, 일정을 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가이우스 녀석과는 다르게 이사람한테는 왠지 반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저절로 존대말이 나온다고 할까. 코스모스 들길...숲과 들판...난 마을 정경들을 눈 속에 가득 담았다. 하긴 한달 정도면 다시 올껀데...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왠지 아주 오랜시간 동안 못볼것만 같은 기분이 계속 나를 감돌았다.
"저쪽으로 가는게 더 빠릅니다."
역시 리아인은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길 쪽으로 가려했다. 하긴.. 내가 다니는 그 길을 아는 건 엘프들하고 클라리정도 뿐이니까..난 앞장을 섰다. 물론,짐 두개를 끌고...하나는 신디.. 하나는 엄청 커져버린 내 검 클라리... 리아인만 혼자 뒤쪽에 두고서.
숲과 마을의 경계까지 오자.. 왠지 아쉬움이 든다. 뭔지 모르게...의지할 곳 없는 나를 진심으로 받아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크족 장로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란트, 어디 가세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쯤에는 언제나 소피가 있었지.
"스승님을 뵈러..멀리 여행을 가..."
"네?"
소피는 깜짝 놀라더니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갔다. 소피가 왜 그러지? 내가 여행을 간다는데...?
"음..저 엘프 수상한데.. 경쟁자가 생긴것 같아.."
클라리가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뭐?"
"아니.. 주인님아 빨리가자.."
흠...클라리는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언제나 말을 돌리는 버릇이있다..하지만 더 이상 묻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뒷쪽을 슬쩍 보니 리아인은 우리 쪽을 보며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음...뭐가 그렇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걸까. 최근 일년동안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여유가 생기다보니..
숲을 지나는 동안 틈틈히 보이는 엘프들과 눈으로 인사를 하고 난 수많은 전투가 있었던...그리고 수많은 피를 흘렸던 그 들판에 도착했다. 자연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년만에 완전히...그 흔적을 없애 버렸으니...하지만 이곳도 추억이라면 추억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잠시만요, 기다려 주세요..."
숲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피였다. 작은 가방과 활을 매고 달려오는 모습...우리 일행까지 도착한 소피는 급하게 준비한 듯 큰 숨을 몇번 내쉬고는 나를 보며 말을 했다.
"란트, 어디가는지는 몰라도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소피는 무슨 생각일까? 인간들을 많이 만나야 될지도 모르는데..괜찮을까?
"소피, 네가 싫어하는 인간들을 많이 만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니?"
"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피.. 내 주위에는 아이 아니면 키가 큰 여자들 밖에 없어서 그런지. 나무 위가 아니라 같이 땅위에 섰을 때, 나보다 조금 작게 보이는 소피의 모습은 조금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럼 같이가자.."
리아인은 여전히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고... 클라리를 쳐다보니... 조금 입을 삐죽거렸다. 왜들 그러는지...모르겠다. 그렇게..짧을 줄 알았던 나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마을에 온 뒤 벌써 수년째보는 가을 풍경이었지만 할상 볼 때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기에는 좋은 풍경.. 뒷 산 물든 붉은 빛과 노란 색 단풍들..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일년간 노력의 결실인 황금빛 들판... 거의 일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일생에 이런 평화가 찾아올 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도 읽고 그동안 많이 하지 못했던 검술 수련으로 많이 거칠어 졌던 검술도 다듬기도 하며, 난 요즘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란트 오빠! 손님이 왔어."
내가 있는 언덕 위로 멀리서 신디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님?"
난 천천히 풀위에 뉘였던 몸을 일으켜 신디가 달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신디는 매일 같이 지내는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크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나도 일년전에 비해 키가 좀 크긴 했다. 하지만 신디에 비해서는 그다지 크는 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
"응, 오빠를 급히 찾는 것 같아."
작년 봄 무렵 가이우스가 앞으로 이 마을에 피투안 국에서 함부로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뒤부터 이 마을은 여느 평범한 마을처럼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 아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리투안 제국 자치령에 우리마을이 지정되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드나들게 되었지만, 특별히 나한테 오는 손님은 없었다..올만큼 친한 사람도 없고....
"신디,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어?"
신디는 나에게 달려와 한쪽 팔에 매달리며 말을했다.
"음.. 남자였는데. 오빠보다 키가 크고...검은색 머리에...마음은 오빠하고 비슷하게 하늘색이야.."
누구지? 검은색 머리....친구라고는 리아둠과 클라리, 억지로 친구라하면 할 수 있는 가이우스 정도 뿐이었는데. 만약 내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곱게 신디를 보냈을 리도 없고.
난 신디를 어깨 위에 올려 목마를 태우고 집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신디는 기분이 좋은 듯, 마을 어린 꼬마들이 부르는 것을 본적이 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디, 마을 아이들하고도 친해진 것 같네?"
"응, 오빠."
신디는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고 내 물음에 답을 했다.
"아이들이 괴롭히지는 않아?"
"응,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아! 그런데 오빠."
말을하던 신디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아이들이 오빠보고 무섭다고 그랬는데 내가 아니라고 그랬다. 우리오빠는 좋은 사람이라고 나 잘했지?"
신디는 말을 해놓고 뭐가 웃긴지 혼자 꺄르르 웃었다. 꼬마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익숙한데. 신디를 통해 들으니까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응,신디, 신디는 정말 착하네."
난 내 마음을 숨기고 신디에게 밝게 답을 했다. 하긴 신디의 능력이 향상되면 마음을 숨겨봤자 소용이 없겠지만...아직은 그정도는 아니니까.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작은 우리집에 눈에 들어왔다. 신디가 온 뒤로는 수리도 하고 해서 그렇게 우중충한 느낌은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할 일이 없으면 집안 일이라도 해야지..무위도식 하는건 적성에 안 맞았다. 내가 마을의 여러 종족들에게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힘있는 자를 따르는 성향이 있는 인간과 엘프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족들의 특성 때문에 어쩌다보니, 내가 마을 촌장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어 버렸다.
"신디, 집에 왔다. 이제 내려야지."
"응"
난 신디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난 집 안으로 걸어갔다.
"란트 크리센군 맏습니까?"
집안에 들어가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얼굴... 아니..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검은 빛 머리에...전사임을 증명하는 균형잡힌 단단한 몸...분명히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네, 누구신지..."
"전, 리투안 제국 황제 세레니안느 여제와 당신의 스승이신 파트레아 아인트 슈타이튼 공의 아들, 리투안 제국 근위기사 리아인 슈타이튼 입니다."
왠지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런데스승님의 아들이었나?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본적이 있는 것 같더니..그러고 보니 눈과 머리색을 빼고는 스승님을 꼭 빼닮은 것 같았다. 눈은 스승님 만큼 맑지는 않았다. 하긴 스승님의 눈이 보통 특이한게 아니니까.. 스승님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저랬을까? 잠깐! 그런데 앞에 소개 문구는...? 스승님이 리투안 제국 여황제의 남편이었다니....!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하던 사실이다. 그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황자란 말인가?
"주인님아~~! 다녀왔어?."
부엌쪽에서 얼굴에 미소를 띄운체 밝은 목소리로 말을 하며 클라리는 걸어나오고 있었다.
"클라리, 너 혹시 저사람 아는 사람이니?"
"응, 어릴 때 몇 번 본적 있어.."
클라리가 몇번 봤다는 이야기라면 많은 인연이 있는 깊은 사이란 이야기일 것이다. 클라리의 이상한 화법이라고 해야 하는지. 왠지 사람들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그런지는...모르겠지만.
"레이디 프리안느, 제 생각에는 몇 번 본 사이라고 말할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역시 내 생각이 옳음을 리아인이 바로 증명해 주었다.
"그래, 리아인 황자. 그러고보니 내가 네 밥해주고 놀아주고 기저귀까지 갈아주었던 기억이 다시 생각이 나네..."
"레이디 프리안느, 꼭 그걸 말하실 것 까지는..."
클라리의 말에 리아인인가 하는 녀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사생활의 적발...솔직히 다 큰 남자한테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솔직히 조금...어휴.. 내가 이 녀석을 구해줘야 겠군...
"그런데 무슨일로?"
내 질문에 리아인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황급히 클라리에게서 시선을 때서 나를 향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님께서 곧 깨어나실 듯 합니다. 옐로우 로즈 핀 프리안느 께서 말씀하신 사실이니 정확할 것입니다. 저하고 같이 가서 아버님을 만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스승님이 깨어 나신다니.. 스승님이... 내 눈에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을 오랫만에 느꼈다...
"스승님이 깨어나신다고......"
"하! 오늘, 밥 당번은 스승님 입니다."
"이...이녀석... 스승을 그렇게 부려먹어도 되는거냐.."
오늘도 대련에서 스승님을 이겼다. 검을 떨어뜨리고는 언제나 처럼 이럴 수 없다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스승님. 최근에 들어서는 내가 저녁 밥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내가 대련에서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스승님이 정하신 규칙 입니다."
"이녀석...!!"
펄펄뛰는 스승님을 뒤에 둔체 난 숲쪽으로 걸어갔다. 이 곳에서 지낸지도 벌써 5년이 다 되가는 것 같다. 엄마...시드....아픈 기억이 가끔씩 떠오른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밝게 지내는 것도 스승님 때문이다. 아인트 스승님은 곁에 있기만 해도 주위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숲 속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내게도 맛있는 음식냄세가 가득 풍겨왔다. 스승님이 만드는 저녁 음식들의 메뉴가 대략적으로 머리속에 떠올랐다. 스승님도 원래는 요리를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곁에 있던 동료의 요리솜씨가 워낙 훌륭해서 어깨너머로 몇가지 배운 것이 지금 요리 실력이라던데... 곁에서 배운것 치고는 우리 스승님도 검술 못지 않게 요리도 괭장히 잘했다. 그런데 저런 요리솜씨를 가진 스승님이 그동안 내 맛없는 요리를 별 불평없이 먹을 수 있었는지...조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난 너덜너덜해진 마법책을 가슴쪽에 달린 안주머니로부터 꺼냈다. 8서클... 8서클 마법까지는 다 쓸 수 있었다. 확실하게 8서클 마법을 모든 힘을 다해 써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힘을 줄여서 써볼때는 언제나 성공했었다. 핀 누나가 8서클 부터는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했었기 때문에 나도 마법을 써볼때는 되도록이면 힘을 줄여서 써보곤 했다. 잘못하면 주위 숲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고 한 누나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음식냄세를 맡으며 쉬고 있는 나의 귀에 갑자기 들려오는 말울음 소리와 무기들이 부딪히는 쇳소리. 그것도 한두마리가 아닌....여러마리의 말울음 소리.....왠지 불길한 예감이 날 스쳐 지나갔다. 난 마법 책을 품속에 다시 집어 넣고 집쪽을 향해 바삐 달려갔다.
"스승님! 스승님, 말울음소리가..."
"뭐..? 손님이 오는 거겠지.."
스승님은 아까 식사 당번이 되었을 때 펄펄 뛰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아니에요. 한두마리가 아닌 것 같은데. 무기 소리같은 쇳소리도 들렸어요."
"란트, 사실이냐.?."
순간 스승님의 가볍게 웃고 있던 표정이 급하게 바뀌었다.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스승님. 왜 이렇게 스승님은 내 말을 안 믿는 건지. 난 스승님께 거짓말을 한 적도 없는데. 나 역시 내방으로 급히 달려가 내 검을 들었다. 장미문양의 검. 가끔씩 환청이 들리는 것 말고는 참 좋은 검이란 생각든다. 내가 다른 무기를 써보지는 않았지만. 돌까지도 반으로 잘라버릴 정도면 보통검은 아닐 것이리라.
검을 드는 순간 갑자기 엄마와 시드가 죽던날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즘에 이 꿈을 꾼적이 없는데. 자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생생하게 그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
"란트, 어서 가보자."
스승님의 다급한 목소리, 스승님도 뭔가를 느낀 듯 급하게 서두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네."
무기를 들고 급하게 집밖으로 나왔다. 내 예상이 맞았다. 우리 집 주위를 대략 수백명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히 로브를 걸친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마법사들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란트 크리센... 네 녀석이 미카 공주의 아들인 것을 진작에 알았으면 그 때 네 어미를 죽일 때 같이 죽이는 건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쳐다보았다. 왠지 기분 나쁜 목소리, 내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온 곳을 쳐다보자. 내 눈에 그 존재가 들어왔다. 저..저녀석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눈빛.. 그래 그 때 그 녀석이다! 우리 엄마와 시드를 죽인!
"괴물 사냥꾼, 페아넬리온. 네 녀석이 감히 여기가 어딘줄 알고 국경을 넘어 오는 것이냐! 제국의 법이 두렵지도 않다는 거냐!"
스승님의 목소리였다. 나와 있을 때와 다른 근엄한 목소리. 스승님도 저녀석의 존제를 알고 계셨던 것일까?
"파트레아 아인트 슈타이튼 공작. 당신이 여기 계셨군요. 후후..하지만 슈타이튼 공작 나으리, 우리가 국경을 넘었다는 증거는 거기 두사람 뿐이 아닐까요. 증거를 없애면 그 지엄한 제국 법도 두렵지가 않죠. 천하 제일이라 불리는 당신도 검술 만으로 수많은 마법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백마법사가 아닌 흑마법사를?"
스승님은 아무말 없이 그 나쁜... 그 잊지 못할 악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란트 크리센, 네 녀석도 네 어미처럼 내가 죽여주지. 하하. 아~! 내가 그 동생이라는 오크 녀석도 내가 죽였던가?"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도저히..그리고 엄마.. 시드가 힘없이 사람들에게 밟히던 그 모습... 그 모습이 떠올랐다. 난 검을 빼들고 그 나쁜.. 악당을 향해 뛰어갔다.
"안돼!, 란트 함정이야. 함정! 멈춰."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난 그 소리를 따를 이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녀석을 향해 검을 들고 내리 치려는 순간 어느 쪽에선가 검은빛이 날라오는 것이 보였다. 흑..흑마법인가.. 하지만 이미 난 멈출수 없었다. 전력을 향해 뛰었기에.. 나도 죽는건가. 엄마처럼...그 때 그 흑색 물체와 내 사이에 끼어드는 물체, 아니 사람이 보였다. 스승님.. 아인트 스승님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처럼...똑같이....
"스승님...!"
"하하.. 이래서 진짜 용사는 어리석다니까 자기 목숨보다 다른 사람 목숨 소중히 여기다니 후후. 골치거리도 없어졌고 꼬마 네 차례다. 전원 공격!"
그 악당녀석의 목소리..웃음소리... 내 의식이 점점 희미해짐을 느꼈다. 끓어오르는 마음만큼 또 무섭도록 차가워지는 반대쪽 마음.
"서플라이 바이올로지 에너지 쉴드."
6서클에 적혀 있던 마법인가.. 조금 남아있는 이성으로 스승님께 급하게 썼다. 흰 빛의 투명한 막이 스승님을 감싸는 것을 본 나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디스트럭션 올 아더"
8서클.. 처음으로 풀파워를 써보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여러개의 마법주문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마법캐스트가 끝나자 주위에 마법사인듯 보이는 녀석들은 안티매직을 열심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몸부림은 전혀 소용없이 나에게 검은빛 구체를 날린 놈을 시작으로 한놈씩 입에 피를 뿜으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검을 들고 주위에 있는 녀석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하지만 별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내 이성은 제 3자가 된 기분으로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아니 내 몸이 멈춘순간... 주위에 살아있는 인간은 나하고 스승님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시드를 죽인 그 녀석... 그 녀석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아...어떻게 이럴 수가. 녀석, 도망쳐 버린 것인가?
쓰러지듯 스승님께 회복마법을 쏟아넣고 있는 나에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등을 살며시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누나의 느낌이다. 핀 누나라면....이제 스승님도 사실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나도.. 나는 긴장이 풀리며 어느 순간 잠이들었다.
"괜찮니? 란트..?"
이 목소리.. 눈을 살며시 뜨니 핀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스승님은..스승님은요?"
내 말을 들은 누나의 얼굴에 슬픈 빛이 가득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
"돌아가셨나요?"
고개를 흔드는 누나. 도데체 어떻게 된 일이지 스승님이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왜 누나가 저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아인트가...아인트가 깨어나질 않아...저주마법을 풀었는데도. 깨어나지를 않아..."
누나의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
스승님이..언제나 강하던 스승님이..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스승님이 깨어나질 않는다고..?
"스승님은 어디 계세요?"
스승님의 방을 가르키는 누나. 누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고개를 묻었다. 난 일어나 스승님방을 향해 걸어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난 확인하지 않고는 스승님이 깨어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평소에는 금방 도착하던 그 곳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스승님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스승님의 모습이 보인다.. 평소처럼 여느때와 다른점 없이 그냥 평온하게 자는 것 처럼 보이는 스승님.
"스승님...어서 일어나세요! 스승님! 스승님은 그 정도 마법에 쓰러지실 뿐이 아니잖아요.."
난 스승님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스승님, 스승님의 힘없는 몸은 내 손의 움직임에 맥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란트, 소용 없단다. 그 저주 마법때문에 의식이 이공간으로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아인트가 스스로 이 세계로 찾아오지 않으면 아인트를 깨울 수 없어..."
방문에서 벽을 잡고 간신히 서서 나를 향해 말을 하는 핀누나..
난 그 순간 집을 뛰쳐나왔다. 스승님과 내가 살던 오두막...그 곳을....
"란트, 대련하자." "오늘 수련은 나무하기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이 익숙한.. 다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니..
난 끝없이 달렸다. 어딘지도 모르고 얼마를 달렸는지도 모른다. 산맥을 넘은 것 같기도 하다.. 앞에 숲이 보인다.. 숲...엄마와 시드하고 살던 집... 스승님과 살던 오두막..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모두들 날 떠나버리는 것일까? 왜 모두들...
.왼쪽 허벅지에 달려있는 검으로 부터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또 환청인가....모르겠다.
엄마가 보고 싶다..스승님도... 시드도.....
"주인님......."
옛날의 기억...정신을 차리고 보니, 클라리가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마..난 괜찮아."
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리아인. 스승님의 아들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제가 스승님을 뵐 자격이 됩니까..? 스승님을 그렇게 만든 제가..."
난 갑자기 리아인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미안했다. 그의 아버지가 고작 나 같은놈 때문에 몇년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어야 됬다니.
"물론,당연히 뵐 자격이 있습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우리가족 중 아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고..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란트군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처음이자 마지막제자인 란트군 ..."
아까는 느끼지 못했는데 리아인의 눈빛에선 스승님의 눈에서도 항상 느껴지던 굳은 신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아들은..아들인 것 같다.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다른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아닙니다. 저도 이 마을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많은 종족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니.. 그 것도 피투안 국 영토에서 말입니다. 하긴 이제 제국령이 되었지만.. 그래도 란트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또 란트군이 많은 노예들을 해방 시켰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면으로 볼 때, 당신은 아버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충분합니다."
스승님을 뵈러 간다니....갑자기 무언가 가슴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 엄마, 시드....그리고 스승님 마저 나를 영원히 떠난다면...하지만 다행히도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 출발 하시겠습니까?"
기분이 붕 뜬듯 흥분해 있는 나에게 리아인이 물어왔다.
"별 짐도 없고,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습니다."
난 오랫만에 아주 밝은 느낌의 큰 목소리로 리아인에게 말을했다.
"그럼 지금은 해도 지려하고 당장은 무리인 것 같으니 내일 출발하도록 합시다."
하긴 그 것도 그렇다. 난 한시바삐 스승님께 가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무리를 해서 달려온 리아인도 쉬어야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이오지 않는다. 스승님께서도 어릴 때 몬스터들에게 가족들을 잃으셨다고 하셨었었지. 그래서 일까? 스승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형처럼....난 내 작은 침대에 누워 스승님과 지내던 몇년간의 소중한 추억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주인님아~안자?"
잠이 오지 않아 침대위에서 뒤척거리고 있는 내 움직임에 깼는지, 클라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이 안와서.."
클라리는 다시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난 클라리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가을의 밤하늘은 너무나도 맑아 별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질듯 했다. 하긴 마음만 먹으면 별 하나 정도는 내 머리위로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지만...수많은 별똥별들이 각각 나름대로의 색을 내며 떨어지는 모습을 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가는게 무엇일까?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난 앞으로 어떻게 될까?
평소에는 별로 떠오르지 않던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스승님의 죽음으로 사라졌던 내 자아가 다시 깨어난 걸까.
스승님도...핀누나도..핀누나는 그 사건 후로 한번도 보지를 못했다. 그리고..스승님의 아내 이며 리투안제국의 황제인 그 여자도, 클라리의 옛 주인도... 클라리를 울린 그 술주정뱅이 녀석도.....보고싶었다.. 날 보고 마왕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술을 한번도 마셔본적이 없다.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고...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외로 오크들도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리아둠과 지낼 때도 마신 적이 없다. 하긴 오크들이 술을 만들지를 못해서 안 마시는 것 인지도 모르겠지만..그래서 내가 술을 먹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지금 같은 기분에는 술을 한잔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내 일생에서 내일 여행이 첫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는 엄마하고 마을에서 지냈고.. 그리고 나서 기절한 동안 옮겨져서 스승님과 지내고.. 무의식중에.. 지금 이 곳까지 와서 쓰러져버린..그 후로 이 마을에서 계속 산, 여행이라고는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
난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던 두가지 물건을 꺼냈다. 너덜너덜한.. 8서클 이후로는 보지 않았던 누나의 선물인 마법책... 그리고 엄마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무슨 색인지 딱 설명하기가 힘든 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독수리 모양의 금빛 목걸이..스승님이 쓰러지시기 전의 나하고 지금의 나 사이에 변한 것이 없다면 이 두가지 뿐일 것이다.
별들을 사이로 오랫만에 죽어가는 모습이 아닌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엄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운 모습..그런데..엄마는 엄마의 아빠나 엄마의 이야기를 왜 안해줬을까... 갑자기..그 생각이 떠오른다. 나도 친척이 있었으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도 모를텐데...
그래.. 잠시 생각을 멈추자. 이런저런 의문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 마음의 고통일뿐.
난 잡스러운 생각을 하늘로 날려보내고, 다시 집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주인님아~! 어서 일어나서 아침먹어."
어제 늦게 잠이들어서 그런지 잠에서 깨자 피곤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거실의 테이블쪽으로 걸어갔다. 언제 일어났었는지 신디와 리아인은 벌써 아침을 먹고 있었다.
"오빠 잘잤어?"
"으..응"
신디의 인사에 간신히 답을 하고 나도 테이블에 앉아 스프를 입 속으로 흘려 넣기 시작했다. 클라리의 음식솜씨는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맛있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님 짐은 내가 다 챙겨놨으니까. 주인님 아침만 먹고 어서 출발하기만 하면 돼."
언제나 처럼 내 가까이 꼭 붙어서 식사를 하는 클라리 였다. 요즘 느끼는 점이지만 이런 저런 클라리의 새심한 배려는 고마울 뿐이었다. 가끔씩 달라붙어서 귀찮게 하는것만 안하면 좋을 텐데...
"오빠 나도 같이 갈꺼다. 가도 되지?"
신디는 밥을 급하게 먹은뒤 몇 안되는 자신의 옷가지를 작은 가방에 싸들고 나오며 말을했다.
"응"
난 별 생각없이 답을했는데 왜 두사람이..아니 한명의 사람과 한명의 검이 왜 그렇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할까? 신디를 데려가는게 어때서...? 난 둘의 눈총을 무시하고 묵묵히 밥을 다 먹었다.
"리아둠, 나 잠시 여행을 다녀 올테니까, 이 마을은 잠시 네게 부탁한다."
리아둠은 클라리가 현신한 뒤부터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클라리하고 리아둠은 사이가 별로 좋지를 못했다. 뭐 그렇다고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는 것은 아니고.
"물...론. 걱..정..하..지..말...고 잘... 다..녀..와....."
이제 마을에 쳐들어 오는 사람도 없고, 리아둠 정도면 자잔한 일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리아둠은 오크치고는 괭장히 현명한 편이었으니까.
그리고 클라리와 사이가 좋지 않는 것 말고도 리아둠이 따로 사는 이유가 있었다. 리아둠이 결혼을 한 것이다. 오크들이 암컷하고 사는 것을 결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난 한번도 오크들의 암컷을 본적이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크들은 암컷을 다른 종족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암컷이 귀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난 한번도 이유를 리아둠에게 물은 적이 없고 별로 묻고 싶지도 않다.
"주인님아~! 빨리 나와 이러면 해지기 전까지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집 밖에서 클라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리아둠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볼 수 있기를.."
"믿..을...뿐..!"
간단한 말이었지만 화려한 긴 인사 보다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것 같았다. 난 오크들 집의 천으로 된 문을 들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출발 하면 되는 겁니까?"
문밖에서 클라리 신디와 기다리고 있던 리아인은.. 그러고 보니.. 리아둠과 이름이 거의 비슷하다...나를 보며 조용히 말을했다.
"네, 일정을 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가이우스 녀석과는 다르게 이사람한테는 왠지 반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저절로 존대말이 나온다고 할까. 코스모스 들길...숲과 들판...난 마을 정경들을 눈 속에 가득 담았다. 하긴 한달 정도면 다시 올껀데...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왠지 아주 오랜시간 동안 못볼것만 같은 기분이 계속 나를 감돌았다.
"저쪽으로 가는게 더 빠릅니다."
역시 리아인은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길 쪽으로 가려했다. 하긴.. 내가 다니는 그 길을 아는 건 엘프들하고 클라리정도 뿐이니까..난 앞장을 섰다. 물론,짐 두개를 끌고...하나는 신디.. 하나는 엄청 커져버린 내 검 클라리... 리아인만 혼자 뒤쪽에 두고서.
숲과 마을의 경계까지 오자.. 왠지 아쉬움이 든다. 뭔지 모르게...의지할 곳 없는 나를 진심으로 받아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크족 장로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란트, 어디 가세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쯤에는 언제나 소피가 있었지.
"스승님을 뵈러..멀리 여행을 가..."
"네?"
소피는 깜짝 놀라더니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갔다. 소피가 왜 그러지? 내가 여행을 간다는데...?
"음..저 엘프 수상한데.. 경쟁자가 생긴것 같아.."
클라리가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뭐?"
"아니.. 주인님아 빨리가자.."
흠...클라리는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언제나 말을 돌리는 버릇이있다..하지만 더 이상 묻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뒷쪽을 슬쩍 보니 리아인은 우리 쪽을 보며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음...뭐가 그렇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걸까. 최근 일년동안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여유가 생기다보니..
숲을 지나는 동안 틈틈히 보이는 엘프들과 눈으로 인사를 하고 난 수많은 전투가 있었던...그리고 수많은 피를 흘렸던 그 들판에 도착했다. 자연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년만에 완전히...그 흔적을 없애 버렸으니...하지만 이곳도 추억이라면 추억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잠시만요, 기다려 주세요..."
숲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피였다. 작은 가방과 활을 매고 달려오는 모습...우리 일행까지 도착한 소피는 급하게 준비한 듯 큰 숨을 몇번 내쉬고는 나를 보며 말을 했다.
"란트, 어디가는지는 몰라도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소피는 무슨 생각일까? 인간들을 많이 만나야 될지도 모르는데..괜찮을까?
"소피, 네가 싫어하는 인간들을 많이 만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니?"
"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피.. 내 주위에는 아이 아니면 키가 큰 여자들 밖에 없어서 그런지. 나무 위가 아니라 같이 땅위에 섰을 때, 나보다 조금 작게 보이는 소피의 모습은 조금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럼 같이가자.."
리아인은 여전히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고... 클라리를 쳐다보니... 조금 입을 삐죽거렸다. 왜들 그러는지...모르겠다. 그렇게..짧을 줄 알았던 나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