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4장 제국 검술대회-4(수정)

푸른바람 BlueWind·2002. 3. 17. AM 11:39:41·조회 2775·추천 41
"The Pure Knight of Lily! 란트! The Pure Knight of Lily!"

내가 탄 마차는 엄청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거리를 횡단하고 있었다. 석양에 모두들 주황빛으로 물든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보았던 그 낯뜨거운 흰 천을 흔들고 있었다. 이건 정말 기뻐해야 할지, 그 별 것 아닌 행동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내 주위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어린 꼬마들이나 나이가 적당히 든 아저씨들이 많았다. 아마, 가장 많이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세대가 그 세대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휴, 별로 영웅은 안하고 싶은데. 곱게 살인마로 지내는게 마음이 편하다. 살인마로 지내는게 곱게 지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녁무렵이 다되었음에도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러 가야하지 않나? 하긴 겨울철이라 해가 짧으니 조금 시간이 남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보니 저녁을 먹을 때가 되더라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차 안쪽을 보니, 소피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조금 당황한 까닭인지 마차 안쪽에서 가만히 있었고, 그에 반해 신디와 클라리는 마차의 창문에 바싹 붙어서 사람들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엄청난 물결은 마차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수도 있었지만 이 군단은 마차가 지나가는데 아무 불편이 없도록 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럴 때는 이런 것도 상당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갈 때는 가이우스가 자기 집 마차를 타고 간다고 한 까닭에, 이 인파 속을 뚫고 어떻게 황궁에 돌아갈까 걱정을 했었는데.

이 엄청난 물결은 황성의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난 왠지 어색한 느낌을 계속 받으며. 솔직히 아까 말했듯이 나를 향한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은 많이 느낄 수 있었어도 이렇게 맹목적인 동경의 감정을 받기는 처음이었던 까닭에 이 나를 향한 환호 자체가 여전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황궁의 경비병, 아니 근위 기사들은 우리 마차가 오는 것을 보고는 잠시 정지를 시켰다. 하지만 곧 내가 통행증을 건네주자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을 제지한 후, 황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난 그 정신이 혼란하게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되도록이면 빨리 벗어나기 위해 급히 황성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보니 날 따라 오던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성문앞에서 서있다가 내 마차가 멀찍히 떨어지 후에야 천천히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한참동안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보니, 그 사람들이 사라지니까 왠지 뭔가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헛,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방금전까지는 어색함을 느꼈으면서.

그런데 영웅이 됬건 안됬건 마부 하나 없이 내가 직접 몰고 있는 마차를 볼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제국 서열 5위의 권력자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뭐, 성문 같은데 지날 때 말고는 아! 대회중에 한번 사용했었지, 아무튼 그런 경우 말고는 권력이란 것을 사용해 본 경험이 없으니.

마차는 황궁의 넓은 정원을 가로 질러 황궁의 본 건물에 도착을 했다. 앞에는 황실의 노란색인지 금색인지 모를 마차가 벌써 도착해 안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마차를 그 뒤쪽을 향해 마차를 몰아간 뒤 조심스럽게 세웠다. 궁으로 들어가던 황제는 마차 소리를 들었는지 우리쪽을 향해 돌아섰다.

"크리센 공!"

하인들도 있는 상황이라. 그 호칭으로 말하는 황제, 흠. 왠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한 까닭에 그 호칭으로 부터 애매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네. 폐하."

난 마차가 서자마자 마차에서 내리며 황제를 보며 답을 했다. 황제 옆을 보니, 무표정의 황태자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보이는 리아인, 그리고 거의 리아인이 안고 가고 있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축 늘어져 리아인에게 기대고 있는 공주가 있었다.

"조금 휴식을 취한 후에 짐의 방으로 오세요. 크리센공."

난 좀 쉬고 싶은데, 어찌됬건 황제는 황제인 까닭에 앞에 있으면 별로 편하지가 못했다. 아무래도 대회 건 때문에 황제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인 것 같았다.

"네, 폐하."

'거절하겠습니다. 폐하!' 하고 말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황제 모독죄로 몰려오는 기사들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황제한테 시달리는게 났지. 대충 초소하고 경비하고 있는 인원수로 계산해 볼 때, 수도 주둔군만 해도 거의 2만이 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을 하려면, 지금까지 내가 죽인 수의 사람들의 몇 배를 하루동안 죽여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전혀 사악한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포함 될 가능성도 많고, 쩝. 고결한 백합의 기사가 속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걸 그 응원단들이 알면 어떤 생각을 할지. 어쩌다가 하고 많은 별명중에 '고결한' 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황제는 내 대답을 듣자 안 보일 정도로 작게 미소를 띄우고는 돌아서서 황궁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황태자 역시 섬뜩한 웃음을 나에게 보내고는 걸어가버렸다. 에이! 저 녀석은 보기만 해도 재수가 없다니까. 이런 저런 사건도 있고, 좀 불쌍하긴 하지만 내가 저녀석을 불쌍하다 마다 할 쳐지는 아니니까.

리아인은 클라우 그 녀석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또 다른 존재를 부축해서 걸어갔다. 클라우 그녀석은 다른 사람 마음에 비수를 꽂는데는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정말, 누굴 닮았는지. 어휴, 아무튼 모레 두고보자.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줘야겠다.



황제의 방 앞에 도착하니 시녀 몇 명이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전에 그 생각하기도 끔찍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럴 때는 황제가 일부러 시녀들을 보내 뒀다가 지금과 같은 평상시에는 시녀들을 세워놓는 것이 같기도 했다.  

내가 문쪽으로 다가서자 시녀들이 내 앞을 막았다. 역시 황제 직속 시녀라 간이 크다는 건지.

"누구시죠? 폐하께는 무슨일로?"

"란트 크리센, 남파나단 자치령주요. 페하께서 부르셔서 왔소."

난 시녀들에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시녀는 한참을 내모습을 살펴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날 쳐다보고는 곧 물러섰다. 아마도 저 시녀 역시 내가 자치령주라는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지? 솔직히 황제를 죽일 마음이면 검문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텐데. 혹시 이 여자들도 입고 있는 시녀복과는 다르게 황제처럼 여 전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천천히 문을 열고 황제의 방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소파에 앉아서 창에 달린 커텐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전에 왔을 때는 커텐이 노란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흰색이었다. 방의 문이 닫히자 황제는 내가 들어 온 것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란트, 빨리 왔네?"

난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말을했다.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하다니 정말 피곤해.

"네, 세리 누나. 그런데 무슨일로?"

정말 상황에 따라 존칭을 바꿔야 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서부대륙 최고의 권력자이니,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대회 때문에 불렀어. 란트, 정말 대단하던데? 그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하게 행동을 하다니. 그래서 나도 백합의 기사 응원단에 참가하기로 했어. 커텐도 흰색으로 바꿨고, 그래도 괜찮지?"

황제는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아무리 봐도 오십이 다 되어 가는 것으로 안보이는 그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을했다. 그런데 백합의 기사 응원단이라고? 응원단이라니? 응원이라는 건 그냥 경기장에서 하고 끝이나는 것이 아니었나?

"네? 백합의 기사 응원단, 그게 뭐에요?"

"세상에! 주인공이 모르다니, 너 경기 끝나고 사람들이 경기장 밖에서 잔뜩 모여서 응원단을 결성하고 있던데 다른 톱시드 배정 받은 사람들도 다 있어. 뭐, 힐튼 집안이나 황실 응원단이 규모가 제일 크긴 크지만."

황제는 아무리 들어도 자기 자랑으로 밖에 안들리는 말을 내 앞에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황제가 거기에 가입을 했을까? 도저히 예측 불가능의 황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누나가 거기에 가입을...?"

"응, 그냥. 란트 네가 좋아서. 물론 갑옷 다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가서 가명으로 가입을 했지. 세리 슈타이튼. 음, 생각 해보니 이게 진짜 본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정말 못말리는 황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리 슈타이튼, 황제 이름의 약자에 스승님의 성이었다. 제국 황제의 정통성 때문에 결혼을 한 후에도 리투안 이란 성을 그대로 쓰는 황제였다. 하지만 평범한 여자, 아니 황제만 아니었더라도 슈타이튼이란 성을 가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황태자 역시 아버지인 스승님의 성을 따르지 않고 리투안이란 성을 사용하고 있다. 리아인이야 뭐 그런거 하고 상관 없이니 슈타이튼 성을 그대로 쓰는 것 같고, 공주는 어떤 성을 쓰지? 흠..지금 이 상황에 물어보긴 그러니까, 나중에 기회가 나면 리아인한테 물어봐야겠다.

"란트,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깨끗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어? 옷에 피 한방으로 안 묻히고..."

그걸 어떻게 설명을 하란 말이야. 직접 검들고 보여줄 수도 없고 도저히 말로는 설명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아, 그냥 새 옷을 안 더럽히려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됬어요. 상대편 녀석이 도와준 것도 있지만 아무튼 실전에서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싸우니까, 피의 전사니, 피의 마왕이니 하는 별명이 붙게 됬죠."

한 때는 마을 사람들도 그 호칭으로 날 불렀으니까..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안 뒤부터는 마을 사람들은 간단히 나를 수호자라고 불렀다. 물론, 두려워 하는 마음들이 모두들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것보다는 고마워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마을 잔치나 결혼식, 축제 같은 것을 할 때는 꼭 날 빼놓지 않고 초대하곤 했었으니까, 모든 종족들이. 그 때는 별로 크게 느끼지 못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왠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 그 호칭 나도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그런데 그 소문에 나오는 피의 전사는 괭장히 큰 키, 큰 덩치에 험악하게 생겼는데다 오우거 들이 들고 다니는 몽둥이 크기의 검을 들고 단 칼에 열명이 넘는 사람들을 베어 버린다고 하던데, 넌 안 그렇잖아. 넌 크진 않지만 날렵하고 귀엽고, 검술은 깔끔하니까."

뒤에 말은 칭찬인데 앞에 말은 좀 그냥 듣고 있기에는 조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에 말 역시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은 그 가운데 귀엽다는 말이 들어간 것이었다. 솔직히 몇번을 생각해도 난 내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꼭 큰 저택 깊숙한 곳에서 힘든일 한 번 안해본체로 고이 고이 모셔가면서 큰 그런 도련님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햇빛을 많이 쬐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도 하나도 타지 않았는데다 몸도 완전히 덜 큰 어린애 몸이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최근까지 한번도 내 모습에 대해 신경을 쓴적이 없으니, 난 사람들이 무서워 하기에 진짜 험악하게 생긴줄 알고 있었다. 정말 이 외모에 대해서는 모를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방금 칭찬 반 놀림 반에 대한 적절한 대꾸를 해줘야 할 것 같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 나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만, 아무래도 클라리에게 하도 많이 당했던 까닭에 왠지 말싸움에서 당하고만 있으면 손해같다는 생각이 든다. 쩝.

"우리 마을 사람들도 리투안 제국 황제는 주름살 투성이에 마귀할멈같이 생겼는데다 매일 히스테리만 부리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누나는 안 그런 것 같네요. 얼굴도 예쁘고, 말투도 젊고, 뭐 중요한건 실제로는 곧 할머니가 될 것이란 점이지만요."

내 말을 들은 황제의 표정이 세단계로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더니 기쁜듯 웃다가 곧 두개가 섞인 애매모호한 표정이 되었다.

흠, 내가 정말 황제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니까. 뭐, 하루동안 물론 스승님 대리 였지만 데이트도 했었는데,  이정도 쯤이야. 그런데 진짜 이러다가 황제가 열받아서 군대를 끌고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하지? 모르겠다. 정말 요즘에 난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란트 내가 졌다 젔어. 정말."

황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 애매모호한 표정을 풀고는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황제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능력 밖인 존재였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니, 황태자 였다. 그런데 저녀석은 왜 내가 여기에 있을 때만 맞춰서 오냔말이야? 뭐, 저녀석이 보기에는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세인트, 무슨일이야?"

황제는 나에게 말하는 것 만큼 편하게 황태자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인데, 만난지 몇 주 밖에 안되는 사람보다 더 어렵게 대하는 것 같다. 전에는 상황이 상황이었다보니, 정확히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지탄그 해적 소탕을 위한 군 이동건에 대한 보고 때문 입니다.."

지탄그, 그 때 그 회의 때 올라왔던 사항이구나. 예전에 지탄그 왕국의 해적단은 주로 코리안트 왕국에 집중 되었지만 코리안트 왕국과의 해전에서 완패 후 항복을 한 뒤부터는 대상을 서부지역으로 돌리고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리투안 제국의 남부 지역의 백성들이 기습적인 공격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 대책 마련을 위해서일 것이다.

최근 며칠동안 가이우스로 부터 들은 정세에 따르면 그렇고 했다. 뭐 꼭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말해주는데, 들어 두어서 나쁠건 없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머리 속에 넣어 뒀다.

어찌됬건 황태자 녀석 보고 있기도 그렇고, 황제하고 말 장난 하는 것도 너무 부담스럽고.. 이 기회에 여기서 빠져나갈까?

"폐하, 그럼 전 이만."

난 황태자 녀석을 한번 쓱 쳐다본 뒤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녀석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녀석에게는 나란 존재가 골치아프기는 하겠지만. 저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은데 녀석이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란트. 백합의 기사님, 대회에서 열심히 해야해. 알겠지?"

황제는 잽싸게 빠져나가려는 내 쪽을 향해 아쉬운 듯 말을했다. 훔. 왠지 조금 미안했지만..이 기회가 아니면 잘 시간이 되기 전까지 도저히 빠져나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난 황태자 녀석이 다시 날 쳐다보기 전에 빨리 황제의 방을 빠져 나왔다. 저 녀석 만약 내가 지금 이모습이 아니라, 미카 모습으로 있었으면 완전히 난리를 쳤을 텐데, 흠, 하지만 그래도 저 녀석은 여자 울리는 짓은 안하니까. 그 점은 클라우 녀석에 비해서 좋게 봐줘야 할까?

문 앞에는 여전히 시녀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얼굴로만 보면 시녀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 밖에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시녀들은 지극히 평범하게 생겼다. 차라리 황태자의 그 딱딱한 비서가 더 낳아보이니까, 게다가 지금 황제의 방 앞에 서 있는 시녀들은 자기가 황제라도 되는 듯이 거만한 표정까지 하고 있으니. 눈빛도 썩 마음에 안들고, 괜히 스트레스 더 받기 전에 빠져 나와야지.

난 방으로 돌아갈겸 복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기회에 스승님이 계신방도 찾아 볼까? 그러고 보니 특별히 궁안을 돌아다니거나 한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제대로된 통로보다는 황제 전용 비밀통로로 더 많이 걸어다닌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니까.

난 방으로가는 길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런 건물에서 살지 않아 특별히 인식을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밤인데도 불구하고 복도가 전혀 어둡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등을 밝혀놓거나 하지도 않았다. 정말 왜 내가 눈치를 못채고 있었을까? 하긴 밤에 돌아다닌 적이 없었지만, 아무튼 바닥을 제외한 복도의 벽 전체에서 부드럽게 빛이 나오고 있었다. 방에는 복도와 같인 이러한 빛이 없었었기 때문에 내가 눈치를 더 채지 못한 것 같다. 하긴 잠을 잘 때는 어두워야 하니까.

이  역시 약하게 마나가 느껴지는 것이 마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전에 마법사 길드가 봉인되어 버리면서 마법사들의 수가 급감했다는 사건과, 핀 누나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저런 마법적 장치들 때문에 아마 황성에 엄청난 수의 마법사들이 상주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아니면 드레곤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난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신선한 느낌을 받으며 복도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빛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흑....흑...."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환청인가?  왠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흑...정말...이럴 순 없어...흑..."

환청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마법으로 도배가 되어있는대다 언데드라면 끔찍히 싫어 하는 황제가 사는 성에 유령이 있는 것은 아닐테고, 아무래도 식당쪽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았다. 정말 누구지?

난 왠지모를 쓸 때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식당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다가가면 갈 수록 그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누가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식당의 큰 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열었다.

식당안을 들여다보니...울고 있는건, 다름 아니라 공주였다. 쩝, 도데체 몇시간 동안 울고 있는 것일까? 정말, 황실 세 남매 중에서 연애 사업에 아무 지장 없는 존재는 건 리아인 뿐인 것 같다.

공주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술병이 몇개 놓여져 있었다. 세상에 저 많은 걸 다 마셨단 말이야? 예전에 내가 술 먹은 기억에 의하면, 난 딱 반병 먹고 취해서 정신왔다갔다 한 걸로 기억하는데, 공주도 술을 잘마시는 것 같다. 아니면 오늘따라 지나치게 과음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공주가 엎드려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던 벽난로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는데다 실내복이라 그다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저렇게 있으면 무척이나 추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왠지 모르게 생기는 동정심에 공주 가까이 걸어갔다. 나도 쓸 때 없이 이런 저런 일에 참여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공주님,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안됩니다."

난 테이블에 엎드려서 울고 있는 공주를 일으켜 세우고는 말을했다. 뭐, 난 술마시고 정원에서 자고도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여자니까. 그런데 공주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빨갛게 되서 눈에 촛점이 없고 술냄세가 풍겨오는게, 취한게 틀림이 없었다. 잠깐, 나도 술마시고 이렇게 됬었다는 말이잖아. 확실히 왠만한 일이 아니면 술은 피하도록 해야 되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클라우 오빠? 오빠... 어디.... 갔었어...내가.... 그렇게....찾았는데...."

헛, 이놈의 공주 갑자기 왜 그래?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 녀석하고 나하고 착각을 할 수 있냔 말이야. 우선적으로 키만해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 그러던 공주는 갑자기 내손을 꼭 잡더니 말을했다.

"오빠....날....미워...하지마....난...그러면...못..살..것...같아...."

내 쪽을 보고 있는 공주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쩝. 이 공주도 내일 물을 엄청 많이 마셔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눈물을 쏟아냈으니까. 뭐 술을 그 만큼 마셔서 보충을 하긴 했겠지만.

휴 졸지에 여자들 하소연하는 것을 들어주는 역할을 맡게 된 것 같다. 클라리, 황제, 그리고 공주, 아무튼 공주, 이렇게 보니 더 불쌍해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주는 자기의 볼을 내손등에 비비더니, 그대로 눈물방울을 흩날리며, 테이블에 엎어져 잠이 들어 버렸다.

도대체 잠들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래도 어린애도 아니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 공주인데 엎고 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난리가 나니까, 그렇다고 끌고 갈 수는 더 더욱 없는데다 마법을 사용해서 옮긴다고 하더라도 잘못하다가는 공주를 납치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휴..정말, 난 한숨을 내 쉰 후, 백합무늬가 그려진 내 흰 망토를 벗어서 공주를 덮어주었다. 나중에 돌려주겠지. 그런데, 술냄세가 배기면 어떻게 하지? 쩝, 안되면 마법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지. 그리고 난 꺼져가는 벽난로 쪽에 마법을 썼다.

"파이어!"

꺼져가던 불씨가 확 살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힘조절을 잘 못하는 바람에 불이 밖으로 삐져 나오려 했지만, 그 순간 어떤 막같은 것에 불이 막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사소한 곳 까지  마법으로 이루어진 방비가 철저했다. 어쨌든, 화염마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실수하고, 보통집이였으면 불을 낼뻔 했으니까, 불이나면 마법으로 얼려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다지 문제는 없었겠지만. 아무튼, 난 날이 밝을 때까지 마법이 지속 되도록 해 놓고 식당밖으로 빠져나왔다. 뭐, 저 정도면 춥지는 않겠지.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왠지 찝찝했다. 내가 그 재수 없는 녀석이랑 닮았다니, 뭐 술취한 공주의 헛소리라 생각하려고 노력해봤지만 그렇게 잘 생각되지가 않았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내 얼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상처를 내거나 할 수도 없고, 상처를 만들어 봤자 별로 크지도 않은 키에 마른 체격을 가진 나로써는 무섭다기보다는 꼭 매일 싸우고나 다니는 말썽꾸러기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될 것 같다. 역시 온몸가득 피에 쩌려서 돌아디녀야 하는데, 제국령에서 그런 상태도 돌아다니다가는 감옥에 들어가거나 바로 즉결처형을 당하기 딱 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취한 공주를 본 까닭에 황궁을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고 기분도 그다지 편치않은데 그냥 방으로 올라가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다.



"주인님아~! 어디 가?"

옷을 챙겨 입고 있는 뒤쪽으로 클라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흰 옷이 안 더럽혀 지도록 마법을 써 둬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을 놓고 입고 다닐 수가 없으니, 물론 그 전에북부 산맥의 마을에서 맞춘 옷이 있지만 여행을 할 때, 단벌로 다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사우스 트립톤의 그 사건 이후로 확실히 깨달았다.

"내일 시합이잖아. 몸이라도 좀 풀어둬야지. 같이 내려 갈래?"

그러고 보니 황궁에 온 뒤에는 클라리하고 같이 다닌 것보다는 따로 돌아다닌 적이 많았다. 여행 중에는 조금도 옆에서 안 떨어지려고 하더니, 그래도 황궁은 편한 곳이라 그럴까? 하긴 핀 누나, 클라리에게는 엄마의 기운이 황궁 전체를 덮고 있으니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클라리 같은 정신체는 더욱더 그 것에 민감할 것이므로.

"응,주인님아, 내가 마법으로 도와줄게, 연습할 때."

클라리도 옷을 따라 챙겨 입고는 일어섰다. 그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우스나 리아인이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누가 찾아왔지? 또 황제인가?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문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아니라 공주였다. 내 망토를 팔에 든체.

"저 크리센공, 망토를 돌려드리려고."

공주를 가까이서 보니 황제보다 조금 커서 키가 나하고 거의 똑같았다. 주는 분위기 빼고는 외형적인 면에서는 황제와 거의 똑같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황제를 확실하게 젊게 꾸며서 보내면 완전히 일란성 쌍둥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들었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보내셔도 되는데 공주님께서 이렇게 직접 오시다니."

공주는 그런데 황제하고 다르게 풍기는 분위기가 확실히 공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잘난척한다거나 예쁜척하는 그런 공주 분위기가 아니라. 검술이 뛰어난 점 말고는 주는 분위기는 전형적인 이야기 책에 나오는 공주의 분위기 였다. 흠...

"감사 인사를 드리려면 직접 찾아오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공주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방금 전에 말한 그게 다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 어제 크리센 공께  실례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나 해서...."

공주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갛게 되서 고개를 숙였다. 실례라, 엄청난 실례를 했지. 세상에 착각할 사람이 있지, 그 원수 같은 녀석이랑 날 착각하다니. 정말,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별로 편치 않을 공주한테 따져봐야 뭘 할까 하는 생각에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어제 식당에 일이 있어서 들렸는데 주무시고 계시길레...."

휴...정말 거짓말까지 해야 되고, 아이고 머리야. 무슨 여자들하고 원수를 진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이런 저런 일에 휩싸이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여자로 오해 받는 경우가 있지를 않나. 우리 마을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 사는 여자애들이야 내가 나타나면 열심히 피하기 바빴으므로 여자라는 존재와 접할 일도 그다지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공주는 그제서야 기운을 조금 차린 듯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쳐다봤다. 간간히 아직 술냄세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머리도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하긴 술 반병에 완전히 취해버리는 나보다야...뭐...

"잠시 방에 들어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원래, 이런것은 인사치례로 해야 한다고 책에서 읽었다. 솔직히 난 빨리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리고 클라리가 있는데 공주가 들어올리가 있을까?

"괜찮아요. 크리센공. 그냥 망토만 돌려드리려고 왔었답니다. 그럼 경기에서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공주는 나에게 망토를 건내주고는 다시 힘이 없이 인사를 하고나서  복도로 걸어갔다. 왠지 공주에게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니 아니겠지, 내가 잘못 느낀거겠지. 그런데 경기에서 좋은 결과라. 다음 경기는 공주께서 사모하시는 그 뭐 같은 클라우디우스 성기사 제 2 군단장 나으리하고의 시합인데, 흠 그걸 알고도 저 말을 했을까?

"주인님아, 무슨 일이야?"

클라리는 공주가 가자마자 내 뒤쪽으로 다가와서는 뭔가 추궁하듯 말을했다. 왜그런지 몰라도 클라리는 내가 여자하고 무슨 일만 하면 잡아먹으려 하곤 했다. 나도 별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닌데, 정말 주종관계가 거꾸로 된 듯한 느낌을 요즘에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아, 어제 밤에 식당에 뭐 두고 온게 있어서 갔는데. 공주가 술에 취해서 테이블 위에 뻗어 있어서. 감기걸릴까봐 망토를 덮어줬어."

약간의 거짓말이 섞인 사실이었다. 솔직히 클라우 그 녀석 이야기는 왠만하면 클라리 앞에서는 꺼내지 않으려고 하니까.

"정말이지? 그럼 어서 내려가자."

생각 외로 순순히 넘어가는 클라리, 다행이다.

난 공주에게서 돌려받은 망토를 두르고 정원쪽을 향해 클라리와 함께 내려갔다.



"음, 오늘 주인님의 임무는... 아! 저기 저 새! 꼬리에 깃털 하나 뽑아서 가져오기."

클라리는 한참동안이나 고민을 하더니 하늘 위에 떠있는 매 한마리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정말 도와달라 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도대체 검술 훈련하고 새 깃털 가져 오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지? 피곤하게 플라이 마법 쓰기 싫은데.

"잠깐, 그거하고 훈련하고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클라리?"

내말을 들은 클라리는 인상을 약간 찌푸리더니 퉁한 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너무해! 소피하고 세리언니에다 공주까지 예쁜 여자들이 많이 생기니까 내가 필요 없다 그거지?..피, 내 부탁도 안들어주고."

"......"

그런데, 왜 여기서 소피에다 황제하고 공주이야기가 나오는거야? 쩝, 그리고 난 좋아하는 사람 있는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엔 여자들한테 시달려서 피곤해 죽을 판인데 내가 그럴리가 없었다. 잠깐, 내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든 내가 쫓아다니든 그게 클라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주인님이 이번 임무 안하면 나 울어버릴꺼야."

"......"

정말, 죽겠네. 클라리는 또다시 그 주특기, 눈에 눈물고이기를 시작했다. 확실히 주종관계가 뒤집힌것 같은 느낌을 다분히 받고 있다. 내가 클라리보고 주인님 하고 해야 맞을 것 같은 상황.

"알겠어. 해주면 되잖아."

난 목소리에 불만을 가득 담아 클라리를 향해 말을했다. 그러자 역시 언제 그랬냐는듯 클라리는 다시 평소의 그 활짝 웃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늘을 보니 그 원수같은 매는 아직도 황성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왕 깃털하나 뽑을 것 확 단칼에 베어버릴까? 흠, 그건 좀 그렇겠다. 그러면 황궁의 정원 위로 핏방울이 가득 떨어질텐데, 그랬다가 무슨 오해를 받으려고.

난 한참동안 플라이 마법을 준비했다. 어떻게 된건지 몰라도, 이야기에 보면 마법사들은 쉽게 잘 날아다니곤 하던데, 난 그 어렵다는 운석소환보다도 플라이 마법을 쓰는게 더 힘들다고 느껴졌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이 것 역시 그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의 체질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이!"

오랫만에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순간 서서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매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체 황궁에서 제일 높은 탑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도 매나 독수리하고 '패밀리어' 마법이나 걸어볼까? 박쥐나 들쥐 같은 거하고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매하고 '페밀리어'를 맺으면 이런 고생을 안해도 되는데.

난 빠른속도로 매를 향해 움직였다. 매는 내가 날라오는 모습을 봤는지 갑자기 급상승을 하기 시작했다. 저녀석, 곱게 가만히 있었으면 깃털 하나만 뽑고 풀어줬을 텐데, 귀찮게 왜 상승을 하는거야. 갑자기 그 매가 공격을 하려는 듯, 자신의 발톱을 세운체 내가 날고 있는 쪽으로 돌진을 해오기 시작했다. 녀석 죽음을 자초하는군, 정말 이 곳이 황궁 위만 아니었어도 단칼에 베어버리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슬로우!"

날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던 매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는 것이 보였다. 난 잽싸게 매쪽으로 날라가 매의 등을 잡았다. 이놈의 매가 속도가 느려졌음에도 힘은 괭장했다. 손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꿈틀하는데, 하마터면 중심을 잃어 내가 뒤집힐 번 했으니까..난 녀석에게서 깃털을 한줌 쥐어 뜯어 내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하고 풀어주었다. 녀석은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슬로우 마법이 풀리자 마자 뒤도 안돌아 보고 날아가 버렸다. 그러게 뭐 때문에 황성 위에서 맴돌아가지고 서로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만들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매에게서 깃털을 뽑고 나서 옆을 돌아보니 엄청나게 높은 탑이 서있었다. 이런 높은 탑은 뭐하려고 지었는지, 보통 집들 20개 정도 쌓아 놓은 것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다. 뭐 밝은 색 때문에 이야기에 나오는 탑처럼 음침한 분귀기가 나지는 않았지만 난 호기심에 이미 엄청나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탑의 꼭대기 근처로 올라갔다. 뭐, 어차피 플라이 마법을 쓰게 된 것, 오랫만에 하늘을 날아다녀 봐야지하는 생각도 들었고 해서.

그런데 탑 근처의 창으로 추정되는 통로에 도달하는 순간 갑자기 상당히 큰 물체가 그 창으로 부터 튀어 나왔다. 뭐야 이건!

난 거의 무의식 적으로 그 물건이 더 떨어져 속도가 빨라지기 전에 잡았다. 그런데 그 물체는 방금 전에 내게 망토를 주고 사라졌던 공주였다. 이 공주가 갑자기 왜 이 높은 탑까지 올라와서 창밖으로 뛰어내린 거야? 설마 자살하려고 한건? 아니겠지. 그런데 내 한몸 지탱하기도 힘든데, 플라이 마법을 쓴체 한사람 몸이 더 얹혀 졌으니.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로 버티기가 부담스러웠다. 난 갑자기 엄청난 체력 소모 때문에 갑자기 플라이 마법이 풀리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집중을 해서,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주는 기절해버렸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발 내려가기 전에 깨지만 말아라.

설마, 어제 그 일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으려고 했던 것일까? 난 힘 없이 축 늘어진 공주를 어깨에 매달고 내려왔다.  팔로 들으면 중심이 도저히 안 잡히니까, 밑을 보니 클라리가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클라리가 뭐라 하면 어떻게 하지? 설마 사람 목숨을 구해줬는데.뭐라 하겠냐마는.

"끼~!"

순간적으로 들리는 비명 소리, 난 그 순간 놀란 내 마음을 급히 진정시키고 공주로부터 더 이상 소리가 나오기 전에 잽싸게 싸일런트 마법을 걸어서 조용히 시켰다. 황궁사람 다 불러낼 일이 있나? 솔직히 그랬다가는 내가 오해 받기 쉽기 때문에, 뭐 공주를 납치하려고 했다는둥, 그런 뻔한 트집같은것에 아무튼 공주가 움찔하는 바람에 중심을 잃어 공주를 떨어트릴번 했다. 아무튼, 불길한 예감은 거의 적중을 한다니까, 정말 사랑이 뭔지.

난 공주를 땅에 내려놓으며 싸일런트 마법을 풀어 주고 정원의 푸른 풀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정말 온몸에 힘이 쑥 빠져나간 듯한 기분, 내일 시합에서 몸이 뻐근하거나 그러면 어떻게 하지?

공주는 바닥에 주저 앉아서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만 있었다. 클라리는 다행히도 나보다 공주 쪽을 향해 관심을 더 많이 가진 것 같다. 클라리는 가만히 공주에게 다가가 공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공주는 울음이 조금 잦아들자 나와 클라리를 약간 원망이 섞인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죽을걸 살려줬더니.

"...클라리...언니...미워..정말....질투가...나서....보면...볼수록.....정말....."

공주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을했다. 공주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중 하나였던 검은 머리가 흐트러져있었고, 낮에 그나마 조금 가라 앉았던 눈은 울음 때문에 다시 퉁퉁 불었다. 클라리는 공주의 소리를 듣고도 별 동요 없이 공주의 손을 잡은체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마음에서 나오는 슬픈 표정을 한체로. 정말 그 모습을 보니 내 마음까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왠지 무엇인가 공주에게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장미 공주, 전 공주님처럼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고 싶었던 적은 없어서 그 사실에 대해 뭐라 말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16년 살아오는 동안 공주님보다는 더 죽음이라는 것과 가까이 살아왔다는 것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는 모습, 거의 1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저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의 아버님이시기도한 저의 스승님께서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시는 모습도 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죽고 싶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수 있는 만큼 용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또, 죽는다고 모든게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

난 짧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했다. 왠지이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마음 깊숙한 곳 까지.

"하지만 저도 공주님같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한 목숨 바치는 것도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이 그 상대방에대한 복수라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공주님이 죽는다고 해도 상대에게 잠시 관심을 끌 뿐, 그 것이 끝입니다. 정말로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대에게 복수를 하고 싶으시다면, 그가 영원히 그 사실을 잊을 수 없도록, 그 사실로 마음 아파 하도록 만드십시오."

누워서 본 하늘에는  흰 구름 몇 조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고 한참동안이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가끔씩 부는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만 왠지 크게 들릴뿐이었다. 공주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항상 생사의 기로에 쫓기며 굶주림과 싸웠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헛 웃음 밖에 안나올, 그런 공주의 행동이 었지만 난 공주의 마음도 왠지 이해가 갔다. 몇년전의 나였다면, 과연 이 공주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못했을 것 같다. 뭐가 나란 존재를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후 공주는 옷에 묻었던 먼지를 털고는 일어섰다. 눈에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요. 크리센공.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그리고 클라리 언니, 정말, 점점 더 언니를 질투할 것 같아져. 하지만 이제, 미워하진 않아."

공주의 목소리를 들은 클라리는 부드럽게 웃어줄 뿐이었다. 클라리의 어른같은 외모와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분위기와 표정. 그런 클라리를 본 뒤, 공주는 천천히 궁쪽으로 돌아 걸어갔다. 이제는 공주가 다시 탑에서 뛰어내리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주인님아, 그런데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말 진심이야?"

공주가 궁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 클라리는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쩝, 그건 왜 물어?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럴 것 같아. 그런데 왜?"

왠지, 언젠가는 그런 상황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유도 없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주인님아."

그렇게, 결국 연습은 하나도 못한체 힘만 잔뜩 빼버리고 우린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