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역사물] 진주성 전투

푸른바람·2002. 4. 5. AM 12:16:47·조회 2221·추천 64
성벽 너머로 멀리 보이는 왜놈들의 진영, 정말 엄청난 숫자였다. 그렇게 죽이고 죽였는데도 놈들의 숫자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며칠간의 전투, 왜놈들이 흘린 피로 그 넓은 남강의 물이 붉게 물들었지만 놈들은 물러서지 않은체, 매일 공격 해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 쥐고 있던 활시위를 세삼 조이며 녀석들의 진영을 노려보았다. 거칠어진 손, 굳은살이 박히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고작 붓 밖에 쥐지 못했던 여리디 여렸던 양가집 도령의 손, 하지만 일년간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손은 굳어진 마음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잿빛 하늘,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은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비를 맞으며 왜놈들과 대치해 있었던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늘따라 마음이 편치 않은지 모르겠다. 그래, 그날도 꼭 이런 날이었다.



"왜적이다! 왜놈들이 나타났다!"

난 밖에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생전 처음들어보는 꼭 천둥 소리와 비슷한 소리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문밖으로 나왔다. 무슨일일까? 담 너머로 멀리 연기가 곳곳에서 치솟고 있었다. 왜놈? 바닷가도 아닌 마을에, 갑자기 왠 왜적들일까? 혹시 왜적의 모습을 위장한 도적들은 아닐런지...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며,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에 난 종아리를 맞을 각오를 하고 나무를 통해 지붕 위로 몰래 올라갔다.

떨어지지 않도록 지붕위에 바짝 엎드려서 멀리 마을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작은 초가집들 여러채가 불에 불타고 있었고, 논에서 일을하고 있어야할 마을 청년들이 곡괭이를 든체 모여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머슴들도 모두들 일하러 나가고 없어서, 도적단이라도 습격을 해오면 큰일인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르신! 왜놈들, 왜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어서! 어서 피하십시오."

누굴까?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소작인들 중 하나겠지. 그사람의다급한 외침을 들으셨는지, 아버님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후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내가 지붕 위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 않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김서방, 무슨일인가? 왜놈들이라니! 해적들이 이 곳까지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아버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소백산맥 아래에 있는 이곳 내륙까지 왜적들이 오기 위해선 관군들과 수없이 싸워야 할텐데. 도적질이나 하는 왜놈들이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쳐들어 올리는 없었다.

"네, 어르신, 왜놈들이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르며 노략질을 하고 있습니다. 도련님과 아가씨를 모시고 어서 이곳을 피하십시오. "

다급한 목소리의 김서방의 말이 끝이난 후에도 아버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심을 하는 아버님의 모습.

"알겠네."

하지만 아버님의 말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대문이 열리며 이상한 머리모양과 얼굴에 이상한 칠을한...아마 왜놈일 것이다... 녀석들이 이상한 쇠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이놈들! 예가 어디라고 감히!"

몰려드는 험악한 인상의 왜놈들 앞에서도 언제나 처럼 당당히 표정을 잃지 않은체 호통을 치시는 아버님. 하지만....왜놈들의 막대기에서 아까 들었던 천둥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울리며 아버님의 흰색 도포자락이 붉게 물들며 쓰러지셨다. 아버님...! 아버님이 돌아가신 건가?난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멍하니 지켜만 볼 뿐이었다.

왜놈들 앞을 막아서던 김서방을 향해 막대기에서 소리가 한번 더 울리며 그 역시 쓰러졌다. 눈에서 따뜻한 것이 흘러 내렸다. 곧은 성격때문에 표시를 잘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특히 나와 누이를 향해 신경을 써주시던...아버님. 평소에는 그렇게 엄하셨어도 항상 밤마다 자고 있는 내 이불을 덮어주시던 그 모습을 잠결에 어렴풋이 본 기억이...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그 엄한, 하지만 정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됬다.

왜놈들은 우리집,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 명이 누나, 누나는 어떻게 됬지? 하지만 내 걱정도 소용없이 명이누나는 집을 뒤지던 왜놈들에게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비겁한 녀석이라고 그렇게 말해도 할말이 없다. 그리고 마당으로 끌려온 누이는 결국...

그렇게 왜놈들이 마을에서 사라질 이틀동안 난 지붕위에서 엎드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두려움에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아무 행동도 할수 없었던, 내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논어,맹자를 읽던 대신에 무술을 익혔더라면, 저 원수같은 왜놈들 중 한명은 죽일 수 있지 않았을까? 효...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에서 항상 강조하던 것이지만 난 지킬수가 없었다.난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입고 있던 옷을 축축히 적시며 얼굴에는 빗물이 흐르는 것인지...아니면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흘러 내렸다.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 뒤에서 쉬는 것이 어떤가?"

난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곳곳에 상처가난 갑옷, 그리고 한쪽 허리에는 장검을 찬체 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있는 당당한 모습의 김천일 장군님의 목소리였다. 김시민 목사가 왜놈들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후, 새로 부임한 목사는 왜놈들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도망쳐버리고, 결국 김천일 장군과 같은 의병장들이 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난 활을 내려놓고 급하게 장군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괜찮습니다. 장군님."

장군은 말을 하지는 않아도 많은 것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날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장군님. 장군의 모습을 보니, 돌아가신 김성일 장군님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장군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왜놈들에게 귀를 베여진 시체들 중 하나가 되었겠지.

김성일장군, 아버님의 오랜 막역지우였다. 어릴 때, 집에 가끔씩 찾아오시면 하루종일 아버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다. 아버님께서 항상 나에게 말씀하시길 조선에서 몇손가락안에 드는, 퇴계 선생께 가르침을 받은 위대한 선비중에 한분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왜국에 통신사를 다녀온 후,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조정에서 주장하였던 까닭에 책임을 지고,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경상도 지역의 초유사를 맡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때 왜적이 쳐들어 온다는 것을 알았던들 과연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건 백년간 전쟁으로 단련된 왜병들에게 평화에 익숙한 조선병사들이 질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장군님을 향해 원망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장군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전 조선이 왜적들에게 짓밟혔을 것이라고, 중구난방으로 일어난 의병들을 총체적으로 지휘하여 왜적들의 후방을 교란한 것도 모두 장군님의 공이었다. 하지만 후세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아, 살아있었구나."

산속에서 숨어 다닌 것이 몇 개월이었을까? 왜적들을 피해서 산길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지쳐 몸도 마음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며 정신을 잃었었는데.

난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점점 선명해 지는 시야, 천막안, 입구 쪽에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날 지켜보고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장군으로 보이는 분,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희 집이 불탄 것은 보았다. 혹시나 했었는데, 다행이구나. 현이, 너라도 목숨을 건지다니."

장군은 씁쓸함이 느껴지는 어투로 나에게 말을 했다. 아, 이제 기억이 난다.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분, 김성일 부제학이셨다. 지금도 계속 부제학을 맡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내 질긴 명줄이 끊어질 시점은 아니었나보다.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니, 난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음을 느끼며 가만히 부제학 어른을 쳐다볼 뿐이었다.

"현아, 너도 나와 보통인연은 아닌 것 같구나. 마침 내가 쓰러진 현이 너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에서 왠지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감사합니다."

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서 부제학 어른을 향해 말을 했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며, 그동안 다 말라버렸을 줄 알았던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부제학 어른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래, 현아. 갈 곳도 없을테니, 이 곳역시 위험하지만 한동안 나와 같이 있도록 하자."



"목숨을 중히 여기게."

다시 잠깐 상념에 빠졌던 난 장군님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며 다시한번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중히 여겨라...장군이 일반 사병에게 할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김성일 장군이 돌아가시며 날 부탁한다고, 장군께 당부를 하셨지. 그후로 어떻게 보면 무시해도 좋을 나였음에도 장군님은 꼭 자신의 아드님처럼 날 대해주셨다.

이제 내 화살통에 남은 화살도 몇발 되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 역시 마찮가지인 상황, 하지만 난 도망칠 수 없었다. 죽더라도 왜놈들...저 원수를 단 한명이라도 더 죽인 뒤에 죽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목숨을 중히여기라는 장군의 말이 귀에 맴도는 것일까? 모르겠다.

폭풍전의 고요, 조용한 전쟁터에는 시체들을 찾아온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헐빈한 내 옆, 어제까지 바로 옆의 첩에서 활을 쏘던, 병사의 모습을 오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역시 어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장병들 중 하나, 나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날이 오늘일지도...

왜놈들의 진영에서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로서 결판이 날 것이다. 이 성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왜놈들이 물러가거나. 개미 때같은 왜놈 녀석들은 성을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왜놈들이 이끄는 엄청난 크기의 공성병기들이 여느 때 처럼 앞장서서 성을 향해 돌진하였다. 난 왜놈들 쪽을 향해 활시위를 천천히 겨누었다.



"현아, 전시라도 공부를 계속해야 되지 않겠느냐."

기운을 차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지 며칠 후, 날 찾아오신 장군이 하신 말씀이었다. 공부...네살 무렵부터, 십년이란 시간을 쏟아 부었던 일이지만, 그날 이후 난 그 공부란 것의 부질 없음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다. 논어, 맹자...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은 숲에서 도망칠 때도, 왜놈들이 가족들을 능욕하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 잠시 생각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은 이들의 글보다는 활쓰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장군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님, 그리고 장군과같은 유학자가 되기를 포기한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지고 싶지 않다. 모두들 죽어가는 상황에서 예의법절과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공부라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현이 너도 느꼈겠구나. 하지만,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많은 의병들이 의병장들의 지휘 하에 왜적들과 싸우고 있지. 조정에서 지시한 것도, 그렇다고 상을 주거나 지원한 것도 아닌데, 그들이 스스로 일어선 이유가 무엇인줄 아느냐? 바로 네가 말한 죽은이들이 주장하던 충과 효의 실천을 위해서니라. 하지만 정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내가 보냈던 수많은 시간이 헛되게 느껴지는 것은 현이 너와 마찮가지이니..."

장군은 별어조의 변화없이 차분하게 나를 보며 말을 하셨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평생 기대어왔던 것의 부질없음을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그 심정을,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죄책감과 같은...



놈들이 쏘아대는 총탄을 피하며 왜놈들을 향해 활을 쏘아보냈다. 하지만 전과같이 별 생각없이 활을 쏠 수는 없었다. 되도록 화살을 아껴야 한다. 화살이 떨어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일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무기라고는 다를 줄 아는 것은 오로지 활 뿐이었다. 일년 중 활시위를 제대로 당기기 위해서만 수개월을 소비했다. 근력이 약한 나로써는 끝없는 연습만 있었을 뿐, 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다. 백발중에 절반만 적중하는 내 실력으로서는 화살만 소비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으로 달려오던 왜놈하나가 내가 쏘아 보낸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이 내 눈안에 들어왔다. 저들도 생명이 있는 것은 마찮가지 일텐데, 그리고 저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해줄 존재가 있겠지. 하지만 난 활시위를 당길 수 밖에 없다.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또 우리 가족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될테니, 그리고 마음한 곳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분노. 이 감정만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은체, 나를 어딘가로 내몰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왜적이다!"

왜놈들의 공격, 경상 우도쪽 진주방향을 향해 진군을 하던 우리 군대는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왜적들의 수송부대와 마주쳤다. 난 조금 흥분된 마음으로 활을 쥐었다. 내가 참여하는 첫 전투, 아버지와 누이의 모습이 머리속을 감돌았다.

쌀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가득 담긴, 수레를 끌고 있는 사람은 조선사람이었다. 저들도 포로로잡힌 사람들일 것이다.  왜놈들은 수레 주위에서 경계를 서다 우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는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인원수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읽었떤 병법책에 따르면 적이 저런 상황일 경우 승리를 얻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일 것이다.  

"궁수 부대! 발(發)!"

난 명령을 듣는 즉시 연습했던데로 활시위를 매겼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곳의 왜놈의 모습, 그 왜놈을 향해 활을 쏘았다. 난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적중! 내가 쏜 화살은 왜놈의 목을 꽤뚫었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왜놈. 드디어 해낸 것이다! 복수를!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한 것인지. 왠지 모르게 몰려오는 두려움에 난 아무 생각없이 활을 쏘았다. 그렇게 끈임없이....

전투는 곧 끝이나고 왜놈들은 도망치거나 아니면 쓰러진 시체로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별 피해가 없었고, 적들의 식량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승리한 것이다. 내가 참가했던 첫 전투가. 하지만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 걸까? 기뻐해야 하는데. 난 울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른 병사들의 승리의 환호성 사이를 뚫고 나와 구석진 곳에 주저 앉아 버렸다. 오늘 몇명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모를 내 활을 쥔체 난 눈물을 흘렸다.

혼자 울고 있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누굴까? 난 고개를 들어 그사람을 쳐다보았다. 갑옷차림의 위엄있는 모습, 김성일 장군님이였다. 난 눈물을 닦고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현아, 슬퍼하지 말거라. 네가 활을 쏘지 않았다면 그 왜적들은 또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농부들의 눈물이 담긴 곡식을 약탈했을 것이다. 충이란 이름아래 나라를 위해서 임금님을 위해서 활을 들어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런 존재는 나같은 선비들만으로도 충분하니."

장군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의 말이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현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활을 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 것만은 기억해 두거라. 오늘 네가 쏘았던 화살은 사람을 죽이는 화살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화살이었음을..."



왜놈들은 어느세 성벽까지 다가와 개미 때처럼 벽에 따닥따닥 달라붙어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세 바닥이 보이는 화살통, 내 화살통에는 단 세발의 화살만 남아 있었다. 어디서 날라올지 모를 총탄을 조심하며, 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모아뒀던 돌과 기왓조각들을 들어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놈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돌을 맞고 밑으로 떨어지는 왜놈들, 성벽중 한 곳이라도 뚫리면 안된다. 인원수가 부족한 우리로써는 오로지 성벽을 경계로 버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제법 굵은 빗줄기 였지만 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정도의 빗방울이면 왜놈들도 조총을 쓸 수 없을테니까. 이 빗방울이 불행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체...

성안의 주민들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옆에는 수많은 아낙네들이 큰 가마에 물을 끓여 성벽을 오르는 왜적들에게 붙고 있었다. 전란, 오로지 농사를 짓는 것 밖에 모르던 수많은 농민들과 아녀자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아무런 죄도 없던 그들, 있다면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 받고 살았다는 것밖에 없었던 그들을, 그런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왜놈들 뿐만이 아니었다. 기근과 전염병...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전쟁을 일으킨 저들 때문이리라.



"현아, 이 곳에 있으면 안된다. 병이 옮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장군은 병색이 완연해서 침대에 누워 계셨다. 경상도를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전염병, 그나마 왜적들로부터 목숨을 간신히 유지하던 몇안되는 백성들의 목숨까지 싸그리 앗아갔다. 배고픔과 피로가 누적된 가난한 백성들은 전염병을 더 이상 벼텨낼 수 없었다. 그 전염병이 이 곳 임시 경상감영 안에도 돌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병사들이 한 둘 쓰러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장군님에게까지 병이 옮아갔다. 너무 무리를 하셔서 건강을 해치셨기 때문일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군님의 모습을 본 나는 왠지모를 안타까움에 어찌할바를 몰랐다.

"장군님,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

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장군님께 말을 했다. 가족들이 모두 죽은 나를 자식처럼 신경을 써주신분. 난 장군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현아, 넌 꼭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그리고 이 전란이 끝이나거든 다시 공부를 시작하거라. 죽은 이들의 글을 따라 읽는 것이 아닌,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그런 공부를...알겠느냐. 그리고 전쟁 속에 죽어간 이들의 의지를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난 장군님의 말에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려버렸다. 열 다섯살 생일을 홀로 보내며 절대로 울지 않을 것이라 다짐을 했지만, 그 다짐을 지키기는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공격을 해오던 왜병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성벽을 오르는 것을 멈추고 진영을 물리더니 갑자기 한 곳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이 후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왜병들의 피해도 적었고...

"성벽이 무너졌다! 남쪽의 성벽이 무너졌다!"

어디선가 들리는 다급한 외침, 성벽이 무너졌다고? 난 그 소리에 절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왜놈들이 몰려간 까닭이 그 때문이었나? 이놈의 비, 그래 이놈의 비가 문제였다. 전에도 이러한 일이 몇번 있었다고 들었다.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고 성이 점령당했다는...

난 몇발 남지않은 화살통을 등에 매고 활을 든체 남쪽을 향해 뛰어 갔다. 성안쪽에서 들리는 혼란스러운 비명소리, 난 내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느꼈다. 왜적들이 성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성안의 건물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날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강과 성벽이 접하는 그 곳, 그 곳 성벽에 이르렀을 때 성벽 위에 서 있는 두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아까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신 김천일 장군과 그의 아드님.

"장군님!"

나의 부름에 장군님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군님에게서 느껴지는 비장한 눈빛, 난 장군님의 결심을 알았다. 그래서 난 급히 장군님을 말리기 위해 장군님 계신 곳을 향해 뛰어갔다. 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의병의 기치를 들고 왜적들과 수없는 전투를 벌여왔던 창의사 김천일 장군, 그리고 그의 아드님, 두사람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볼 순 없었다.

"자네는 꼭 살아남아야 하네. 알겠는가."

달려오는 나를 향해 그 말을 하는 것을 끝으로 남강의 핏빛가득한 깊은 물을 향해 성벽 위에서 장군님은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장군님의 아드님, 난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왜 모두들, 나보고만 살아남아라고 하는 걸까? 모르겠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일일텐데. 난 어느세 성벽위로 올라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왜병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한발, 두발, 세발....그리고 난 성벽을 뛰어 넘었다. 바위 위에 떨어지며 충격에 다리가 삐끗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다리를 쩔뚝 거리며 왜놈들이 쏘아대는 화살을 피해 핏빛 가득한 남강쪽을 향해 내려갔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나를 향해 죽지말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넘겨준 삶의 무게...그 때문이라도 죽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난 남강의 깊은 물에 몸을 뛰운체 팔을 휘저었다. 나만, 나혼자서만 도망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헛된 상념....하지만 점점 흐려지는 의식에 고민을 할 여력도 남지 않았다.



뽀얀 얼굴과 짙은 붉은 색의 입술, 한낮 관기에 불과 했지만, 왠지 다른 관기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어떤 고귀함같은 느낌이 느겨졌다. 관기에게서 고귀함이라...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역시 머릿속 깊이 뿌리내린 계급의식 때문일까? 내일 전투에 쓸 돌들을 구하기 위해 마을쪽으로 내려 오는 길에 그녀가 있는 곳에 들려 그녀를 보았다. 오늘 따라 왠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난 처음 진주에 왔을 때, 누이와 너무나도 비슷한 그녀를 보며 난 누이가 살아서 돌아온 줄알고 울며 달려가 매달렸었다. 지금은 내가 그녀보다 더 커져버렸지만 몇개월 전만해도 아직 작았던 나, 그런 나를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고 안아주었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따스함, 김성일 장군이 내게 주던 그런 따스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전쟁터에서 누가 목숨을 보장할 수 있겠소."

신분차이, 이 쓸데없는 것 제약 때문에 난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누이같은 그녀에게 편히 말을 할 수 없었다. 안타까움, 누이에게처럼 어리광도 피워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따라 무슨일일까?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난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오늘이 지나면 말씀드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그 말을 마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꿈이었나? 난 기침을 몇번하며 입에 고인 물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풀숲...성 건너편의 풀숲이었다. 난 숨을 곳을 찾아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끌다 싶이 해서 한 곳으로 움직였다. 건너편에 보이는 진주성, 이미 곳곳에는 왜놈들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결국 점령을 당한 건가. 과연 나혼자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남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는 내 눈으로 멀리 보이는 남강가의 한 낭떠러지 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멀리 아주 작게 보였지만 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 바로 그녀였다. 다행히, 살아있었구나.  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최소한 그녀라면 왜놈들도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런 그녀를 쳐다보기만 하던 왜놈들 중, 갑옷을 입은 장수 한명이 그녀가 있는 바위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그 왜장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는데...난 왜놈들에게 능욕당하던 누이의 모습이 떠올라 그 모습을 지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결국, 왜장은 그녀가 있는 바위 위로 올라섰다. 난 그리고 그녀를 잡는 왜장의 손, 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다시한번 치를 떨었다.  그 순간 그녀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으며 몸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왜장과 함께 물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 아니 꼭 그랬던 것 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외로움...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 때처럼...하지만 난...어떻게 보면 변명일지는 몰라도 나에게 살아남아라고 말을하던 사람들의 말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전해준 살아남은 자의 무거운 짐을 뼈저리게 느끼며 왜놈들을 피해 달려갔다.

전란에서 사라져간 그들의, 그들의 의지를 전해야 한다.



그렇게 6년이 흐르고 전쟁은 끝이나고 난 살아남았다.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고 잊혀졌다.

하지만 그들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그들의 숭고함을 그들의 희생을.

설혹 패배했더라도, 승리자만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는 쥐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에게 넘겨준, 아니 남겨준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기 위해.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