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7장 리투니아(4) 반복(수정)

푸른바람 BlueWind·2002. 5. 25. AM 12:04:19·조회 2283·추천 40
에피소드(45) 반복


주위를 감싸는 적막, 드물게 불어오는 바람은 저녁의 석양에 붉게 물든 풀들을 조금씩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한 엘프, 핀누나와 닮은 그 엘프의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이 인상적이었다. 한참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그냥 들판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엘프는 누구길레 내게 이런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리안,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내 앞에 서 있는 엘프가 슬픈 목소리로 말을 했다. 리안? 나를 부르는 것인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

디에 이렇게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쩔 수 없소. 애나. 내 생명 보다도 그 일이 더 내게는 중요하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저절로 그 여자에게 이야기를 했다. 평소의 내 말투와는 너무나도 느낌이 다른 말투. 애나라 불렸던 그 여자를 보면 볼 수록 점점 더 마음이 아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엘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역시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나 역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이 아프다는 것도.

"리안, 그럼 저 보다도 그 일이, 그 일이 더 소중한가요?"

여자의 물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도 참으며 하려 했던, 그 일이.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시 계속 되는 침묵, 난 꼭 생명이 없는 석상같이 가만히 굳은체 서있을 뿐이었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 여자의 백금발 머리가 찰랑거렸다. 아름다운, 하지만 너무나도 슬픈 모습. 여자는 자신의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다시 침묵을 깨고 말을 했다.

"기다릴께요. 리안, 당신이 내게 돌아올 때까지. 그 것이 운명이라해도, 운명을 넘어서 영원히."



"주인님아~!"

"애나...."

"주인님아, 애나가 누구야? 응? 말해봐!"

난 갑작스러운 클라리의 흔들기 공격에 잠을 억지로 깨고 몸을 일으켰다. 왠지 멍한 느낌, 무엇인가 가슴아픈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끝없이 몰려오는 그리움,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클라리, 지금 몇시지?"

난 정신을 추스리며 클라리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그런데 클라리가 왜 저렇게 불퉁한 표정으로 있는거지? 왠지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비어있는 것 같은 허전함.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일까?

"저녁 먹으러 가자고 깨웠으니까 24시정도 됬지. 그런데 말돌리지 마! 주인님. 애나가 도대체 누구야?"

애나, 누구였을까? 그 이름에서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졌지만, 내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애나...

"잘 모르겠는데, 애나가 누구지?"

내말에 클라리는 못믿겠다는 듯 눈을 더욱더 크게 뜨며 날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 이름은 어디서 알아와서는. 난 정신을 추스리며 '애나'란 이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주인님이 계속 자면서 '애나'란 이름을 말했었잖아."

자면서....? 훔, 희미하게 여자가 나오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 날듯하면서도 뭔가 잡히지 않는 느낌. 하지만 다른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애나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아는 여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작으니, 솔직히 아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그 '애나'란 이름에선 생소함과 더불어, 또다른 한 곳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알던 여자의 이름인가?

"모르겠어. 꿈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보고 어떻게 해란 말이야. 나 역시 답답한 것은 마찮가지니까. 무엇인가 중요한 꿈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

무엇인가 아주 소중한 어떤 것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그리고 무엇인가 생각이 날 듯하면서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는, 왠지 머리를 쑤시는 듯한 통증에 머리에 손을 짚었다.

"아, 알겠어. 주인님아. 그렇게 힘든 표정을 하지마. 그럼 내가 미안해지잖아."

날 보고 뭔가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클라리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런데 내가 여자 이름을 꿈에서 부른다고 클라리가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훔. 설마 사랑, 역시 그것일까? 책에서 읽어 본 것에 따르면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그 존재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진다고 했었는데. 나역시 클라리에게 그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내가 클라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정말 사랑이 맞다면, 하지만 모르겠다. 지금까지 한번도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흠, 설마 그럴리가 없겠지.

"주인님아 빨리 몸단장 해, 밥먹으러 가야지. 아렐리아가 다른 손님들도 많이 온다고 조금 신경써줬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클라리는 말을 하며 침대 위에 여전히 이 것 저것 생각을 하느라 멍하게 앉아 있는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나저나 신경을 써달라고? 흠흠. 그렇다면 또 백합의 기사 복장으로 한번 나가 볼까? 여행복 차림으로 나가는 것 보다는 그게 더 괜찮을 것 같다. 낮에 아렐리아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누더기 차림으로 가고 싶지만 리아인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곱게 차려서 나가야지.

일어서서 보니, 소피와 티티도 연회용 드레스로 갈아 입고 있었다. 헛, 소피와 티티가 저런 옷차림을 한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인데. 소피는 연녹색 계열에 깔끔하다는 느낌이 드는 드레스, 티티는 청은발과 잘 어울리는 흠, 클라리의 눈색깔과 비슷한 바닷색의 시원한 느낌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둘 다 엘프인 까닭에 기본적인 외모가 받쳐주는 까닭인지 옷이 상당히 잘 어울렸다.

"소피, 드레스 입었네?"

날 쳐다보고 있던 소피는 내 말에 다시 얼굴이 빨갛게 된체 고개를 숙였다. 훔훔, 가끔씩 돌출적인 행동을 하지만 않으면 소피는 엘프답지 않게 귀여운 느낌을 많이 주었다. 엘프 나이 육십몇이면 인간으로치면 열대여섯살 정도의 나이 밖에 되지 않으니. 귀엽게 보이는게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저, 이 옷차림이 이상하나요? 란트?"

소피는 거의 들릴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훔, 드레스는 생전 처음 입어보는 것인가? 소피에게서 왠지 조금 어색해 하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아니,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더 예뻐 보이는 것 같아."

헛, 이런 닭살 대사를 내가 하다니. 흠, 무의식적으로 말을 해 놓고도 한참동안이나 나란 존재의 변화에 대해 다시 한번 놀랬다. 이런 저런 이유로 생긴 왠지모를 어색함에 난 말을 해 놓고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같이 다니는 존재들에게 나 역시 영향을 받는 것일까? 클라리나 황제나, 평소에는 무척 밝은 느낌을 주는 존재들이니까. 나 역시 조금씩 어두웠던 성격이 밝아 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내 대답을 들은 소피의 흰얼굴이 더욱더 빨갛게 변해 버렸다. 쩝, 난 그런 소피를 노려보고 있는 클라리를 뒤에 둔체 옷이 들어있는 배낭을 들고, 우리가 머무는 방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난 여행복을 벗어서 대충 배낭에 넣고, 배낭에서 옷을 꺼냈다. 마법 기구도 만든 사람의 성격의 영향을 받는 까닭인지 이 배낭엔 물건을 대충 쑤셔 넣어도 나올 때는 깨끗이 정돈 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뭐, 그다지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이 기능에 알게 모르게 상당히 도움을 받고 있었다.

흰색의 옷, 어두운 내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흰색이었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흰색, 하지만 핏빛이 약간 섞인 흰색은 또한 내가 가장 싫어 하는 색이다. 요즘에는 거의 꾸지 않지만, 그 어릴 때, 악몽. 그 꿈에 보이는 그 색이기 때문에. 난 한숨을 내 쉰 뒤,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몇 번 입어 봤다고, 이제는 혼자 옷을 입어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보통 예복 같은 것을 입을 때는 클라리가 도와주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따라올 줄 알았던 클라리는 소피를 노려보느라 바빠서 따라오지 않았다. 난 마지막으로 흰색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자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뒤 머리끈으로 묶고 나서 원래 있던 방으로 걸어나왔다.

"확실히 주인님은 입는 옷에 따라서 분위가 확실히 다르다니까. 이 옷차림일 때는 정말 왕자님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클라리 역시 내가 작은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어느 순간엔가 옷을 갈아입었다. 흰색의 드레스, 전에 연회에 참가했을 때, 그 옷차림이었다. 헛, 저 옷도 배낭에 넣어뒀었나? 아니면 마법으로? 클라리 역시 정신체니까 그럴수도 있다고 이해를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왕자님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왕족 출신이었지? 엄마가 공주였다니까. 쩝,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피투안국 왕실과 연관이 되있었다니, 솔직히 엄마가 왕위를 포기했던 것 역시 이해가 갔다.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말, 더 없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주인님이 여자 옷을 입으면 세상에서 제일 청순한 외모를 가졌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쁜 공주님 한명이 만들어지고."

"뭐...?! 클라리!"

저놈의 클라리가, 누구 때문에 그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됬는데. 정말 가끔씩 저럴 때마다 클라리를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아까 사랑 어쩌니 했던 것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클라리는 얼굴에 그 사악한 미소를 띄운체 그 치렁치렁한 옷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째빠르게 내 손길을 피해 방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아, 정말, 이 상황에서 난 또다시 한숨을 내 쉴 수 밖에 없었다.

"아미, 그런데 넌 안갈꺼니?"

꼭 없는 석상처럼 구석에 가만히 서있던 아미는 날 쳐다보더니, 평소의 그 무뚝뚝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정말 내 주위에는 외모하고 말투가 연결이 잘 안되는 존재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미 역시.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그 외모로 그런 어떻게 보면 살벌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주인. 오늘은 그다지 식욕이 없다. 그 때, 와이번들로 충분히 배를 채웠으니 앞으로 한달정도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

하하. 아무리 등에 투핸드를 매고 있다지만 확실히 외모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말의 내용. 와이번으로 배를 체워서 식욕이 없다라? 절대 생명체 드래곤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할 수 있을까.

"휴...소피, 티티 식당에 가자."

난 뒤에 소피와 티티를 데리고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문 밖으로 나오니 하녀로 추정되는 메이브 복을 입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리는 날 피해서 먼저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방에 돌아와서 두고보자. 그러고 보니, 우리 중 아무도 식당으로 가는 길을 모르지?

"이쪽으로."

그 방앞에 서있던 하녀가 우리를 향해 말을 했다. 아무래도 아렐리아가 내가 길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고맙군. 그런데 식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내 양 옆에 뒤에 있던 소피와 티티가 오더니 양쪽에서 내 손을 잡았다. 난 황당함에 멀둥멀둥 둘을 쳐다보았다. 소피는 역시 얼굴이 빨갛게 된체있었고, 티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띄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이 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티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쌍둥이 임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저렇게 다를까? 아니, 소피도 보기보다는 좀 성격이 그런 것 같다.

휴, 난 손을 놓아버리기도 그렇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두 엘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잡종이라고 해도 티티 역시 전직 다크 엘프가 맞는지 정말 의심스러웠다. 다크 엘프들은 무척이나 차갑고, 또 냉정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티티 역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뭐니까. 그 것이 아니라면 인간들이 다크엘프란 존재에 대해 잘못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 시청의 구조는 황궁에 비해 조금 복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든 사람의 성향의 차이일까? 큰 규모였지만 비밀 통로를 제외하고는 한두번 다니다보면 그런데로 쉽게 길을 파악할 수 있는 황궁에 비해 이 시청은 왠만큼 익숙해지지 않고는 길을 찾기가 힘들 것 같았다. 물론 밑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출구는 나오니까 갇힌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었다. 쩝, 왠지 식당이라 표현하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식당 외에는 적당한 호칭이 생각이 나지 않았기에 그냥 식당이라 부르기로 했다. 복도 끝에 보이는 큰 문이 그 방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문하나도 단조롭지 않고 신경을 많이 쓴듯한 모습, 내가 알고 있는 역사에 따르면 단 한번도 점령당한 적이 없는 도시였다. 그런 까닭인지, 전체적으로 건물 뿐만아니라 작은 장식품 하나하나에서 연륜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란트, 죄송해요. 곤란하게 만들어서."

소피는 이번에도 신경써서 듣지 않았으면, 놓칠뻔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곤란하게라? 클라리와 비교에서 소피는 모든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다. 아무래도 노예로 지내던 때의 영향이리라. 이 자매도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한명은 인간들의 노예로 나머지 한명은 그 절망 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오랜시간을 보냈으니까.

"곤란할게 뭐가 있어. 이 정도 일에."

난 짧게 소피에게 말을 했다. 인간들 틈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까닭인지 인간들이 가질만한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이는 소피< 내 대답에 소피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서 날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란트?"

난 소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그제서야 조금 기운을 차린 듯 보이는 소피, 이럴 거면 티티의 꼬임에 넘어간 무모한 공격따위는 하지 않는게 나았을텐데 왠지 티티에게 놀아나는 소피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란트, 소피하고만 이야기 하지 말고 나하고도 이야기해줘요."

옆에서 들리는 소피와 비슷한, 하지만 조금 장난기가 섞인듯 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차갑기도 한 티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대쪽 팔을 조금씩 끌어당기는 느낌과 함께, 확실히 소피보다는 활발한 듯한 티티, 하지만 다크엘프들 틈에서 오랫동안 지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피못지않게 티티는 인간들과 비슷했다. 내가 소피에게서 고개를 돌려 티티를 쳐다보자 티티는 피식 웃더니 갑자기 내 볼에 키스를 했다. 허거...?

"티티! sjrk rmfjf tnrk dlT sl!"

그 모습을 보던 소피의 얼굴이 조금 붉게, 하지만 보통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붉은 색으로 변하며 빠르게 엘프어로 티티에게 말을 했다. 훔, 해석하면 '너가........있어?' 가운데의 말은 너무 빨리 말해서 못알아들었다. 그런데 소피의 말을 들은 티티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띄운체 내 옆에 찰싹 붙어버렸다. 거참, 내가 장난감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티티 이 사악한 다크 엘프는 나를 이용해서 소피를 놀리려는 듯하는 의도인 것 같은데. 헛, 날 놀잇감으로 삼는 건 클라리하고 황제만 해도 충분하다고.

"일렉트로닉 쇼크."

가장 기초적인 전격마법, 파워를 최대한 약하게 해서 내 옆에 붙어있는 티티를 향해 흘려보냈다. 그 충격에 티티는 깜짝 놀란듯 그 자리에서 폴짝 뛰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고 있는 티티의 눈에 눈물이 글썽하는 것이. 쩝, 왠지 미안했다. 확실히 여자한테는 왠지 마음이 모질게 먹어지지 않았다.

티티를 보고 있던 소피는 갑작스러운 일에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티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난 헛기침을 몇번한 다음에 사태도 무마할겸, 벌써 앞에 걸어 가버린 하녀의 뒤를 따라 빠르게 식당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티티는 여전히 아픈듯 인상을 찌푸린체 풀죽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날 따라 왔다.

식당 문을 열자, 넓은 식당안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젊은 사람들, 남자, 여자 성별 관계없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제국의 정책이 원래 그러니까. 그리고 30년전의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니 개방적으로 인재를 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급이나 성별 따위를 따진다면 정말 나라를 운영할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식당안으로 들어서자 일순, 식당안의 시선이 모두 우리쪽을 향했다. 그리고 약간의 수근 거림이 일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클라리는 내가 소피와 티티를 양쪽에 잡고 오는 것을 보자 표정이 변하더니, 또다시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왔던 하녀는 날보더니 테이블의 한쪽을 향해 대려갔다. 아렐리아와 마주보는 곳에 위치한 자리, 그래도 제국 서열 5위의 고위 관료란 대접은 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다행히도 내 옆에 클라리의 자리가 있지는 않았다. 옆에 있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내자리에서 한칸 건너에 클라리, 그리고 그 옆에 소피와 티티의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소피와 클라리가 서로 노려보는 것이, 도데체 무슨? 그런데 내 옆에는 누구 자리길레 비어있을까?

맞은 편을 보니, 아렐리아, 그리고 그 옆에 루이안 부시장 꼬마가 앉아 있었다. 그 밖에는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 하지만 대체적으로 관료들이나 학자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무장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이 상황에서 전쟁을 과연 무사히 해 낼 수 있을까? 전에 보니, 지탄그 장군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또 다시 누군가가 들어왔다. 연분홍빛 계열의 드레스, 그리고 단정하게 올린 검은빛 머리, 그리고 무엇인가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흑진주같은 검은빛 눈, 황제였다. 컥, 저 아줌마가 얼굴도 안가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오다니, 무슨 생각이지?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황제가 들어오자. 아까 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황제쪽을 향해 쏠렸다. 나이만 아니라면 남자중 누구라도 한번쯤 결혼을 생각해볼만한 절세 외모, 황궁에서의 그 금빛 드레스나, 평상시의 평상복에서 느낄 수 없는 또다른 것을 황제에게 느낄 수 있었다. 황제를 쳐다보는 부시장 꼬마가 입을 살짝 벌린체 얼굴이 빨갛게 되서 황제에게 눈을 때지 못하고 있다면 설명이 될까?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띄운체 천천히 걸어와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컥, 내 옆에 빈 자리가 황제의 자리였나? 황제는 날 향해 살짝 윙크를 하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하, 이상황에서는 정말 할말이. 세인트나 리아인을 대려와서 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잠깐, 황제가 내 옆에 앉았다는 말은 역시 세리 슈타이튼이라는 내 부장으로 여전히 활동하겠다는 말인데, 할말이 없다. 부장으로 데리고 다니기에는 내게는 너무 과분하고 무서운 존재라고 해야 하나?

"누나! 도대체 무슨....?"

난 옆에 앉은 황제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가득 담아 이야기를 했다. 황제는 내말에 빙긋 웃더니 능청스런 목소리로 답을 했다.

"어머, 영주님, 영주님을 사모하는 영주님의 부장이 영주님 옆에 앉은게 그렇게 싫으신가요? 왜그렇게 놀래시는거에요?"

"......"

난 이번에도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내신세도 참.

대충 사람들이 다왔는지 아렐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 소개를 따로할 필요는 없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어쨌든 난 제국 서열 5위의 고위관료이니까. 아렐리아는 사람들이 있을 때의 그 시장님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크리센공, 이분은 제국 남부 상회 길드 마스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분은 제국 사략 함대 제독 드레이크 쿡 선장님 이세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열 댓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명씩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그 인물 하나하나를 정리하느라 고생을 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제대로된 음식을 먹지못해 뱃속에서 요동을 치는 것도 참으며, 그렇게 사략함대 제독 보다 학자가 더 어울릴듯하게 생긴 선장의 대한 소개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식당문이 열리며 수많은 하녀들이 음식을 들고오기 시작했다.

고급 해산물 요리들, 책에서 글자로 읽어본 기억밖에 없는 수많은 생선들을 비롯하여, 도대체 저런 생명체도 있었을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신기하게 생긴 해산물들이 접시에 담겨져 들어왔다. 음식을 보는 우리 일행의 반응도 가지가지, 별 표정의 변화없이 전형적인 공주님처럼 얌전히 앉아있는 황제, 음식들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는 클라리, 엘프답게 살았을 때의 본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요리들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소피. 하지만 자신의 언니보다는 클라리에게 더 가까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들을 쳐다보고 있는 티티, 정말 다크엘프 아니랄까봐. 쩝. 난 책에서 읽은 대로 손바닥을 딱딱 쳐서 뒤에 있던 하녀를 불렀다. 내 박수소리를 들었는지 하녀는 빠르게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엘프 레이디께서는 육류로 된 음식은 못 드시니까, 과일이나 채소로된 음식을 준비해서 드리도록."

내 말을들은 하녀는 다시 뒤쪽으로 물러서서 식당쪽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 나도, 하지만 왠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혼자 지냈을 때보다, 귀찮아졌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려를 해줄 수 있다는 것, 그 것으로 인해 누군가가 기뻐한다면...생각 외로 기분이 괜찮은 일이었다.

"우와, 영주님. 역시 백합의 기사님은 뭔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황제는 날쳐다보며 여전히 얼굴가득 전형적인 '공주미소'를 얼굴에 띄운체 말을 했다. 어이 아줌마. 제발 좀 그 말투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말투를 들을 때마다 황제가 애 셋딸린 아줌마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이 오십이면서 마법만 조금쓰면 나하고 비슷한 또래로 보이다니, 자기 딸보다도 더 어려보인다는. 왠지 신의 농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여러가지 사건으로 부터 신경을 끊고 그냥 식욕이나 해결을 하기로 마음먹은 뒤, 처음 보는 가지가지 음식들에 손을 대보았다. 맛이 이상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에는 오크고기도 먹어봤는데...오크들은 동료가 죽으면 그 시체를 나눠먹는 풍습이 있었다. 리아둠의 강요에 억지로 맛을 봤는었다. 그런데 확실히 생긴 것 처럼 돼지고기와 비슷한 맛이 났었다...어떤 음식을 못먹을까? 신기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해산물들의 맛은 생각외로 괜찮았다. 역시 비싼 고급 음식이라 다르긴 다르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중에 몇몇 음식들은 심히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해파리, 말미잘, 기타 등등.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테이블 위의 접시 비우기 작업을 한 뒤, 후식을 먹고 리투니아 특산물 시식은 끝이 났다.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 식사중에 혹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대충 식사가 끝이 나자 아렐리아가 일어서서 말을 했다. 뭐, 불만을 가질 이유가...없지. 해파리와 말미잘을 제외하고, 모두들 말이 없자 잠시 가만히 있은 후 아렐리아가 말을 했다.

"불편하신 점이 없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의논할 일이 있으니, 잠깐 휴식을 취하신 후 모두들 회의실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왠일인지 아렐리아가 자리에 앉은 뒤에도 사람들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런데 내 귀를 향해 황제가 작게 말을 했다.

"란트, 네가 먼저 일어서야지. 다른사람들도 일어설 수 있어. 어쨌든 지금은 네가 이곳에서 제일 높은 위치의 사람이니까."

하, 그러고 보니 그런 법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당시에는 생각도하지 못했으니까. 나와 내 일행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식당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일어섰다. 난 잠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 식당 밖의 테라스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회의가 또다시 시작되면 얼마만큼이나 길어질지 모르니 그냥 바람이나 좀 쐐었으면 하는 생각에.

테라스로 나오자 아직 점점 세상을 뒤덮어 가는 봄 속에서 느껴지는 겨울의 마지막 여운인듯 조금 서늘한 바닷바람이 내 볼을 스쳤다. 그리고 눈앞에 펼처지는 검은빛의 밤의 바다, 항구에 정박중인 배들 사이로 작게 불이 켜진 곳도 있었지만, 항구에서 느껴지는 낮의 그 활달함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체 멀리 보이는 항구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식당 안쪽을 슬쩍 쳐다보니, 황제를 비롯한 내 미모의 동료들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보통이상의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저런 여자들과 같이 다니는 날 더 없이 부러워하겠지만 실상을 알아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훗, 제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변태 할망구, 수다쟁이 정신체, 엘프같지 않은 두 자매 엘프. 이 곳에는 없지만 절대생명체 드래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모두 내 곁에서 떠나고 사라진다면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하는생각이 든다. 고독, 이제 다시 그 감정 속에 파 묻혀 살기에는 굳어붙었던 마음이 너무 녹아버렸다. 너무나도...이제 더이상 외로움은 느끼기 싫다. 책에 보면 이럴 때, 보통 한손엔 술잔을 들고 있곤 하던데, 술은 그다지 자신이 없다.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나 같은 놈한테도 소년이라는 순수함을 상징하는 말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갑자기 테라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나왔다. 뒤쪽을 쳐다보니, 아까 마지막에 소개를 받았던 사략함대의 제독, 아마 이름이 드레이크 쿡이라고 했었지? 그 사람이었다. 다행히 사략함대 제독이란 그 직책 때문에 한번 더 보았기 때문인지 이름을 잊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크리센공."

그 함대의 선장보다는 학자같은 느낌의 제독은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말투로 내게 말을 했다.

"물론입니다. 쿡 제독."

뭐, 한사람 더 있는다고 테라스가 무너지거나 할 것도 아니고, 난 혼자서 고독을 씹거나 하는 고상한 취미는 없으니까. 쿡 선장은 자신의 호칭을 붙여주는 내 말을 들으며 조금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을 잠시 얼굴에 띄우더니 곧 감추고, 내 옆에와서 섰다. 물론, 그의 손엔 책에서 읽었더 것 처럼 와인잔이 하나 들려져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제국 검술 대회 우승자, 고결한 백합의 기사 란트 크리센.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솔직히 조금 다르지만."

뱃사람이라. 솔직한 것일까? 훗. 뭐, 이 상황에서 실권도 없는 제국 서열 5위 따위를 내 나이의 두배 이상 될듯한 사람에게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난 그냥 웃을 뿐이었다.

"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혹, 방금 전의 제말에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어린애라고 놀리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악의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최소한 아부 따위를 하기 위해서 내게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은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당하고 있을 수 만은 없지.

"제독 역시, 함대의 선장님보다는 학자라고 하시는게 더 어울리실 듯 합니다만."

내말을 들은 선장은 처음으로 뱃사람이란 느낌이 느껴지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그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와서 입을 열었다.

"크리센공, 바다란 위대한 존재에 대해,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갑작 스러운 질문. 난 이 어둠 속에서 그에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조금 좌우로 흔들었다. 바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내게는 생소한 존재였다. 책으로 얻은 단편적인 지식 이외에는 전혀 모르는.

"바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평화의 찬가도 전쟁의 장송곡도, 바다에서는 언제나 인간세상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노래가 들려오죠. 그리고 바다는 때론 다른 모든 것을 삼켜버리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가슴 속까지 누구에게나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시간의 침묵, 제독은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처음보는 내게, 나란 존재는 다른 존재의 말을 끌어내는 힘 같은 것이 있는 것인지.

"지금의 바다에서는 무엇이 느껴집니까? 제독."

갑자기 느껴지는 의문에 무의식적으로 선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바다를 조용히 쳐다보는 쿡 선장. 그리고 잠시후 쿡선장은 입을 열었다.

"대양을 뒤엎는 네개의 태풍,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플라타니오의 랩소디."

제독의 말이 끝이 나자. 기다렸다는듯 다시 테라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테라스쪽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본 쿡 선장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잔을 마저비운체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크리센공."

쿡 선장은 뭔가 의미모를 수수깨끼 같은 말을 뒤로 한체 걸어가버렸다. 수많은 예언가들의 그 것처럼, 그리고 그가 나가게 만든존재. 클라리. 무슨 재주를 사용했는지 클라리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 틈을 벗어난 것 같았다. 클라리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방금 전까지 제독이 서있었던 내 옆의 자리에 섰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날리는 클라리의 백금발 머리결과 하늘거리는 흰빛 드레스, 조용히 바다를 쳐다보는 그 우수에 담긴듯한 바닷색 눈은 클라리에게 몸에서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흰색의 빛과 함께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었다. 정말 외모만 보면 거의 여신에 가까운 모습인데 반해 성격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아 났지.

"주인님아, 혹시 내가 방해한 것 아니야?"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클라리, 나를 놀리고 도망치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 한데. 이 상황에서 화를 내 봤자 뭘 할까? 그냥 넘어가야지.

"잘아는군. 방해도 많이 방해 했지."

난 그래도 아까 있었던 일도 있고 남아있는 약간의 불만스러운 감정에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클라리에게 이야기를 했다.  

"힝, 주인님아 너무 그러지마. 남자가 그런 일가지고 삐지면 소심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단 말이야."

정말 이게 화를 더 돋구고 있다는. 어휴, 하지만 더 이상 신경을 쓰다가는 스트레스를 받는 나만 손해일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참기로 했다. 난 한숨을 내 쉰뒤 그 냥 클라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 하지만 클라리는 추운지 몸을 조금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클라리는 정신체 주제에 추위를 많이 탔었지.

"추운데 뭐하러 나왔어. 그냥 안에 있지."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클라리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가까이 붙어서섰다. 옆에 있는 클라리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 정말 정신체라기보다는 인간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주인님아. 궁금한게 있는데, 만약 날 누군가가 데려가면, 뺏어가면 어떻게 할꺼야?"

클라리의 밝았던 표정이 조금 어두워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뺏어간다? 황태자와 클라우 녀석일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텐데 무슨일일까?

"그럼 얼씨구나 하고 당장 줘버리지. 그런데 왜? 무슨일 있어? 클라리"

장난칠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조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가 클라리를 뺏어간다면, 난 어떻게 할까? 나보다 강한 존재라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클라리를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라면, 그래도 내가 그 존재로 부터 클라리를 찾기 위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니...그냥..."

클라리는 평소와는 다른, 힘없는 목소리로 바닷쪽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여전히 불어오는 약한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클라리의 빛나는 백금발 머리. 왠지 수심에 잠긴 듯한 그 표정을 보니, 지켜주지 않고는 못버틸 것 같은 감정이 들었다.

"걱정하지마. 이제 황태자나 클라우 녀석도, 널 노리지는 못할테니까. 널 빼앗기는 일은 없을거야."

나 역시 검은빛 바다를 쳐다보며 조용히 하지만 조금 힘이 담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런 내게 들려오는 클라리의 목소리, 언젠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일까? 기억의 파편일까?

"주인님아, 있잖아. 내게 만약 주인님하고 헤어진다면, 난 기다릴 꺼야. 주인님이 돌아올 때까지. 그 것이 운명이라고 해도 운명을 넘어서 영원히."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