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9장 제 1차 이오니스 공방전-4
푸른바람 BlueWind·2002. 10. 9. PM 10:53:32·조회 2412·추천 36
에피소드 58 이오니스 공방전-4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포세트립톤의 그 시장통이었다. 그런데 왠지 내가 알고 있는 그 것과는 분위기가 무엇인가 달랐다. 옷차림이나 건물같은 것들의 모습이 무척 낯설은 듯하면서도 왠지모를 정감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왠 포세트립톤? 난 이오니스 성 앞에서 전투를 하다가 쓰러졌는데, 무슨일일까? 그래 이번에도 또, 꿈인건가?
"누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돌히 하는 거야?"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왠 누나? 하지만 이번에도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패턴을 보니 확실히 꿈이 맞는 것 같다. 컥. 그런데 내가 고개를 돌린 그 곳에 있는 녀석은 검은빛 머리의 세인트 그 녀석이었다. 그런데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세인트 보다는 조금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세인트보다 조금 더 잘생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리투안."
그런데 왠 여자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 내 시선이 조금 아랫쪽으로 향하며, 내 몸에 걸쳐있는 흰색의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겉에 표시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여성형 체형. 헛, 이제 꿈에서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게다가 이건 여장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여자가 되버렸잖아? 나도 중증이군.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분명히 여장으로 겪었던 수많은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압박에 따른 후유증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리투안이라면 제국의 국명인데 그게 이름? 잠깐, 리투안을 이름으로 사용했던 사람이면? 그런데 꼭 친구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 것 처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순간 머릿속에서 잡힐들 잡힐 듯 하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뭐였지?
"우아~! 우리 귀엽고 아름다우신 사촌 누님께서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멍하게 보고 계시면 이 동생, 가슴이 설레어 몸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답니다."
이 녀석이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세인트와 괭장히 닮은 그 리투안이란 녀석은 그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날 끌어안아 버리는 것이었다. 커억, 이 녀석 길거리에서 무슨 짓을 하는거야! 내 성격 같았으면 이 순간 한방 차버렸을텐데 내 마음데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으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생각을 하며 이 절망적인 사태에 분노하고 있는 순간, 내 의지와는 절대 상관없이 주먹이 녀석의 복부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훔, 내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꽤 마음에 드는 행동이군.
"리투안, 네가 살기를 포기한 모양이구나. 제국의 황녀의 몸에 네 마음대로 손을 대다니."
리투안은 무척이나 아픈 표정을 지은체 배를 양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흠,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그 리투안이란 녀석은 확실히 세인트 녀석과 많이 닮았지만 차이점도 조금씩 느껴졌다. 뭐, 꿈이란게 경험을 기초로 재구성되는 것이라고들하니 그런지 모르겠다. 잠깐. 그렇다는 말은 내가 여자가 되어 있는 것도 경험을 기초로? 흠흠. 그냥 아니라고 해둬야 할 것 같다.
"평소엔 황녀라고 부르기만 해도 화를 내더니, 누난 이럴 때만 황녀 핑계를 대고 그래?"
황녀? 황위 계승권이 있는 황실의 여자를 부르는 호칭인데 무슨? 전에는 왕자병이 걸린놈이나 꿀만한 꿈을 꾸더니 이번엔 공주병인가? 절망적이군. 그런데 이 녀석의 외모로 볼 때 나이도 세인트와 비슷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유아틱한 말투를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그런데 그나저나 저 녀석에게 느껴지는 이 친근함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된단 말이야?
"황태자 자릴 집어던지고 도망친 네 잘못이니, 날 원망하지마렴. 리투안. 이 누나가 네 그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니?"
일단 나라고 호칭을 할 수 밖에 없는 여자는 그렇게 리투안을 말을 한 뒤, 복부를 잡고 있는 녀석을 그대로 뒤에 둔체 걸음을 그대로 옮겼다.
"라네티스 누나! 갑자기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거야?"
녀석은 약점을 잡혔는지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내 말에 반응을 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거지만 이번 꿈은 그런데로 꽤 재밌는 것 같다. 훗. 실제로 세인트가 저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면 재밌을 듯 한데. 그나저나 꿈속에 등장하는 이 여자의 이름이 라네티스? 이 이름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데 역시 뭔가 안개속에 파묻힌듯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걸어가며 보이는 내 주위의 풍경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조금 고전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 그래, 아틸란티스 제국과 관련된 책에 있던 그림에서 보던 것과 무척 비슷한 것 같았다.
리투안 이란 녀석은 언제 배를 잡고 있었냐는듯 밝은 표정으로 내 곁에 어느새 다가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쩝, 나도 세인트 녀석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꿈에서 까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등장하는지, 어휴. 그런 생각을하는데 갑자기 시선에 무척이나 익숙한, 하지만 내 기억속에는 본적이 없는 듯한 존재의 모습이 보였다. 클라리외 비슷한 백금발 계통이었지만 약하게 붉은빛 기운이 도는 머리결을 가진, 키가 무척이나 큰 남자 엘프였다. 그런데 그 엘프를 보는 순간 갑자기 이놈의 심장은 왜 이렇게 뛰는 건지, 쩝. 병이라도 걸렸나?
"라니."
엘프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모를 반가움. 걸음을 멈춘 날 향해 그 엘프는 천천히 다가 왔다. 그리고 이놈의 심장박동도 더욱더 심해지는 듯 했다.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듯 화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뭐야? 이 반응은?
"센! 오랫만이에요. 시장엔 무슨일로...?"
흠, 책속의 이야기를 읽듯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나라고 호칭을 하기에는 이상했지만 어쨌든 난 아까 리투안에게 말할 때와는 무척 다른 어조로 센이라 불린 엘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센? 흠, 이 이름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질문에 센은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왠지모를 이 기쁨. 휴. 정말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를 향해 옆에 있던 세인트와 무척 닮은 리투안이란 녀석이 다가갔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 역시 아까와는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전의 그 부드럽고 밝은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무엇인가 거대한 산을 마주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흔히들 카리스마라고 설명되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리투안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엘프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장통의 소음 때문에 지금 이 몸의 주인에게는 들리지 않은듯 했지만, 왠지 내게는 리투안의 목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엘프족 수장 그리고 인간을 증오하는자. 하이 엘프 센. 내 누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지 않도록. 네놈과는 달리 내 누이의 마음은 진심이므로."
리투안의 말을 들은 센은 역시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답을 했다.
"나에 대해 어떻게? 하지만 네 말에 틀린 점이 있다. 영리한 검은머리 인간.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다. 그 것만은 신의 이름을 걸고 서라도 다짐할 수 있다."
그런 센을 향해 리투안은 무엇인가 알겠다는 듯, 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누이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가? 하하. 그렇다면 그 감정역시 진실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주의하도록 센. 내가 아무리 힘이 없는 인간이란 존재라고 하더라도 네가 누이에게 상처를 입힐 땐, 내 생명을 받쳐서라도 그 대가를 치루게 할테니. 그럼 누이를 부탁한다."
혼잣말을 하듯 말을 한 뒤, 리투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내 쪽을 향해 언제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냐는듯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센을 지나쳐 시장통의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으음."
갑자기 들려오는 꽤 시끄러운 발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의 방문이 열리며 중무장을한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왠지 그다지 좋지 않아보이는 상황. 난 가늘게 실눈을 떠서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슨 일입니까! 다르넨시스공. 제국 서열 5위 란트 크리센 공께선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오!"
황제의 일갈, 그다지 좋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황제는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는 말을 거의 잘 하지 않는데 말이다. 황제의 일갈에 기세좋게 등장하던 병사들이 조금 움찔 했다.
"미안하지만 순순히 병사들을 따라 움직여줘야 겠소. 슈타이튼 경. 아테네이오스 측에서 당신과 크리센공을 자신들에게 넘겨주면 철수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로써도 불가피하오. 천여명의 병력이 더한들 고작 오천의 병력으로 사만의 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가 크오.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상관이 아무리 고귀한 위치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황제께서 맞기신 이 성과 백성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 이해해주길 바라오. "
병사들 앞에 서 있는 저 백발의 남자, 아무래도 이오니스의 영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컥, 아테네이오스에게 넘긴다니? 내가 녀석들 편인 네크로멘서를 소멸시켜버렸는데 날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몸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일단 난 몸 속에 남아있는 마나를 최대한 끌어모은 뒤,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다르넨시스, 방금 그 말을 후회하지 않는가?"
황제는 이오니스 영주에게 존대를 하지 않은체 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어조의 변화에 이오니스 영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있던 투구와 두건을 벗어버렸다. 차르륵 허릿춤으로 떨어지는 풍성한 검은빛 머리.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등에 두건으로 감싸고 있었던 금빛으로 빛나는 황제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다르넨시스! 지금 네가 누구를 적에게 넘기려 하는지 알고 있느냐! 감히 제국의 황제 나 세레니안느 1세를 적에게 팔아넘기겠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네 피가 묻은 이 검 앞에서 지금 네가 피의 맹세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수백년동안 내려온 충성의 언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냐!"
다시 한번 들리는 황제의 일갈, 도저히 여자가 내는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어조였다. 약해진 심신에 내가 잠시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역시 수십년간 제국을 통치하였고, 수년간 전장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맡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오니스 영주의 얼굴이 순간 사색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곧 한손에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린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힌체 급히 주저 앉았다. 황제의 호통소리에 다시한번 움찔한 병사들은 그런 영주의 행동을 본 뒤,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폐하께서 저렇게 젊은 여인일리가 없지 않느냐! 병사들 뭣들 하냐 어서 체로하지않고!"
그런데 영주의 뒤에 서있던, 약삭빠르게 생간 중년의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을 했다. 흠, 솔직히 최근의 황제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병사들은 그 녀석의 말에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황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닥쳐라! 지르닐! 폐하께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폐하, 신 다르넨시스, 미처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죽음으로서 신의 죄를 씻을 수 있도록, 그리고 피의맹세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영주로 추정되는 다르넨시스란 남자는 그 약삭빠르게 생긴 남자에게 호통을 친 뒤, 다시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을 했다. 확실히 이 남자가 황제에게 반역을 하려했다거나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황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사람이 황제의 정체를 알기 전에 황제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려했을테니,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약삭빠르게 생긴 남자는 뭔가 다른게 있는 것 같았는데, 흠 어쨌든 상황도 진정시킬겸 이쯤에서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찌릿하게 온몸을 암습하는 이 통증, 내가 그 네크로멘서에게 당하기도 심하게 당한듯 했다. 하긴 거의 무저항인 상태로 그런 엄청난 암흑기운과 충돌했으니, 이 정도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컥, 그런데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잠옷이잖아? 폼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힘들것 같았다. 게다가 이 흐느적에다가 비틀거리기까지하는 내 걸음걸이로는 말이다. 아무튼 난 최대한 당당한 걸음으로 황제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난 거의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신 란트 크리센,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용서를 구하옵니다."
정말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꼭 답을 해야 한다면 너무나도 잘난 자칭 나의 누나이며, 실제로는 엄마의 의자매였으므로 내게는 이모인 존재와 함께 다닌 것 때문인 듯 한데. 휴.
"아니에요. 크리센공. 그동안 짐 대신 많은 일들을 해결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몸이 완전히 쾌유될 때까지 요양을 취하도록 하세요."
황제는 내게로 시선을 돌린 후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어조로 내게 말을 했다. 흠, 확실히 사적인 자리의 황제의 어조보다는 지금 이 어조가 솔직히 내게는 더 편했다. 황제가 아무리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나를 대한다고 하더라도 나이나 사회적 위치등 여러가지 면에서 내가 신경을 써야할 존재였으니까. 예전에 마을에 있을 때와는 달리 여행을 떠난 뒤부터는 여러가지 면에서 내가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네, 폐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후 다시 일어서서 침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던 내 의도와는 달리, 무릎을 꿇은체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몸상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정말 심각하군.
"레이디 클라리, 어서 크리센공을 부축해 드리도록 하세요."
황제는 뒤 쪽에서 평소와는 달리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얌전히 서있던 클라리에게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클라리는 별말없이 재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와 내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클라리의 표정에서 날 향한 걱정이 느껴졌다. 이 편안함, 정말 입을 열어 말만 하지 않는다면 여신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텐데.
"다르넨시스 공, 짐 역시 공이 다른 생각을 했으리라고는 짐도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대의 측근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게다가 짐의 기억 속에 분명히 만난적이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까지 짐을 부인하다니, 딴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설명하지 않고선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황제는 처음과 달리 다르넨시스에게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무리를해서 등장을한 효과가 있었나? 아무튼 황제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주위에서 가만히 있는 영주를 부축여서 이런 행동을 보이도록 한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린 후, 황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오니스 성과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공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 아니나, 일단 서열상으로 공의 상급자이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곳으로 지원군을 이끌고 온 란트 크리센 북파나단 자치령주를 적에게 넘기려 한 것은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제국의 법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틀림이 없어요. 그러나 지금은 전시 상황, 공의 죄에 대해서는 이 이후로 묻지 않을테니, 측근들의 관리부터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황제의 칙령으로 명하는 바이니."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창쪽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아직 완전히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는 의미, 그리고 다시한번 다르넨시스를 시험하려는 의도역시 있었다. 이 상태에서 황제에게 기습을 한다거나 할경우 명백한 반역의도가 있으므로, 물론 황제가 평범한 여인네였다면 그런 무모한 방법을 쓸리가 없지만, 황제는 지금 누가 기습을 하더라도 충분히 피해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네, 폐하. 신 다르넨시스. 칙령을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슈른, 마이론 경 지금 당장 지르닐 부영주를 체포해서 지하감옥으로 보내도록 하게. 심문은 내가 직접 하겠네."
다행히 다르넨시스 이 사람은 황제의 말에 별다른 이의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황제의 말에 내재된 뜻까지 정확하게 이해를 해서 그 행동을 보였다. 아마 황제도 지르닐인가 하는 저 사람을 이 이전에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내 느낌이 정확했단 말인가?
"다르넨시스 공!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다르넨시스공!"
지르닐이란 그 얍삽하게 생긴 녀석은 저항을 했지만 곧 다르넨시스 바로 뒤에 서있던 기사 두명에게 붙들려 끌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폐하, 신 다르넨시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던 다르넨시스는 여전히 등을 보인체 서 있는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황제는 다시 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해 보세요."
황제 역시 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긴장을 하고 있었던 듯, 사태가 진정된 지금 황제의 목소리에서는 전과는 달리 약하게나마 편안함이 느껴졌다.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폐하께서 오셨음을 알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그들에게는 폐하께서 이 곳에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큰 힘이 될 것같습니다."
당당함, 어떻게 보면 방금전에 즉결처형이 되었어도 별 불만을 가지지 못할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르넨시스 영주는 황제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곧은 사람들의 모습, 아마 날 적에게 넘기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다만 그에게는 나보다는 이오니스 성과 백성들의 가치가 더 컸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다고 해도, 왠지 모를 꽤씸함은. 흠흠.
"그 일은 공이 알아서 하도록, 그리고 좀 쉬고 싶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세요."
황제는 그렇게 말을 한 후, 다르넨시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체 방 한쪽에 있느 쇼파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르넨시스는 황제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후,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휴 정말,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쨌든 이제 황제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다도 된다는 말인가? 그나마 다행이군.
"주인님아, 몸은 좀 어때?"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뒤, 계속 내 옆에 붙어있던 클라리가 내게 말을 했다. 지금 이런 상태로 클라리를 쳐다보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했다. 마을을 떠난 뒤부터는 어떻게 하다보니 이런 일이 종종 생가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내가 무리를 하게 될 일도 많이 생겼다는 말, 뭐 절반은 별필요없는 일에 힘을 낭비해서 생긴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다지 좋진 않은 것 같아."
난 힘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클라리에게 말을 했다. 그나저나 이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러나게 된 거야? 난 황제에게 그 사실을 물어볼 요량으로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어느세 황제는 쇼파에 푹 파묻혀 잠이들어있었다. 무방비상태, 저 모습만 보면 정말 평범한 아가씨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저 강한 황제 역시 꽤 힘들었나보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행의 여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다 황제의 성격으로볼 때 내 곁에 계속 있었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 이런 일도 일어났고, 이래저래 난 주위사람들에게 빚진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빚을 갚기위해 평생을 투자해도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런데 주인님아, Frisin, Arniss Hanur. 가 무슨 뜻이야?"
'고마워, 사랑스런 당신.'이란 뜻인 것 같은데, 클라리가 저 닭살돋는 대사만 골라서 만든 말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왜 클라리?"
플라타니오 신성어. 그 때 그 책이 아무래도 플라타니오 신의 경전이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읽었던 말은 플라타니오 신성어. 플라타니오신의 사제들만 읽을 수 있다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니?
"주인님이 그 때 나한테 한말이잖아. 쓰러지면서, 기억 나지 않아?"
"컥!"
무슨,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닭살돋는 대사를 한거야? 아무리 정신이 없는 해롱해롱하는 생태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용어 대신 신성어로 말을 했다는 것 정도? 클라리가 저 뜻을 알게되면 정말 망신이었다.
"주인님아 그 말 무슨 뜻이야? 응?"
난 클라리의 질문을 조용히 무시한체 눈을 감고 의식적으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클라리로 인해 이런저런 자극이 몸의 곳곳에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체력 때문인지 난 별 어려움없이, 아니 정확히는 거의 기절하듯 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포세트립톤의 그 시장통이었다. 그런데 왠지 내가 알고 있는 그 것과는 분위기가 무엇인가 달랐다. 옷차림이나 건물같은 것들의 모습이 무척 낯설은 듯하면서도 왠지모를 정감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왠 포세트립톤? 난 이오니스 성 앞에서 전투를 하다가 쓰러졌는데, 무슨일일까? 그래 이번에도 또, 꿈인건가?
"누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돌히 하는 거야?"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왠 누나? 하지만 이번에도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패턴을 보니 확실히 꿈이 맞는 것 같다. 컥. 그런데 내가 고개를 돌린 그 곳에 있는 녀석은 검은빛 머리의 세인트 그 녀석이었다. 그런데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세인트 보다는 조금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세인트보다 조금 더 잘생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리투안."
그런데 왠 여자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 내 시선이 조금 아랫쪽으로 향하며, 내 몸에 걸쳐있는 흰색의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겉에 표시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여성형 체형. 헛, 이제 꿈에서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게다가 이건 여장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여자가 되버렸잖아? 나도 중증이군.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분명히 여장으로 겪었던 수많은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압박에 따른 후유증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리투안이라면 제국의 국명인데 그게 이름? 잠깐, 리투안을 이름으로 사용했던 사람이면? 그런데 꼭 친구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 것 처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순간 머릿속에서 잡힐들 잡힐 듯 하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뭐였지?
"우아~! 우리 귀엽고 아름다우신 사촌 누님께서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멍하게 보고 계시면 이 동생, 가슴이 설레어 몸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답니다."
이 녀석이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세인트와 괭장히 닮은 그 리투안이란 녀석은 그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날 끌어안아 버리는 것이었다. 커억, 이 녀석 길거리에서 무슨 짓을 하는거야! 내 성격 같았으면 이 순간 한방 차버렸을텐데 내 마음데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으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생각을 하며 이 절망적인 사태에 분노하고 있는 순간, 내 의지와는 절대 상관없이 주먹이 녀석의 복부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훔, 내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꽤 마음에 드는 행동이군.
"리투안, 네가 살기를 포기한 모양이구나. 제국의 황녀의 몸에 네 마음대로 손을 대다니."
리투안은 무척이나 아픈 표정을 지은체 배를 양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흠,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그 리투안이란 녀석은 확실히 세인트 녀석과 많이 닮았지만 차이점도 조금씩 느껴졌다. 뭐, 꿈이란게 경험을 기초로 재구성되는 것이라고들하니 그런지 모르겠다. 잠깐. 그렇다는 말은 내가 여자가 되어 있는 것도 경험을 기초로? 흠흠. 그냥 아니라고 해둬야 할 것 같다.
"평소엔 황녀라고 부르기만 해도 화를 내더니, 누난 이럴 때만 황녀 핑계를 대고 그래?"
황녀? 황위 계승권이 있는 황실의 여자를 부르는 호칭인데 무슨? 전에는 왕자병이 걸린놈이나 꿀만한 꿈을 꾸더니 이번엔 공주병인가? 절망적이군. 그런데 이 녀석의 외모로 볼 때 나이도 세인트와 비슷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유아틱한 말투를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그런데 그나저나 저 녀석에게 느껴지는 이 친근함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된단 말이야?
"황태자 자릴 집어던지고 도망친 네 잘못이니, 날 원망하지마렴. 리투안. 이 누나가 네 그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니?"
일단 나라고 호칭을 할 수 밖에 없는 여자는 그렇게 리투안을 말을 한 뒤, 복부를 잡고 있는 녀석을 그대로 뒤에 둔체 걸음을 그대로 옮겼다.
"라네티스 누나! 갑자기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거야?"
녀석은 약점을 잡혔는지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내 말에 반응을 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거지만 이번 꿈은 그런데로 꽤 재밌는 것 같다. 훗. 실제로 세인트가 저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면 재밌을 듯 한데. 그나저나 꿈속에 등장하는 이 여자의 이름이 라네티스? 이 이름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데 역시 뭔가 안개속에 파묻힌듯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걸어가며 보이는 내 주위의 풍경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조금 고전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 그래, 아틸란티스 제국과 관련된 책에 있던 그림에서 보던 것과 무척 비슷한 것 같았다.
리투안 이란 녀석은 언제 배를 잡고 있었냐는듯 밝은 표정으로 내 곁에 어느새 다가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쩝, 나도 세인트 녀석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꿈에서 까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등장하는지, 어휴. 그런 생각을하는데 갑자기 시선에 무척이나 익숙한, 하지만 내 기억속에는 본적이 없는 듯한 존재의 모습이 보였다. 클라리외 비슷한 백금발 계통이었지만 약하게 붉은빛 기운이 도는 머리결을 가진, 키가 무척이나 큰 남자 엘프였다. 그런데 그 엘프를 보는 순간 갑자기 이놈의 심장은 왜 이렇게 뛰는 건지, 쩝. 병이라도 걸렸나?
"라니."
엘프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모를 반가움. 걸음을 멈춘 날 향해 그 엘프는 천천히 다가 왔다. 그리고 이놈의 심장박동도 더욱더 심해지는 듯 했다.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듯 화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뭐야? 이 반응은?
"센! 오랫만이에요. 시장엔 무슨일로...?"
흠, 책속의 이야기를 읽듯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나라고 호칭을 하기에는 이상했지만 어쨌든 난 아까 리투안에게 말할 때와는 무척 다른 어조로 센이라 불린 엘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센? 흠, 이 이름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질문에 센은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왠지모를 이 기쁨. 휴. 정말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를 향해 옆에 있던 세인트와 무척 닮은 리투안이란 녀석이 다가갔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 역시 아까와는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전의 그 부드럽고 밝은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무엇인가 거대한 산을 마주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흔히들 카리스마라고 설명되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리투안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엘프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장통의 소음 때문에 지금 이 몸의 주인에게는 들리지 않은듯 했지만, 왠지 내게는 리투안의 목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엘프족 수장 그리고 인간을 증오하는자. 하이 엘프 센. 내 누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지 않도록. 네놈과는 달리 내 누이의 마음은 진심이므로."
리투안의 말을 들은 센은 역시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답을 했다.
"나에 대해 어떻게? 하지만 네 말에 틀린 점이 있다. 영리한 검은머리 인간.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다. 그 것만은 신의 이름을 걸고 서라도 다짐할 수 있다."
그런 센을 향해 리투안은 무엇인가 알겠다는 듯, 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누이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가? 하하. 그렇다면 그 감정역시 진실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주의하도록 센. 내가 아무리 힘이 없는 인간이란 존재라고 하더라도 네가 누이에게 상처를 입힐 땐, 내 생명을 받쳐서라도 그 대가를 치루게 할테니. 그럼 누이를 부탁한다."
혼잣말을 하듯 말을 한 뒤, 리투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내 쪽을 향해 언제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냐는듯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센을 지나쳐 시장통의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으음."
갑자기 들려오는 꽤 시끄러운 발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의 방문이 열리며 중무장을한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왠지 그다지 좋지 않아보이는 상황. 난 가늘게 실눈을 떠서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슨 일입니까! 다르넨시스공. 제국 서열 5위 란트 크리센 공께선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오!"
황제의 일갈, 그다지 좋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황제는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는 말을 거의 잘 하지 않는데 말이다. 황제의 일갈에 기세좋게 등장하던 병사들이 조금 움찔 했다.
"미안하지만 순순히 병사들을 따라 움직여줘야 겠소. 슈타이튼 경. 아테네이오스 측에서 당신과 크리센공을 자신들에게 넘겨주면 철수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로써도 불가피하오. 천여명의 병력이 더한들 고작 오천의 병력으로 사만의 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가 크오.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상관이 아무리 고귀한 위치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황제께서 맞기신 이 성과 백성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 이해해주길 바라오. "
병사들 앞에 서 있는 저 백발의 남자, 아무래도 이오니스의 영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컥, 아테네이오스에게 넘긴다니? 내가 녀석들 편인 네크로멘서를 소멸시켜버렸는데 날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몸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일단 난 몸 속에 남아있는 마나를 최대한 끌어모은 뒤,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다르넨시스, 방금 그 말을 후회하지 않는가?"
황제는 이오니스 영주에게 존대를 하지 않은체 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어조의 변화에 이오니스 영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있던 투구와 두건을 벗어버렸다. 차르륵 허릿춤으로 떨어지는 풍성한 검은빛 머리.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등에 두건으로 감싸고 있었던 금빛으로 빛나는 황제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다르넨시스! 지금 네가 누구를 적에게 넘기려 하는지 알고 있느냐! 감히 제국의 황제 나 세레니안느 1세를 적에게 팔아넘기겠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네 피가 묻은 이 검 앞에서 지금 네가 피의 맹세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수백년동안 내려온 충성의 언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냐!"
다시 한번 들리는 황제의 일갈, 도저히 여자가 내는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어조였다. 약해진 심신에 내가 잠시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역시 수십년간 제국을 통치하였고, 수년간 전장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맡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오니스 영주의 얼굴이 순간 사색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곧 한손에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린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힌체 급히 주저 앉았다. 황제의 호통소리에 다시한번 움찔한 병사들은 그런 영주의 행동을 본 뒤,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폐하께서 저렇게 젊은 여인일리가 없지 않느냐! 병사들 뭣들 하냐 어서 체로하지않고!"
그런데 영주의 뒤에 서있던, 약삭빠르게 생간 중년의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을 했다. 흠, 솔직히 최근의 황제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병사들은 그 녀석의 말에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황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닥쳐라! 지르닐! 폐하께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폐하, 신 다르넨시스, 미처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죽음으로서 신의 죄를 씻을 수 있도록, 그리고 피의맹세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영주로 추정되는 다르넨시스란 남자는 그 약삭빠르게 생긴 남자에게 호통을 친 뒤, 다시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을 했다. 확실히 이 남자가 황제에게 반역을 하려했다거나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황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사람이 황제의 정체를 알기 전에 황제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려했을테니,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약삭빠르게 생긴 남자는 뭔가 다른게 있는 것 같았는데, 흠 어쨌든 상황도 진정시킬겸 이쯤에서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찌릿하게 온몸을 암습하는 이 통증, 내가 그 네크로멘서에게 당하기도 심하게 당한듯 했다. 하긴 거의 무저항인 상태로 그런 엄청난 암흑기운과 충돌했으니, 이 정도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컥, 그런데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잠옷이잖아? 폼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힘들것 같았다. 게다가 이 흐느적에다가 비틀거리기까지하는 내 걸음걸이로는 말이다. 아무튼 난 최대한 당당한 걸음으로 황제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난 거의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신 란트 크리센,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용서를 구하옵니다."
정말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꼭 답을 해야 한다면 너무나도 잘난 자칭 나의 누나이며, 실제로는 엄마의 의자매였으므로 내게는 이모인 존재와 함께 다닌 것 때문인 듯 한데. 휴.
"아니에요. 크리센공. 그동안 짐 대신 많은 일들을 해결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몸이 완전히 쾌유될 때까지 요양을 취하도록 하세요."
황제는 내게로 시선을 돌린 후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어조로 내게 말을 했다. 흠, 확실히 사적인 자리의 황제의 어조보다는 지금 이 어조가 솔직히 내게는 더 편했다. 황제가 아무리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나를 대한다고 하더라도 나이나 사회적 위치등 여러가지 면에서 내가 신경을 써야할 존재였으니까. 예전에 마을에 있을 때와는 달리 여행을 떠난 뒤부터는 여러가지 면에서 내가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네, 폐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후 다시 일어서서 침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던 내 의도와는 달리, 무릎을 꿇은체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몸상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정말 심각하군.
"레이디 클라리, 어서 크리센공을 부축해 드리도록 하세요."
황제는 뒤 쪽에서 평소와는 달리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얌전히 서있던 클라리에게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클라리는 별말없이 재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와 내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클라리의 표정에서 날 향한 걱정이 느껴졌다. 이 편안함, 정말 입을 열어 말만 하지 않는다면 여신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텐데.
"다르넨시스 공, 짐 역시 공이 다른 생각을 했으리라고는 짐도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대의 측근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게다가 짐의 기억 속에 분명히 만난적이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까지 짐을 부인하다니, 딴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설명하지 않고선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황제는 처음과 달리 다르넨시스에게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무리를해서 등장을한 효과가 있었나? 아무튼 황제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주위에서 가만히 있는 영주를 부축여서 이런 행동을 보이도록 한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린 후, 황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오니스 성과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공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 아니나, 일단 서열상으로 공의 상급자이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곳으로 지원군을 이끌고 온 란트 크리센 북파나단 자치령주를 적에게 넘기려 한 것은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제국의 법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틀림이 없어요. 그러나 지금은 전시 상황, 공의 죄에 대해서는 이 이후로 묻지 않을테니, 측근들의 관리부터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황제의 칙령으로 명하는 바이니."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창쪽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아직 완전히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는 의미, 그리고 다시한번 다르넨시스를 시험하려는 의도역시 있었다. 이 상태에서 황제에게 기습을 한다거나 할경우 명백한 반역의도가 있으므로, 물론 황제가 평범한 여인네였다면 그런 무모한 방법을 쓸리가 없지만, 황제는 지금 누가 기습을 하더라도 충분히 피해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네, 폐하. 신 다르넨시스. 칙령을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슈른, 마이론 경 지금 당장 지르닐 부영주를 체포해서 지하감옥으로 보내도록 하게. 심문은 내가 직접 하겠네."
다행히 다르넨시스 이 사람은 황제의 말에 별다른 이의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황제의 말에 내재된 뜻까지 정확하게 이해를 해서 그 행동을 보였다. 아마 황제도 지르닐인가 하는 저 사람을 이 이전에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내 느낌이 정확했단 말인가?
"다르넨시스 공!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다르넨시스공!"
지르닐이란 그 얍삽하게 생긴 녀석은 저항을 했지만 곧 다르넨시스 바로 뒤에 서있던 기사 두명에게 붙들려 끌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폐하, 신 다르넨시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던 다르넨시스는 여전히 등을 보인체 서 있는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황제는 다시 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해 보세요."
황제 역시 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긴장을 하고 있었던 듯, 사태가 진정된 지금 황제의 목소리에서는 전과는 달리 약하게나마 편안함이 느껴졌다.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폐하께서 오셨음을 알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그들에게는 폐하께서 이 곳에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큰 힘이 될 것같습니다."
당당함, 어떻게 보면 방금전에 즉결처형이 되었어도 별 불만을 가지지 못할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르넨시스 영주는 황제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곧은 사람들의 모습, 아마 날 적에게 넘기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다만 그에게는 나보다는 이오니스 성과 백성들의 가치가 더 컸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다고 해도, 왠지 모를 꽤씸함은. 흠흠.
"그 일은 공이 알아서 하도록, 그리고 좀 쉬고 싶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세요."
황제는 그렇게 말을 한 후, 다르넨시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체 방 한쪽에 있느 쇼파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르넨시스는 황제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후,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휴 정말,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쨌든 이제 황제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다도 된다는 말인가? 그나마 다행이군.
"주인님아, 몸은 좀 어때?"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뒤, 계속 내 옆에 붙어있던 클라리가 내게 말을 했다. 지금 이런 상태로 클라리를 쳐다보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했다. 마을을 떠난 뒤부터는 어떻게 하다보니 이런 일이 종종 생가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내가 무리를 하게 될 일도 많이 생겼다는 말, 뭐 절반은 별필요없는 일에 힘을 낭비해서 생긴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다지 좋진 않은 것 같아."
난 힘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클라리에게 말을 했다. 그나저나 이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러나게 된 거야? 난 황제에게 그 사실을 물어볼 요량으로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어느세 황제는 쇼파에 푹 파묻혀 잠이들어있었다. 무방비상태, 저 모습만 보면 정말 평범한 아가씨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저 강한 황제 역시 꽤 힘들었나보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행의 여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다 황제의 성격으로볼 때 내 곁에 계속 있었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 이런 일도 일어났고, 이래저래 난 주위사람들에게 빚진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빚을 갚기위해 평생을 투자해도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런데 주인님아, Frisin, Arniss Hanur. 가 무슨 뜻이야?"
'고마워, 사랑스런 당신.'이란 뜻인 것 같은데, 클라리가 저 닭살돋는 대사만 골라서 만든 말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왜 클라리?"
플라타니오 신성어. 그 때 그 책이 아무래도 플라타니오 신의 경전이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읽었던 말은 플라타니오 신성어. 플라타니오신의 사제들만 읽을 수 있다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니?
"주인님이 그 때 나한테 한말이잖아. 쓰러지면서, 기억 나지 않아?"
"컥!"
무슨,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닭살돋는 대사를 한거야? 아무리 정신이 없는 해롱해롱하는 생태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용어 대신 신성어로 말을 했다는 것 정도? 클라리가 저 뜻을 알게되면 정말 망신이었다.
"주인님아 그 말 무슨 뜻이야? 응?"
난 클라리의 질문을 조용히 무시한체 눈을 감고 의식적으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클라리로 인해 이런저런 자극이 몸의 곳곳에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체력 때문인지 난 별 어려움없이, 아니 정확히는 거의 기절하듯 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