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9장 제 1차 이오니스 공방전-5

푸른바람 BlueWind·2002. 11. 2. PM 5:10:31·조회 2195·추천 53
에피소드 59 이오니스 공방전-5


-요한 바울루스 1세, 제 42대 교황이었던 그는 선대 피스 프리한 교황과 함께 종교 교단 간의 평화화 화합에 힘쓴 인물이다. 23살, 거의 이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리투안지역 추기경으로 선출된 이후, 유하네리스 평회위원회의 대표로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이단 심판소의 만행을 저지하는데 힘을 썼다. 결국 그는 진정한 교리의 실천에서 벗어나 거의 광적으로 타 종교의 신관들을 살해하던 이단 심판소 소속 신관들을 그의 나이 38살이 되던해에 교단의 지원을 받은 뒤 과감한 작전으로 모두 체포, 종교재판에 회부함으로써 이단 심판소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서부대륙 대전쟁이 마무리 된 제국력 30년, 46살의 나이에 유하네리스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이 된 후에도 그는 여러 종교간의 화합에 힘써, 피투안이 국교로 체택함으로써 부활한 플라타니오 교단과도 깊은 친분을 쌓았다......<역대 교황 평전 -유하네리스 역사 편찬 위원회 저->





황제의 정체가 드러난 뒤부터는 한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게 되버렸다. 여러가지 일들에 휩쓸려다니는 모습을 보니, 황제가 그렇게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며칠동안이나 난 황제에게 별도움을 주지도 못한체 계속 침대신세를 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황제가 직접 나섰는데 나 하나쯤 없다고 별다른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기왕 이렇게 된 것, 몸이나 확실히 회복을 하자고 난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핑계를 대고 좀 쉬고 싶었다. 사령관의 위치라는게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체력소모가 꽤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쩝, 사령관 정도에 비할바가 아닐정도의 일을 수십년간 해내고 있는 황제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주인님아, 세리언니가 오늘 저녁에 있는 회의에는 꼭 참석 해라고 연락을 해왔어."

황제가 없는 동안 전시라 하녀들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한체 혼자서 날 열심히 간호해 줬던 클라리가 밖에서 들어오며 내게 이야기를 했다. 훔,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클라리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주인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임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클라리는 언제나 별다른 불평없이 날 도와주었다. 귀찮을 때도 종종있었지만 이제는 클라리가 없는 내 삶을 생각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왠 회의? 거의 매일 같이 회의가 열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황제가 날 호출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 몸상태도 그렇고, 솔직히 내가 생각을 해보아도 나란 존재가 회의에 참가한들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알아? 클라리."

내 질문에 클라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답을 했다.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주인님아. 그냥 뭔가 특별히 할 일이 있다는 이야기만 하던데?"

특별히 할 일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생각하는 것 보다는 전투도 그렇게 크게 번지지 않은 것 같은데 특별한 일이라니? 훔, 모르겠다.

어쨌든 이오니스 성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 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우리가 묵고 있는 방의 위치가 꽤 높은 탑 같은 곳에 있었기에 밖의 상황을 살피기에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며칠간 지켜본 바로는 간간히 소규모의 전투가 있을 뿐, 그렇게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해로와 육로를 통해 들어오는 풍부한 물자의 도움을 받고 있는 까닭에 수성하는 측에서 느끼기 쉬운 물자부족으로 인한 사기저하나 혼란과 같은 일이 생기지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는 아테네이오스 측이 물자걱정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내가 대략적으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아테네이오스 군은 총 5만여명 정도, 그리고 처음부터 공성전을 예상하였는지 몰라도 기병에 비해 압도적인 보병숫자와 많은 공성무기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에서 아테네이오스 측이 꽤 오랜시간 이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똑, 똑.'

창 밖을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클라리가 내 곁에서 일어서더니 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노크를 하는 것으로 볼 때, 소피, 티티 자매나, 황제는 아닐 것 같은데, 누구지?

"그동안 잘지내셨습니까, 레이디? 크리센공께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는지 한 번 여쭤봐 주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흠, 이 목소리는, 누구지? 아! 예의를 갖춘 어조에다 그 말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 털털한 특색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면, 오직 단 한명뿐이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유하네리스 신의 추기경, 바로 그 였다.

추기경의 말을 들은 클라리는 내 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내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문에서 비켜서서 추기경을 안으로 안내했다. 내 의사 따위는 안중에는 없다는 말인가? 저놈의 검이, 정말. 좋게 생각해 줄 수가 없다니까.

난 계속 누워있느라 잔뜩 구겨진 잠옷을 대충 정돈한 다음 침대에서 일어섰다. 잠옷을 입고 추기경을 맞이한다는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 정도는 어린애도 알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뭐, 잘못은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온 추기경과 무책임하게 그 추기경을 들여보내준 클라리에게 있었다.

"부상은 좀 어떠십니까? 예하. 제가 먼저 찾아뵜어야하는데, 송구스럽습니다."

난 그다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추기경에게 예를 표했다. 이런 형식보다 중요한 건 그 당사자의 마음일 것임에도 이런 형식에 얽매여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그랬다. 하지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 또한 현실, 지금은 내가 마을에서 아무렇게나하고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인간사에 휩쓸려도 너무 깊이 휩쓸려버렀으니.

"아니, 제게 그렇게 예를 표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허리를 굽히려는 순간, 추기경은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내게 다가와 내 행동을 말렸다. 갑자기 내게 안하던 극존칭을 사용하다니 추기경이 왜 그러나?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님께 유하네리스 평화위원회 소속 추기경 요한 바울루스 인사올립니다."

내게 플라타니오 최고사제? 내가? 설마. 도대체 무슨소리야? 그렇다면 전시 상황에서 한 군단의 사령관이었던 내게도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던 저 고귀한 추기경께서 내게 말을 높이는 이유가 그 것 때문이었나? 그런데 내가 어떻게 플라타니오신의 최고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란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최고사제는 커녕, 그냥 평범한 신관이 될 자격조차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네? 무슨 말씀 이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들은듯 합니다. 태어나서 플라타니오신전에 단 한번이라도 찾아간적도 없던 제가 어떻게 플라타니오 교단의 대표인 최고 사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추기경 예하."

나이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 추기경이 미쳤나 하는 생각을 하며,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추기경은 지극히 정상적을 보이는 모습으로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분명히 최고 사제의 자격을 가지고 계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전에 사제님께 드렸던 플라타니오경전, 그 경전의 첫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이세상에 오직 플라타니오신의 최고 사제 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난 이상황을 도데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영주님에 백합의 기사가 되는 것 까지는 어떻게 된다고 치더라도, 한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피의 광전사가 어떻게 최고 사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혹시 추기경께서 잘못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무리 추기경께서 제가 플라타니오 교단의 최고사제라고 말하셔도 플라타니오 교단측에서 인정을 하지 않으면 무의미 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추기경 역시 플라타니오 교단인 타 교단의 추기경이므로, 플라타니오신에 대해 정확히 모를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난 여전히 내가 최고사제란 말에 의문을 품으며 추기경에게 질문을 했다.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플라타니오 교단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플라타니오 교단의 마지막 최고사제께서 죽기직전에 제게 말씀하셨던 것이니."

잠시 말을 끊었던 추기경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추기경의 그 한숨에서 왠지모를 슬픔이 배여져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흰빛의 바탕에 노란빛의 금테가 있는 플라타니오 경전, 그리고 경께 드렸던 플라타니오의 여신상. 모두 플라타니오의 최고사제임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아, 그리고보니, 지금까지 단 한번도 플라타니오신의 사제를 만난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플라타니오신앙을 종교로 채택한 사람을 본 기억 역시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벌써 망해버린 종교란 말인 듯 한데. 쩝.

"그런데 추기경께서는 플라타니오신자도 아니시면서 어떻게 그런 일을....?"

그래, 가장 중요하며 또 의문이가는 일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며, 추기경에게 물음을 던졌다.

"말씀드리자면 깁니다만, 왠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20년전의 그 일을."





"요한 추기경, 이 모든 일이 자네 덕분이네. 고맙네."

"아닙니다. 교황님. 모든 것이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그 색을 읺지 않고 있는 금빛 머리에 그다지 많지 않은 주름, 사십대 후반의 나이는 교황이란 직책을 맡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유하네리스 교단에서 이 보다 더 교황이란 직책에 잘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고아였던 내가 신관이 되겠다는 목표로 처음 신전에 들어왔을 때 부터 날 항상 챙겨주시던 고마운 분,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던 내게 이 분은 부모이상의 존재였다.

"즉위식만 마치면, 그 때, 그 일은 꼭 성사시키도록 하겠네. 반대야 물론 있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그 일은 지금 우리가 이끌어가야할 유하네리스 교단의 이상, 바로 그 자체이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성사시켜야 하네."

"감사합니다. 교황님."

교황의 대답에 난 다시한번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이루워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소망이었기에 교황의 그 대답은 내게 더 없는 선물이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시련과 고통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 일, 루니와의 결혼, 물론 평범한 여인과의 결혼이라면 교단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경전에도 쓰여져 있듯, 결혼이란 신께서 내린 축복이므로. 하지만 루니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순결한 들꽃의 성녀,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 루넬리스 하미, 이 것이 그녀의 정식 호칭이었다.

종교의 차이, 물론, 여러 신을 인정하는 플라타니오 교단 측에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신앙인 유하네리스 교단은 그렇지 않았다. 타 종교의 신도, 아니 그것도 그 종교를 대표하는 최고사제와 교단 소속 추기경과의 결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특히, 요즘과 같이 이단 심판소 녀석들이 설치고 다니는 지금 같은 시기는 더욱더 그러했다.

"이단심판소, 그들이 행하는 일, 아니 절대 신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네. 우리 교단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야. 모든 생명체들의 평화와 화합. 그 것이 진정으로 신께서 원하시는 바이실 걸세."

난 교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 심판소, 교단에서 떨어져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단인 그들은 이미 진정한 믿음을 잃은지 오래되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마녀사냥'이라 지칭되는 살육뿐. 종교에 대해서 국가가 간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악용하여 무차별 살상을 일삼고 있는 그들은 이미 신의 사도는 커녕 인간이라고도 지칭할 수 없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시체를 태우는 유쾌하지 못한 냄세만 남았다.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사제 한명이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쪽을 향해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한후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이단 심판소가 플라타니오 대신전을 급습했습니다. 플라타니오 대신전 측에서 급히 구조를 요청해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단 심판소 녀석들이 어떻게 대신전의 위치를 안단 말이냐?"

놀란 나머지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내 대신, 교황이 사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워낙 급하게 연락을 받아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다급한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난 혼란스러워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제대로된 무력조차 있지 않는 플라타니오 대신전에 도적때보다도 더 악날한 살인마 녀석들이 습격을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너무나 당연했다.

"추기경, 어서 가보게. 평화위원회 소속 사제들을 모두 동원해도 좋네."

난 교황의 말에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급히 밖으로 나왔다. 교황께서는 허락을 내리셨지만 다른 사제를 동원하거나할 시간은 없었다. 최소한 그녀만이라도 살려야했기에. 단지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멀리서 솟아오르는 검은빛 연기,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난 최대한의 속도로 대신전을 향해 날아갔지만,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평범한 여신관인 줄만 알았던 그녀, 이단심판소 녀석들에게 포위당했던 그녀를 구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가녀린 몸매의 그녀, 하지만 겉 외모와는 달리 무척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플라타니오 교단의 최고사제가 될 수 있었겠지만.

플라타니오 교단은 신기하게도 그들의 믿음을 일부러 설파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까닭에 시간이 흐를수록 교세는 약화되었지만 그들은 종교의 여부에 상관없이 힘들고 소외된 이들을 묵묵히 도와왔다. 그녀는 그런 그들 중 하나였고, 또 그들의 상징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을 했다. 대신전으로 들어가는 동굴의 주변에 있던 나무들은 이미 모두 타버리고 없었고, 깊은 숲에 가려져있었던 입구는 이제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밖에 들어나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대신전 주위의 숲과 산맥을 지키고 있던 수많은 오크들의 시체들이 보였다.

난 불길한 예감을 애써 부정하며 굴 속으로 들어갔다. 굴안에는 보호장치가 작동한 까닭인지 수많은 이단심판소 녀석들의 시체가 널부러져있었다. 사악한 마음을 지닌체 이 통로를 지나려하는 이에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신성계열의 결계가 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서는 그 결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악한 인간들의 피로인해 신성한 결계가 무너진 것 같았다. 결국 마지막 희망마져 사라진 것일까? 녀석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희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인가? 진정한 유하네리스 신의 가르침은 절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일말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신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산맥의 지하에 만들어진 넓은 공간, 지하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밝은 빛이 그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그 빛은 강렬한 햇빛과 같은 빛이 아닌, 플라타니오의 상징이기도한 별빛과 같은 아늑함과 편안함이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마져도 지금의 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 곳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곳곳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함 모습으로 쓰러져있는 플라타니오 신관들의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플라타니오 교단의 대부분이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사태의 참혹함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신전안, 특히 신전의 중심부로 갈수록 밖과 같은 참혹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신전안에 놓여져있는 수많은 성물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그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이단심판소 녀석들도 이 곳까지는 감히 오지 못한 것 같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곳에서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플라타니오신을 상징하는 성물들이 남아있지 않았을테니. 제발, 그녀만 무사하다면, 지금 이 순간에는 난 그 이상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신전에 중심에 도달한 나는 위치한 대 예배당문을 급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당문은 평소처럼 그 육중한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 자연스러움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고 예배당의 큰 홀 중앙에는 너무나 하얀 백색의 신관복을 입은 기도하는 모습의 단 한명의 여인만 있었다. 루니, 그녀였다. 난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 쪽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루니!"

그녀에게 다가간 내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힘없이 내 품에 쓰러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보이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 하지만 다행히도 가느다란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요한, 당신이군요."

그녀는 힘이 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날 처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네. 요한입니다. 루니."

하얀 그녀의 얼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어서 회복마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녀를 치료해야 했다. 나도 참.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아니, 소용없어요. 요한. 제 생명의 끈은 이미 끊어진지 오래되었어요."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루니! 아직 당신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비할바는 아니지만, 제게도 당신을 살릴만한 힘은 있습니다."

난 절박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을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회복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연녹색의 빛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지만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루니, 그녀가 플라타니오신의 최고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그 금단의 기술을 사용한 것일까? 자신이 가진 모든 생명력을 희생하는 대가로 신의 권능을 잠시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된다던 기술이었다. 도대체 그녀가 왜? 설마, 이, 이 신전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그 것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내가 죽어가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단말인가? 난 왠지모를 절망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한,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을 만나고 당신과 함께한 그 시간이 제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에요. 현세에서의 요한 당신과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나지만, 다음생에는 꼭, 이룰 수 있을 거에요."

그녀는 천천히 그녀의 너무나도 하얀 손을 들어 내 얼굴에 대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무엇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것일까? 평생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던 그녀가! 그녀 자신은 아무런 보답조차 받지 못한체. 이렇게 무참하게 사라져야만 하는 것인가?

"루니! 루니! 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루니는 미소를, 너무나도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내말에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나의 무력함에 절망을 느낀적이 내 삶에서 있었던가? 그리고 느껴지는 왠지모를 분노.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까지 느껴본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요한, 제 마지막 부탁 하나정도는 들어주실 수 있으시죠?"

그녀는 여전히 힘없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내 마음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정도였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그 어떤 고행과 고난도 지금 만큼 내 마음을 흔들어 놓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순간, 눈에서 무엇인가 한줄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말씀하십시오. 루니."

목이 매여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난 그 감정을 되도록이면 참아내며 말을 했다. 그런데 내 모습이 비친 그녀의 맑은 눈이 왠지 무척 슬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것들을 보관해 주세요. 그리고 전해주세요. 이 여신상과 무척 닮은 분, 스스로 신의 권능을 행하실 수 있는 분,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분, 그리고 그 어둠으로 인해 빛이 더욱더 빛나는 분께......"

그녀는 내게 그말을 하며, 자신의 품에서 작은 여신상과 흰색에 금테가 둘러진 책을 꺼내 내게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내게 전해졌다. 이렇게, 이렇계 끝이 날 수는 없는데.

"루니! 이렇게, 이렇게 가면 안됩니다."

내 외침도 소용없이 그녀의 몸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리고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한번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요한. Frisin, Engo Hanur Yun Dian Lami Ar."



그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종교를 뛰어넘은 사랑, 그가 수십년이란 시간동안 다른신의 성물을 보관해온 이유를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어버린 슬픔, 그 슬픔을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클라리가 손수건에 코를 팽하고 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추기경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졌다. 훌. 추기경의 지금 모습은 그 큰 덩치와 외모, 그리고 당당함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최고 사제님. 실례지만 Frinsin, Engo Hanur Yun Dian Lami Ar가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추기경은 이야기가 끝난 뒤 잠시 후, 내게 말을 했다. 휴. 역시 그는 그 말의 뜻을 알고 싶었던 것인가?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난 추기경의 질문에 그렇게 해석을 해주었다.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추기경은 기도하듯 양손을 마주 잡은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눈가로 물한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수십년 동안 그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의 의미를 찾아 그는 플라타니오 경전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했고,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자신의 긴 이야기를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최고사제님. 사제님께 빚을 하나 지게된 것 같습니다."

추기경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추기경이 나간 뒤에 난 침대 위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과 추기경이 해줬던 이야기를 다시한번 떠올렸다. 그리고 여신상과 경전을 꺼내어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내가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라니. 물론, 마법을 사용하는이 치고 플라타니오 신과 관계가 없는 존재는 없었겠지만,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내가 특별히 플라타니오신의 가호를 받아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추기경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플라타니오 교단은 정말 나같은 놈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순고한 희생과 봉사의 단체,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진정한 종교인들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를 지칭한 것을 추정되는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의 마지막 말이 왠지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듯 한 말임에도 왠지 무엇인가 느껴지는게 있는 것 같았다.

'이 여신상과 무척 닮은 분, 스스로 신의 권능을 행하실 수 있는 분,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분, 그리고 그 어둠으로 인해 빛이 더욱더 빛나는 분께.'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