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0장 수린 요새 탈환 작전-10
푸른바람 BlueWind·2002. 12. 22. AM 12:00:26·조회 2030·추천 64
에피소드 69 수린요새 탈환 작전-10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인 곳, 그런 어둠 속에서 난 혼자 서있었다. 도대체 이 곳은 어디지? 방금전까지 요새의 지하에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어떤 존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란트 크리센, 빛의 뜻을 이은자여."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난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소리가 들린 그 곳에는 방금 전까지의 어둠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밝은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척이나 밝은 빛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빛의 가운데에서 어렴풋이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우스 보다 훨씬 더 찬란히 빛나는 금발, 그리고 큰 키, 백색의 피부. 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외모를 가진 사람.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한눈에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모습 이상으로 왕자나 국왕이란 직책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정도로 여러 가지면에서 군주의 모습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왠지 익숙한 느낌과 모습.
"당신은 누구죠?"
난 이유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이며 그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그 맑은 녹색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날 살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맑은 녹색의 눈, 엄마의 눈과 무척이나 닮은 눈빛이었지만 무엇인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너이기도 하며, 또한 네가 아닌자."
무슨? 난 그의 황당한 대답에 그냥 멀뚱히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이기도 하며 또한 네가 아닌자?
"그리고 너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또한 미래인자."
저 사람이 말한 데로 저 사람이 나라면 그럼 난 뭐란 말인가란 의문이 순간 들었다.
"당신이 저라면, 그럼 지금 전 무엇인가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내 앞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녹색 눈을 응시하며 말을 했다.
"너는 나이기도 하며, 또한 내가 아닌자."
켁,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듣고 있었음에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거람. 정말.
"그리고 나의 뜻을 이었으며, 내가 짊어졌던 짐을 대신 짊어진자."
이번에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대답에 난 아무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하다 이 곳으로 오게 된 걸까? 황제는 이런 일이 생길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하긴 황제 역시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 테니.
그런데 내 앞에 있던 그가 내 어깨에 갑자기 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그리고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소년이여. 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된 과오. 하지만 그 것 역시 네가 짊어질 짐이요 운명인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이 또 다시 반복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때었다. 그리고 갑자기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빛과 어둠.
"주인님아! 무슨일이야?"
"으응?"
난 찬 바닥의 기운을 느끼며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주위의 모습은 요새 중앙 사령부의 지하. 그리고 앞에는 여전히 둥근색 원판이 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도 클라리가 내 몸을 잡아 주어 꼴사납게 완전히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은 듯 했다.
"주인님아,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아."
난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런 나를 잡아주는 클라리의 손길. 도대체 방금 그 이상한 환상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도대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꿈.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의 사람은 누구이길레,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였던 것일까? 너이며, 또한 네가 아닌 존재?
젠장, 그나저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방어막은 쳐졌더라도 일단 방어막 안 쪽에 들어온 적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요새의 동쪽에서는 한참 전투가 이루워지고 있는게 당연했고, 또한 방어막의 범위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니, 일단 그들을 도우러 가야했다. 단 한명의 희생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난 원판에서 옥새를 다시 뽑아 품속에 잘 챙겨 넣은 뒤, 클라리와 함께 방에서 빠져 나왔다. 우리가 나오자마자 벽은 다시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방어막을 해제하지 않는한 방어막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난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건물 밖으로 향했다. 정말 많이 고갈된 듯한 체력.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환각 때문인지, 방어막을 가동시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무척 피곤했다.
멀리 엄청난 규모의 마나의 벽이 생성된 것이 보였다. 정말 내가 가동시켰지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런 엄청난 규모의 방어막을 설치하려면 저 비슷한 규모의 마법진에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할텐데, 누가 저런 무모한 짓을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저 정도의 마나를 잘 갈무리해서 세계정복에 나서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말에 따르면, 저 막에 딸려있는 옵션도 굉장했다. 저 방어막 같은 경우에는 이오니스나 리투안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적의나 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통행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물론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무역이나 그런 비공격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이오니스 쪽으로 오는 것은 차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마법사지만 마법사라는 족속들의 정신상태를 한번 해부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순간 느끼며, 서쪽 성벽을 향해 땅에서 조금 뜬 상태로 날아갔다.
하늘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속도가 빨라졌겠지만 그 만큼 마나 소모량도 엄청나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정작 전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정말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뒤를 슬쩍 쳐다보니 클라리 역시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클라리 역시 상당한 수준의 마법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신체라는 점도 있었지만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때라든지 자신의 기운으로 수준급 검사들을 날려버린다던지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쩝.
성벽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조급함은 더욱더 커지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치솟고 있는 불길이라던지, 자욱한 먼지들의 모습, 그리고 불속성이나 얼음속성이 걸린 화살들이 날아 다니는 모습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잘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성문의 모습이 드디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 혹시나하고 내가 만들어놓았던 마법벽이 유지되고 있는지 그 쪽을 유심히 보았지만, 이미 성문 쪽에서는 내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이미 내가 만든 벽이 무너졌다는 말, 제발 아미하고 카밀 녀석들이 잘 버텨주고 있어야 하는데.
마나가 다해가는 까닭인지 내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생각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내 뒤에서 간신히 쫓아오기만 하던 클라리가 어느새 내 근처에서 날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쩝, 마나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는 정말 방법이 없겠군.
"클라리, 좀 도와줘."
내가 옆의 클라리를 보며 말을 하자 클라리는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을했다.
"응? 뭐라고 했어? 주인님아?"
어휴, 내가 또 말을 해야 하는지 정말, 하지만 지금 아쉬운 것은 일단 나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도와달라고, 네 힘으로 내가 나는 것을 조금 보조해 줄 수 있겠어?"
난 다급함 때문에 조금 급하게 클라리를 향해 말을 했다. 클라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흠, 알았어. 주인님아. 그 정도 일이라면."
클라리는 그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내 한쪽 팔을 잡더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속도를 내는 클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부탁하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나중에 클라리가 생색 낼 것을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다가감에 따라 왠지 서서히 분위기가 사그라들고 있는 것 같았다. 전투가 서서히 끝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적들이 이 곳까지 치고 들어오지는 않는 것으로 볼 때, 일단 우리 쪽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었다. 성문 쪽도 아직 뚫리지 않은 것 같았고.
성문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성문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싼체 싸우고 있는 일단의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컥, 그런데 잠깐. 그 전투의 중심에서 싸우고 있는 카밀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채로 엄청난 덩치의 녀석과 싸우고 있었다. 아미 역시, 카밀 만큼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옷이 잘려나간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카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디가 다친 듯, 그 덩치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젠장.
"클라리 조금만 더 빨리. 안되겠어?"
난 클라리를 향해 급히 재촉하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클라리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한체 내게 답을 했다.
"어쩔 수 없어. 주인님아. 이게 최고속도야."
젠장, 그 덩치의 커다란 쇠망치가 몇번이나 카밀을 스쳐 땅에 박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역시 카밀은 몸상태가 좋지 않은 듯, 녀석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기만 하고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밀, 제발 조금만 더 버텨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아온 나였지만 왠지 저 녀석이 죽거나 하는 것은 정말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카밀이 발을 무언가에 걸렸는지 발을 헛디디며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클라리의 손을 뿌리친 다음 마나를 폭발시키듯 하여 녀석의 상대 앞으로 뛰어들었다. 제발. 내가 늦지 않았기를.
'챙'
클라리와 녀석의 쇠망치가 충돌하는 소리. 순간 통증과 함께 엄청난 압력이 내 몸에 전해졌지만, 어쨌든 녀석의 둔한 움직임 덕택에 간신히 녀석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대, 대장."
뒤에서 들리는 카밀의 목소리, 휴. 다행이었다. 정말.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이 날뻔 했다. 이 점에서는 클라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웨, 웬 꼬마녀석이냐?"
내 앞에 있던 녀석은 조금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날 쳐다보며 말을 했다. 엄청난 덩치, 내가 아까 환상 속에 보았던 그 남자보다도 더 큰데다 덩치도 거의 오우거 수준인 남자가 갑옷을 입고 있으니, 정말 거대했다.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힘은 확실히 강한 것 같았다.
"제국 서열 5위, 남파나단 자치령주 란트 크리센."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은 왜 일까? 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켁, 당,당신이 그, 그 백합의 기사란 말이오?"
하지만 난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채 그대로 녀석의 쇠망치를 밀어낸 다음 녀석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무언가 당황한 까닭인지 녀석의 몸놀림이 아까 전에 카밀과 싸울 때보다 둔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의 허벅지를 노린 내 처음 공격을 녀석은 그 거대한 몸을 뒤로 물러서며 간신히 막아내었다. 하지만 난 내 공격이 막히자마자 곧바로 조금 뒤로 물러선 다음 녀석의 사각을 향해 움직였다. 녀석이 내 움직임을 놓친 순간, 난 그대로 뛰어올라 녀석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투구가 그대로 쪼개졌다. 그리고 녀석은 자신의 쇠망치를 떨어뜨리며 뒤로 쓰러져 버렸다.
이미 전투는 거의 끝난 상태, 난 녀석이 쓰러지자 마자, 카밀을 향해 달려갔다. 카밀은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카밀이 쓰러진 곳 주위에는 이미 피가 흥건했다.
"대, 대장. 이겼군요."
카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젠장 몸이 이 상태가 되도록 싸웠단 말인가?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카밀의 몸은 성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던 가죽갑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그 아래에 있는 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젠장, 마나가 거의 떨어진 내 회복마법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카밀의 모습을 보니 예전에 시드와 엄마가 죽던 기억이 순간 떠올랐다. 이 녀석도 이렇게 보낼 순 없단 말이야! 그런데 순간 무의식 적으로 내 손이 피가 흘러내리는 녀석의 복부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Uar Pratanio, Hanur Ron Ssillsir, Hanur Secill Firu Noo Hanur Ron Uronty Is Hanur Mailuss Kirr Jur Qullriss. (자애로운 플라타니오시여, 그대의 아들이 간청하는 바이오니, 그대의 힘으로 지금 그대의 아들 앞에 있는 그대의 피조물의 아픔을 치유해 주소서.)"
내가 또다시 무의식 적으로 읊은 플라타니오어가 끝이 나자 내 손에서, 무척이나 깨끗한 흰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 카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마법을 쓰고 있음에도 오히려 내 몸에 마나가 더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카밀의 몸 구석 구석에 흰빛이 스며들며, 카밀의 몸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대, 대장."
대체 이 힘은? 설마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의 권능?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플라타니오신의 사제들은 어려운 사람을 치료하고 돕는데 평생을 바친다고 했었으니. 그런데 새삼 이 힘을 가진 것에 대해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 힘이 없었다면 잘못하다간 카밀이 죽었을지도 몰랐을테니.
난 정체모를 신비한 감정에 휩싸여 처음엔 아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미는 묵묵히 날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가 다가서자 아미는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아미의 머리를 짚자 또 다시 흰색의 빛이 뿜어져나와 아미를 감싸며, 아미의 상처역시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꼭 내 자신이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 뭔가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미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의식.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인 곳, 그런 어둠 속에서 난 혼자 서있었다. 도대체 이 곳은 어디지? 방금전까지 요새의 지하에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어떤 존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란트 크리센, 빛의 뜻을 이은자여."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난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소리가 들린 그 곳에는 방금 전까지의 어둠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밝은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척이나 밝은 빛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빛의 가운데에서 어렴풋이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우스 보다 훨씬 더 찬란히 빛나는 금발, 그리고 큰 키, 백색의 피부. 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외모를 가진 사람.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한눈에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모습 이상으로 왕자나 국왕이란 직책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정도로 여러 가지면에서 군주의 모습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왠지 익숙한 느낌과 모습.
"당신은 누구죠?"
난 이유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이며 그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그 맑은 녹색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날 살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맑은 녹색의 눈, 엄마의 눈과 무척이나 닮은 눈빛이었지만 무엇인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너이기도 하며, 또한 네가 아닌자."
무슨? 난 그의 황당한 대답에 그냥 멀뚱히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이기도 하며 또한 네가 아닌자?
"그리고 너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또한 미래인자."
저 사람이 말한 데로 저 사람이 나라면 그럼 난 뭐란 말인가란 의문이 순간 들었다.
"당신이 저라면, 그럼 지금 전 무엇인가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내 앞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녹색 눈을 응시하며 말을 했다.
"너는 나이기도 하며, 또한 내가 아닌자."
켁,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듣고 있었음에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거람. 정말.
"그리고 나의 뜻을 이었으며, 내가 짊어졌던 짐을 대신 짊어진자."
이번에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대답에 난 아무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하다 이 곳으로 오게 된 걸까? 황제는 이런 일이 생길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하긴 황제 역시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 테니.
그런데 내 앞에 있던 그가 내 어깨에 갑자기 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그리고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소년이여. 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된 과오. 하지만 그 것 역시 네가 짊어질 짐이요 운명인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이 또 다시 반복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때었다. 그리고 갑자기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빛과 어둠.
"주인님아! 무슨일이야?"
"으응?"
난 찬 바닥의 기운을 느끼며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주위의 모습은 요새 중앙 사령부의 지하. 그리고 앞에는 여전히 둥근색 원판이 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도 클라리가 내 몸을 잡아 주어 꼴사납게 완전히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은 듯 했다.
"주인님아,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아."
난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런 나를 잡아주는 클라리의 손길. 도대체 방금 그 이상한 환상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도대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꿈.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의 사람은 누구이길레,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였던 것일까? 너이며, 또한 네가 아닌 존재?
젠장, 그나저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방어막은 쳐졌더라도 일단 방어막 안 쪽에 들어온 적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요새의 동쪽에서는 한참 전투가 이루워지고 있는게 당연했고, 또한 방어막의 범위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니, 일단 그들을 도우러 가야했다. 단 한명의 희생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난 원판에서 옥새를 다시 뽑아 품속에 잘 챙겨 넣은 뒤, 클라리와 함께 방에서 빠져 나왔다. 우리가 나오자마자 벽은 다시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방어막을 해제하지 않는한 방어막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난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건물 밖으로 향했다. 정말 많이 고갈된 듯한 체력.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환각 때문인지, 방어막을 가동시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무척 피곤했다.
멀리 엄청난 규모의 마나의 벽이 생성된 것이 보였다. 정말 내가 가동시켰지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런 엄청난 규모의 방어막을 설치하려면 저 비슷한 규모의 마법진에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할텐데, 누가 저런 무모한 짓을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저 정도의 마나를 잘 갈무리해서 세계정복에 나서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말에 따르면, 저 막에 딸려있는 옵션도 굉장했다. 저 방어막 같은 경우에는 이오니스나 리투안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적의나 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통행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물론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무역이나 그런 비공격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이오니스 쪽으로 오는 것은 차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마법사지만 마법사라는 족속들의 정신상태를 한번 해부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순간 느끼며, 서쪽 성벽을 향해 땅에서 조금 뜬 상태로 날아갔다.
하늘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속도가 빨라졌겠지만 그 만큼 마나 소모량도 엄청나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정작 전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정말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뒤를 슬쩍 쳐다보니 클라리 역시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클라리 역시 상당한 수준의 마법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신체라는 점도 있었지만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때라든지 자신의 기운으로 수준급 검사들을 날려버린다던지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쩝.
성벽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조급함은 더욱더 커지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치솟고 있는 불길이라던지, 자욱한 먼지들의 모습, 그리고 불속성이나 얼음속성이 걸린 화살들이 날아 다니는 모습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잘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성문의 모습이 드디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 혹시나하고 내가 만들어놓았던 마법벽이 유지되고 있는지 그 쪽을 유심히 보았지만, 이미 성문 쪽에서는 내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이미 내가 만든 벽이 무너졌다는 말, 제발 아미하고 카밀 녀석들이 잘 버텨주고 있어야 하는데.
마나가 다해가는 까닭인지 내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생각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내 뒤에서 간신히 쫓아오기만 하던 클라리가 어느새 내 근처에서 날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쩝, 마나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는 정말 방법이 없겠군.
"클라리, 좀 도와줘."
내가 옆의 클라리를 보며 말을 하자 클라리는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말을했다.
"응? 뭐라고 했어? 주인님아?"
어휴, 내가 또 말을 해야 하는지 정말, 하지만 지금 아쉬운 것은 일단 나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도와달라고, 네 힘으로 내가 나는 것을 조금 보조해 줄 수 있겠어?"
난 다급함 때문에 조금 급하게 클라리를 향해 말을 했다. 클라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흠, 알았어. 주인님아. 그 정도 일이라면."
클라리는 그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내 한쪽 팔을 잡더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속도를 내는 클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부탁하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나중에 클라리가 생색 낼 것을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다가감에 따라 왠지 서서히 분위기가 사그라들고 있는 것 같았다. 전투가 서서히 끝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적들이 이 곳까지 치고 들어오지는 않는 것으로 볼 때, 일단 우리 쪽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었다. 성문 쪽도 아직 뚫리지 않은 것 같았고.
성문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성문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싼체 싸우고 있는 일단의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컥, 그런데 잠깐. 그 전투의 중심에서 싸우고 있는 카밀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채로 엄청난 덩치의 녀석과 싸우고 있었다. 아미 역시, 카밀 만큼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옷이 잘려나간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카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디가 다친 듯, 그 덩치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젠장.
"클라리 조금만 더 빨리. 안되겠어?"
난 클라리를 향해 급히 재촉하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클라리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한체 내게 답을 했다.
"어쩔 수 없어. 주인님아. 이게 최고속도야."
젠장, 그 덩치의 커다란 쇠망치가 몇번이나 카밀을 스쳐 땅에 박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역시 카밀은 몸상태가 좋지 않은 듯, 녀석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기만 하고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밀, 제발 조금만 더 버텨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아온 나였지만 왠지 저 녀석이 죽거나 하는 것은 정말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카밀이 발을 무언가에 걸렸는지 발을 헛디디며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클라리의 손을 뿌리친 다음 마나를 폭발시키듯 하여 녀석의 상대 앞으로 뛰어들었다. 제발. 내가 늦지 않았기를.
'챙'
클라리와 녀석의 쇠망치가 충돌하는 소리. 순간 통증과 함께 엄청난 압력이 내 몸에 전해졌지만, 어쨌든 녀석의 둔한 움직임 덕택에 간신히 녀석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대, 대장."
뒤에서 들리는 카밀의 목소리, 휴. 다행이었다. 정말.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이 날뻔 했다. 이 점에서는 클라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웨, 웬 꼬마녀석이냐?"
내 앞에 있던 녀석은 조금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날 쳐다보며 말을 했다. 엄청난 덩치, 내가 아까 환상 속에 보았던 그 남자보다도 더 큰데다 덩치도 거의 오우거 수준인 남자가 갑옷을 입고 있으니, 정말 거대했다.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힘은 확실히 강한 것 같았다.
"제국 서열 5위, 남파나단 자치령주 란트 크리센."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은 왜 일까? 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켁, 당,당신이 그, 그 백합의 기사란 말이오?"
하지만 난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채 그대로 녀석의 쇠망치를 밀어낸 다음 녀석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무언가 당황한 까닭인지 녀석의 몸놀림이 아까 전에 카밀과 싸울 때보다 둔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의 허벅지를 노린 내 처음 공격을 녀석은 그 거대한 몸을 뒤로 물러서며 간신히 막아내었다. 하지만 난 내 공격이 막히자마자 곧바로 조금 뒤로 물러선 다음 녀석의 사각을 향해 움직였다. 녀석이 내 움직임을 놓친 순간, 난 그대로 뛰어올라 녀석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투구가 그대로 쪼개졌다. 그리고 녀석은 자신의 쇠망치를 떨어뜨리며 뒤로 쓰러져 버렸다.
이미 전투는 거의 끝난 상태, 난 녀석이 쓰러지자 마자, 카밀을 향해 달려갔다. 카밀은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카밀이 쓰러진 곳 주위에는 이미 피가 흥건했다.
"대, 대장. 이겼군요."
카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젠장 몸이 이 상태가 되도록 싸웠단 말인가?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카밀의 몸은 성한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던 가죽갑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그 아래에 있는 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젠장, 마나가 거의 떨어진 내 회복마법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카밀의 모습을 보니 예전에 시드와 엄마가 죽던 기억이 순간 떠올랐다. 이 녀석도 이렇게 보낼 순 없단 말이야! 그런데 순간 무의식 적으로 내 손이 피가 흘러내리는 녀석의 복부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Uar Pratanio, Hanur Ron Ssillsir, Hanur Secill Firu Noo Hanur Ron Uronty Is Hanur Mailuss Kirr Jur Qullriss. (자애로운 플라타니오시여, 그대의 아들이 간청하는 바이오니, 그대의 힘으로 지금 그대의 아들 앞에 있는 그대의 피조물의 아픔을 치유해 주소서.)"
내가 또다시 무의식 적으로 읊은 플라타니오어가 끝이 나자 내 손에서, 무척이나 깨끗한 흰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 카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마법을 쓰고 있음에도 오히려 내 몸에 마나가 더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카밀의 몸 구석 구석에 흰빛이 스며들며, 카밀의 몸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대, 대장."
대체 이 힘은? 설마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의 권능?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플라타니오신의 사제들은 어려운 사람을 치료하고 돕는데 평생을 바친다고 했었으니. 그런데 새삼 이 힘을 가진 것에 대해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 힘이 없었다면 잘못하다간 카밀이 죽었을지도 몰랐을테니.
난 정체모를 신비한 감정에 휩싸여 처음엔 아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미는 묵묵히 날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가 다가서자 아미는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아미의 머리를 짚자 또 다시 흰색의 빛이 뿜어져나와 아미를 감싸며, 아미의 상처역시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꼭 내 자신이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 뭔가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미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