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1장 끝없는 여정(1)
푸른바람 BlueWind·2002. 12. 26. PM 9:09:31·조회 2316·추천 82
에피소드 70 끝없는 여정-1
넓은 들판의 곳곳에는 불에 타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듯 검은 재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쓰러져 있는 타다 남은 검은 색의 나무 그루터기 사이로 곳곳에 인간과 엘프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격렬한 전쟁의 흔적, 난 그 곳에서 피에 절은 옷을 입은 채 홀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피가 가득한 금빛 검을 들고서. 처참한 광경, 피 냄새와 나무타는 냄새가 뒤섞인 유쾌하지 못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꼭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가요? 리안?"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원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난 뒤로 돌아보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이 몸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것 역시 꿈인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내 마음이 무척이나 아파왔다.
"애나, 인간들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오. 그리고 난 그들을 대표하는 그들의 군주요.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소."
하지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을 연 난 아픈 본 마음을 감추곤 무뚝뚝한 차가운 목소리로 여자의 말에 답을 했다. 그러나 답을 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우리 엘프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저 역시 알고 있어요. 천여년의 세월동안 죄 없는 인간들의 목숨을 많이 앗아갔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 역시 피로서 그 것을 되 갚아야 했었나요?"
날 질책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고 여전히 전투의 흔적으로 뒤덮인 들판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 잠시후 입을 열고는 여자에게 답을 했다.
"복수가 아닌,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소. 애나.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을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소. 센과 나 둘 중의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마 끝나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하며 난 한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아주 가냘픈 팔이 날 뒤에서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따스함.
"제발, 리안. 당신과 오라버니가 싸우는 모습을 더 이상보고 싶지 않아요."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 난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날 껴안은 여인의 여린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이 감정, 안타까운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 미안하오. 애나."
"흐, 흠."
난 깨질듯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또 무엇인가 중요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휴, 그나저나 내가 언제 침대로 옮겨진 걸까? 아무래도 밤인 까닭인지 주위가 무척 어두웠지만, 밑에서 느껴지는 푹신푹신한 느낌이 침대인 것 같았다. 난 조심스럽게 마법을 써서 방을 밝혔다. 이 전에도 한동안 누워서 지냈었던 까닭인지 꽤 익숙해진 방, 아무래도 이오니스 성에서 내가 머물던 방인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던 건가? 이오니스 성으로 옮겨지는 것도 몰랐다니. 그리고 침대 옆에는 언제나처럼 클라리가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클라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쓰러졌다 깨어났음에도 전과는 달리 그렇게 몸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직접적으로 몸에 충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마나 역시 충분히 있었고, 하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갈수록 회복력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의자에서 졸고있는 클라리를 들어 침대 위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주었다. 며칠간 또 날 간호하느라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느끼는 점이었지만 클라리의 자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냥 예쁜 정도를 이미 넘어선 수준. 백금발의 머리 아래 드러난 뽀얀 피부, 그리고 평온한 얼굴 표정.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여신의 모습에 가까웠다. 난 클라리의 보드라운 볼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클라리가 조금 뒤척였기 때문에 난 클라리의 볼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땠다.
바람도 쐴 겸, 난 창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늦은 시간인 듯 이오니스 시내 전체가 조용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다만 성벽에 드문드문 경비병의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방어막이 성공적으로 설치가 되기는 된 까닭인지 그 경비병들의 불빛 역시 그리 수가 많지는 않았다. 이제 한시름 놓은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테네이오스에서 제국의 본토로 향하는 방법은 이오니스를 거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옛 그릭 연맹국중 하나였고 제국의 자치령중 하나인 마케이아를 통해 제국의 서부 대로로 진입하는 방법 역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테네이오스의 칼날은 당연히 마케이아를 향할 것이었고, 또한 이오니스에는 방어막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해상으로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었다. 뭐, 황제가 알아서 할텐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냐마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저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방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도 거의 다 꺼진 이 밤중에 누가 찾아왔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문 쪽으로 향했다. 일단 살기나 그런 별로 편치 않은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을 해서 손해볼 것은 없었으므로 일단 만약을 대비한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내 쪽으로 튀어 들어왔다. 헛, 분명 살기 같은 것은 없었는데 이게 무슨?
"란트, 깨어났구나! 몸은 괜찮은거니?"
잠깐 이 목소리는? 설마 황제가? 정신을 추스르고 내게로 돌진해와 날 껴안아버린 존재를 자세히 살피니,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빛 생머리, 그리고 허리에 찬 금빛 롱소드, 확실히 황제가 맞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큰 키와 큰 덩치의 한 남자는 추기경이었다. 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고귀한 두 분께서 같이 오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허허, 폐하. 두 분이 그런 사이셨습니까?"
추기경은 황제와 내 쪽을 보더니, 왠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켁, 저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인트 스승님의 귀에 저 소리가 들어가면 내가 편히 살아 남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힌 다음, 차분한 목소리를 일부러 유지한 채 추기경을 향해 이야기를 했다.
"추기경 예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순수하게 나이 차이만 봐도 서른 살 이상입니다."
추기경은 내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는 그냥 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내 몸을 꽉 껴안고 있던 것을 조금 풀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냥 내 양팔만 잡고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란트, 넌 이 누나가 그렇게 싫어?"
폐하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란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난 간신히 참고 그냥 아무 대답 없이 표시가 나지 않게 황제를 조금씩 내게서 떨쳐내기 위해 밀어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추기경과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 늦은 밤에 이 곳에 찾아온 걸까?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나이까? 폐! 하!"
난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여 예를 표하는 행세를 한 뒤, 일부러 폐하라는 단어에 액센트를 주어 황제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황제는 그냥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켁, 이 건 책에서 종종 보던 말썽꾸러기 아들에게 엄마가 행하는 공격인데. 쩝. 황제한테 당했군.
"허허허."
뒤에서 들려오는 추기경의 웃음소리가 내 감정을 더 자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내가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내게 조금 고개를 숙인 다음 황제 옆에 역시 앉았다. 쩝, 난 들어오란 소리도 안 했는데, 하긴 어쨌든 저 여자는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인 황제이니까. 이 방에 들어오는데 내 허락 따위가 필요할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난 눈에 힘을 준 채, 황제와 추기경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 상태가 좋은 것 같아 보이네? 란트."
황제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날 보며 이야기를 했다. 난 감정을 되도록 억누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생각을 해보니, 아무래도 황제 역시 스트레스가 무지 싸이긴 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황제가 방금 전과 같은 과도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예전에 수도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도 황제에게 수년간 누적된 스트레스의 폭발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하고 난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갈수록 회복력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쓰러진지 며칠이 지났죠?"
난 짧게 한숨을 내 쉰 뒤 황제를 향해 조금 맥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날 향해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띄운 것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했다.
"삼일 정도 지났어. 그런데 란트, 이번 작전 정말 대단했어. 네가 이끈 기습부대 중 사망자는 열명도 안돼, 그리고 천여명의 지원군 중에서도 죽은 사람은 스무명 정도밖에 없고,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황제는 자신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듯, 무엇인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열명도 안된다라. 그 말은 열명이나 가까운 사람과 엘프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과 틀리지 않았다. 쩝,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며 살아남은 녀석들인데 카밀 녀석들 중 몇 명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누군가 말했던가?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희생해도 된다고, 하지만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이었지만 그 말을 했던 사람 자신이 그 작은 것에 포함된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방어막은 성공적으로 펼쳐졌단 말이군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난 여전히 힘없이 황제를 향해 말을 했다. 그런데 황제가 내 감정을 알아차린 것일까? 황제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자, 기운 내렴. 란트. 진정한 통치자는 가끔씩 조금 무신경해질 필요성도 있단다. 물론, 그 희생을 잊으란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잃은 것 말고 얻은 것을 생각해보렴, 그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았니?"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날 한번 다시 살펴본 다음 입을 열어 말을 계속 이었다.
"진정한 통치자나 지휘관은 작은 희생에 머물러 좌절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희생을 줄여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나 역시 내 인생의 수십년을 바쳤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아. 그 희생으로 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황제는 조용히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옆의 추기경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운 채 묵묵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항상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황제, 그 모든 결론이 그녀의 현명한 두뇌와 수십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나오는 것일 것이다. 나도 황제의 나이가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왠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단순히 제 안부를 보기 위해 바쁘신 제국의 폐하께서 이 밤중에 찾아오시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난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을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차분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 날 보며 황제 역시 더욱 밝은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호호호, 아니, 아니야. 이 누나가 란트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흠, 부탁할게 하나 있기는 하지만 란트 네가 걱정되어 찾아온 거란다."
황제는 정색을 하며 다시 밝은 톤으로 어조를 바꾸고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 안부가 걱정된다기 보다는 그 목적 때문에 온 것이라는 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난 짧게 한숨을 내 쉰 뒤,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게 아니란 건 이마 알고 있으니 그냥 이야기하세요. 들어 드릴 테니."
내 말을 들은 황제는 헛기침을 몇 번한 다음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으음, 그럼 이야기할게. 일단 본론부터 말하자면 란트 네가 투르크훈국에 사신을 가줬으면 해."
"투르쿠훈이라면 사막국가를 말씀하시는게 아닌가요? 그런데 그 곳에 왜 저를 사신으로 보낸 다는 거죠?"
투르크훈은 사막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는 나라였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사막과 인접한 생활은 그 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게 하고 있었다. 종교는 아마 미탄젤을 믿고 있다고 읽은 것 같다. 그나저나 그 곳에 무슨 사신을?
"란트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오니스에 방어막을 설치한다고 아테네이오스와의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아마 그들의 칼끝은 이제 마케이아와 이스트레타니아를 향하겠지. 이제는 무엇인가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 이상 전쟁을 끝내긴 이제 힘들게 되었어. 게다가 지탄그의 침입도 이미 예정되어 있는데다, 북쪽엔 바이킹족이 피투안을 공격하고 있어. 피투안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바로 노스 트립톤이 되겠지. 삼십여년간 국력을 키워왔다고 해도 솔직히 지금의 우리로써는 적을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절실해."
황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속의 심란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최고 통치자만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아픔이 그녀에게 있는 것이 당연했다. 최근 황제의 곁에서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며 그 사실은 너무나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투르크훈이 아테네이오스를 견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군요."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그래, 실제로 투르크훈과 아테네이오스의 사이는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어. 동부 대륙과의 교역에서 해양을 통한 교역이 중심인 아테네이오스와 육로 교통이 중심인 투르크훈은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지. 그런 투르크훈의 군대가 만약 아테네이오스의 본토를 향해 움직인다면, 그 들 역시 군대를 철수시키는 방법밖에 없을 거야."
흐흠, 그런 방법이 있었군. 뭐, 투르크훈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나 말고 다른 외교관을 보내도 되는게 아닌가?
"그럼 제가 꼭 갈 필요는 없지 않나요? 오히려 다른 뛰어난 외교관을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귀찮은 일을 떠 맏는 건 이제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황제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황제는 한숨을 내 쉰 뒤, 답을 했다.
"지금 투르크훈을 향한 모든 통로가 아테네이오스에 의해 차단되었어. 심지어는 해로까지도."
하긴, 아테네이오스 녀석들도 바보가 아닐테고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투르크 훈으로 가란 말이야? 설마 혼자서 적군을 뚫고 가란 것은 아니겠지. 난 그렇게 바보같이 죽고싶은 생각은 이제 정말 없었다.
"저라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하지만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답을 했다.
"아니, 방법이 있어. 란트 넌."
뭐, 외교적인 면에서 나라고 별 수가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는 추기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말투를 바꾸어 다시 말을 했다.
"추기경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방법과 추기경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동안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던 추기경은 황제 쪽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인 다음 내게 고개를 돌려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삼주 후, 테베에서 종교 총회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을 하던 중에 언데드들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회의에 참가하겠다는 이유라면, 아테네이오스 측도 우리를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께서도 그 회의에 참가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회의를 핑계되고 아테네이오스 진영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란 말이겠군.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테베가 아니라 투르크 훈이 되겠지. 아무리 전시라고 사제를 공격하지는 않을테니, 위험성도 많이 줄어들 것이었다. 난 추기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는 중립을 추구해야 되는게 아닌가? 하긴 나 역시 황제 편을 들고 있으니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추기경은 입장이 다를텐데, 쩝.
"하지만 아테니오스 측에서 제 얼굴을 알고 있는데 순순히 보내줄까요?"
그래, 그러고 보니, 아테네이오스 측에도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 숫자가 꽤 되었다. 그런 그들이라면 날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란트. 공식적으론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는 미카 크리센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래도 괜찮겠니? 란트."
켁, 잠깐 나보고 여장을 한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몇 달 동안 돌아다니란 말이야? 이 황제가 클라리에게 사주를 받았나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난 황당함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 같았다.
"제가 또 여장을 해란 말이에요? 그 것만은 절대 할 수 없어요."
내 대답에 황제는 난처한 표정을 한체 답을 했다. 훔, 누가 그런 표정을 한다고 넘어 갈 줄 아나?
"란트, 제발. 목소리를 조금 바꾸는 것 말고는 그렇게 여자행세를 할 필요는 없어. 사제복은 여자라고 특별히 다른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최고사제란 직위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야."
흐흠 안 되는 건 안되는거다. 부탁할게 따로있지. 하지만 솔직히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황제가 클라리처럼 가당찮은 소리를 하는 존재가 아닌데다, 내가 항상 투정을 부리곤 있지만 실제로 황제는 꼭 내가 해야만 하는일이 아니라면 내게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 한 예로, 이오니스에 온 뒤, 지원군을 맡으러 떠난 것을 제외하곤 내가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안돼요. 그것만은 절대로."
내가 고개를 저어 다시 한번 거부를 표시하자, 갑자기 황제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난 황제가 갑자기 왜 그러나 하는 생각에 황제를 쳐다보니, 황제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헛, 저 황제가 갑자기? 설마 클라리한테 배운건 아니겠지?
"란트, 제발. 제국의 수천만명의 목숨이 네게 달려있단다. 그리고 내 목숨까지도. 네가 가기 싫다면,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내가 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 누나가 죽어도 괜찮은 거니?"
황제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클라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면역이 잘 안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천만명의 목숨이라, 그에 대해서는 나역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수천만명은 조금 과장일지는 몰라도 수백만명의 목숨이 걸린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제국의 본토를 적들에게 공격당한다면 죽는 것은 병사들만이 아닐테니, 또 다시 수많은 약탈과, 살인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린 요새에서 보았던 민간인들의 시체와 불타버린 집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 사실이 절실히 가슴에 닿았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번 임무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받아낼테니. 그 것만 알고 개세요."
휴,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왠지 그랬다. 그런데 잠깐, 언젠가 비슷한 패턴을 겪었던 것 같은데, 아니겠지. 설마 내가 또 당했을 리가 없겠지.
"고마워, 란트.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 복은 내가 구해줄게."
황제는 눈물을 닦으며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지만 만약 저게 연기라면 클라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제는 대단한 연기자로써의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럼, 출발은 모레하기로 하겠습니다. 만약 최고사제께서 원하신다면 백명정도의 호위병은 대동하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백여명 정도는 끌고 다녀도 된단 말이지? 그렇다면 카밀 녀석들을 데려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다면 그 녀석들도 활동을 하지 않을테니까. 물론, 미카가 나라는 소리는 카밀에게 절대 할 수 없었다. 대장의 체면이 있지. 그냥 동생이라고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쩝.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청해서 몇 달동안 여자행세를 해야 된단 말인가? 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황제의 말처럼 더 높은 것을 위해서라니까 내가 이해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래저래 황제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찝찝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넓은 들판의 곳곳에는 불에 타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듯 검은 재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쓰러져 있는 타다 남은 검은 색의 나무 그루터기 사이로 곳곳에 인간과 엘프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격렬한 전쟁의 흔적, 난 그 곳에서 피에 절은 옷을 입은 채 홀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피가 가득한 금빛 검을 들고서. 처참한 광경, 피 냄새와 나무타는 냄새가 뒤섞인 유쾌하지 못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꼭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가요? 리안?"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원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난 뒤로 돌아보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이 몸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것 역시 꿈인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내 마음이 무척이나 아파왔다.
"애나, 인간들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오. 그리고 난 그들을 대표하는 그들의 군주요.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소."
하지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을 연 난 아픈 본 마음을 감추곤 무뚝뚝한 차가운 목소리로 여자의 말에 답을 했다. 그러나 답을 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우리 엘프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저 역시 알고 있어요. 천여년의 세월동안 죄 없는 인간들의 목숨을 많이 앗아갔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 역시 피로서 그 것을 되 갚아야 했었나요?"
날 질책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고 여전히 전투의 흔적으로 뒤덮인 들판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 잠시후 입을 열고는 여자에게 답을 했다.
"복수가 아닌,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소. 애나.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을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소. 센과 나 둘 중의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마 끝나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하며 난 한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아주 가냘픈 팔이 날 뒤에서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따스함.
"제발, 리안. 당신과 오라버니가 싸우는 모습을 더 이상보고 싶지 않아요."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 난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날 껴안은 여인의 여린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이 감정, 안타까운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 미안하오. 애나."
"흐, 흠."
난 깨질듯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또 무엇인가 중요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휴, 그나저나 내가 언제 침대로 옮겨진 걸까? 아무래도 밤인 까닭인지 주위가 무척 어두웠지만, 밑에서 느껴지는 푹신푹신한 느낌이 침대인 것 같았다. 난 조심스럽게 마법을 써서 방을 밝혔다. 이 전에도 한동안 누워서 지냈었던 까닭인지 꽤 익숙해진 방, 아무래도 이오니스 성에서 내가 머물던 방인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던 건가? 이오니스 성으로 옮겨지는 것도 몰랐다니. 그리고 침대 옆에는 언제나처럼 클라리가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클라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쓰러졌다 깨어났음에도 전과는 달리 그렇게 몸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직접적으로 몸에 충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마나 역시 충분히 있었고, 하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갈수록 회복력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의자에서 졸고있는 클라리를 들어 침대 위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주었다. 며칠간 또 날 간호하느라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느끼는 점이었지만 클라리의 자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냥 예쁜 정도를 이미 넘어선 수준. 백금발의 머리 아래 드러난 뽀얀 피부, 그리고 평온한 얼굴 표정.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여신의 모습에 가까웠다. 난 클라리의 보드라운 볼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클라리가 조금 뒤척였기 때문에 난 클라리의 볼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땠다.
바람도 쐴 겸, 난 창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늦은 시간인 듯 이오니스 시내 전체가 조용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다만 성벽에 드문드문 경비병의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방어막이 성공적으로 설치가 되기는 된 까닭인지 그 경비병들의 불빛 역시 그리 수가 많지는 않았다. 이제 한시름 놓은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테네이오스에서 제국의 본토로 향하는 방법은 이오니스를 거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옛 그릭 연맹국중 하나였고 제국의 자치령중 하나인 마케이아를 통해 제국의 서부 대로로 진입하는 방법 역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테네이오스의 칼날은 당연히 마케이아를 향할 것이었고, 또한 이오니스에는 방어막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해상으로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었다. 뭐, 황제가 알아서 할텐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냐마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저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방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도 거의 다 꺼진 이 밤중에 누가 찾아왔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문 쪽으로 향했다. 일단 살기나 그런 별로 편치 않은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을 해서 손해볼 것은 없었으므로 일단 만약을 대비한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내 쪽으로 튀어 들어왔다. 헛, 분명 살기 같은 것은 없었는데 이게 무슨?
"란트, 깨어났구나! 몸은 괜찮은거니?"
잠깐 이 목소리는? 설마 황제가? 정신을 추스르고 내게로 돌진해와 날 껴안아버린 존재를 자세히 살피니,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빛 생머리, 그리고 허리에 찬 금빛 롱소드, 확실히 황제가 맞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큰 키와 큰 덩치의 한 남자는 추기경이었다. 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고귀한 두 분께서 같이 오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허허, 폐하. 두 분이 그런 사이셨습니까?"
추기경은 황제와 내 쪽을 보더니, 왠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켁, 저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인트 스승님의 귀에 저 소리가 들어가면 내가 편히 살아 남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힌 다음, 차분한 목소리를 일부러 유지한 채 추기경을 향해 이야기를 했다.
"추기경 예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순수하게 나이 차이만 봐도 서른 살 이상입니다."
추기경은 내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는 그냥 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내 몸을 꽉 껴안고 있던 것을 조금 풀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냥 내 양팔만 잡고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란트, 넌 이 누나가 그렇게 싫어?"
폐하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란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난 간신히 참고 그냥 아무 대답 없이 표시가 나지 않게 황제를 조금씩 내게서 떨쳐내기 위해 밀어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추기경과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 늦은 밤에 이 곳에 찾아온 걸까?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나이까? 폐! 하!"
난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여 예를 표하는 행세를 한 뒤, 일부러 폐하라는 단어에 액센트를 주어 황제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황제는 그냥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켁, 이 건 책에서 종종 보던 말썽꾸러기 아들에게 엄마가 행하는 공격인데. 쩝. 황제한테 당했군.
"허허허."
뒤에서 들려오는 추기경의 웃음소리가 내 감정을 더 자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내가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내게 조금 고개를 숙인 다음 황제 옆에 역시 앉았다. 쩝, 난 들어오란 소리도 안 했는데, 하긴 어쨌든 저 여자는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인 황제이니까. 이 방에 들어오는데 내 허락 따위가 필요할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난 눈에 힘을 준 채, 황제와 추기경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 상태가 좋은 것 같아 보이네? 란트."
황제는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날 보며 이야기를 했다. 난 감정을 되도록 억누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생각을 해보니, 아무래도 황제 역시 스트레스가 무지 싸이긴 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황제가 방금 전과 같은 과도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예전에 수도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도 황제에게 수년간 누적된 스트레스의 폭발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하고 난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갈수록 회복력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쓰러진지 며칠이 지났죠?"
난 짧게 한숨을 내 쉰 뒤 황제를 향해 조금 맥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날 향해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띄운 것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했다.
"삼일 정도 지났어. 그런데 란트, 이번 작전 정말 대단했어. 네가 이끈 기습부대 중 사망자는 열명도 안돼, 그리고 천여명의 지원군 중에서도 죽은 사람은 스무명 정도밖에 없고,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황제는 자신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듯, 무엇인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열명도 안된다라. 그 말은 열명이나 가까운 사람과 엘프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과 틀리지 않았다. 쩝,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며 살아남은 녀석들인데 카밀 녀석들 중 몇 명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누군가 말했던가?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희생해도 된다고, 하지만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이었지만 그 말을 했던 사람 자신이 그 작은 것에 포함된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방어막은 성공적으로 펼쳐졌단 말이군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난 여전히 힘없이 황제를 향해 말을 했다. 그런데 황제가 내 감정을 알아차린 것일까? 황제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자, 기운 내렴. 란트. 진정한 통치자는 가끔씩 조금 무신경해질 필요성도 있단다. 물론, 그 희생을 잊으란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잃은 것 말고 얻은 것을 생각해보렴, 그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았니?"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날 한번 다시 살펴본 다음 입을 열어 말을 계속 이었다.
"진정한 통치자나 지휘관은 작은 희생에 머물러 좌절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희생을 줄여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나 역시 내 인생의 수십년을 바쳤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아. 그 희생으로 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황제는 조용히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옆의 추기경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운 채 묵묵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항상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황제, 그 모든 결론이 그녀의 현명한 두뇌와 수십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나오는 것일 것이다. 나도 황제의 나이가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왠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단순히 제 안부를 보기 위해 바쁘신 제국의 폐하께서 이 밤중에 찾아오시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난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을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차분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 날 보며 황제 역시 더욱 밝은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호호호, 아니, 아니야. 이 누나가 란트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흠, 부탁할게 하나 있기는 하지만 란트 네가 걱정되어 찾아온 거란다."
황제는 정색을 하며 다시 밝은 톤으로 어조를 바꾸고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 안부가 걱정된다기 보다는 그 목적 때문에 온 것이라는 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난 짧게 한숨을 내 쉰 뒤,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게 아니란 건 이마 알고 있으니 그냥 이야기하세요. 들어 드릴 테니."
내 말을 들은 황제는 헛기침을 몇 번한 다음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으음, 그럼 이야기할게. 일단 본론부터 말하자면 란트 네가 투르크훈국에 사신을 가줬으면 해."
"투르쿠훈이라면 사막국가를 말씀하시는게 아닌가요? 그런데 그 곳에 왜 저를 사신으로 보낸 다는 거죠?"
투르크훈은 사막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는 나라였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사막과 인접한 생활은 그 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게 하고 있었다. 종교는 아마 미탄젤을 믿고 있다고 읽은 것 같다. 그나저나 그 곳에 무슨 사신을?
"란트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오니스에 방어막을 설치한다고 아테네이오스와의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아마 그들의 칼끝은 이제 마케이아와 이스트레타니아를 향하겠지. 이제는 무엇인가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 이상 전쟁을 끝내긴 이제 힘들게 되었어. 게다가 지탄그의 침입도 이미 예정되어 있는데다, 북쪽엔 바이킹족이 피투안을 공격하고 있어. 피투안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바로 노스 트립톤이 되겠지. 삼십여년간 국력을 키워왔다고 해도 솔직히 지금의 우리로써는 적을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절실해."
황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속의 심란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최고 통치자만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아픔이 그녀에게 있는 것이 당연했다. 최근 황제의 곁에서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며 그 사실은 너무나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투르크훈이 아테네이오스를 견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군요."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그래, 실제로 투르크훈과 아테네이오스의 사이는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어. 동부 대륙과의 교역에서 해양을 통한 교역이 중심인 아테네이오스와 육로 교통이 중심인 투르크훈은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지. 그런 투르크훈의 군대가 만약 아테네이오스의 본토를 향해 움직인다면, 그 들 역시 군대를 철수시키는 방법밖에 없을 거야."
흐흠, 그런 방법이 있었군. 뭐, 투르크훈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나 말고 다른 외교관을 보내도 되는게 아닌가?
"그럼 제가 꼭 갈 필요는 없지 않나요? 오히려 다른 뛰어난 외교관을 보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귀찮은 일을 떠 맏는 건 이제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황제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황제는 한숨을 내 쉰 뒤, 답을 했다.
"지금 투르크훈을 향한 모든 통로가 아테네이오스에 의해 차단되었어. 심지어는 해로까지도."
하긴, 아테네이오스 녀석들도 바보가 아닐테고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투르크 훈으로 가란 말이야? 설마 혼자서 적군을 뚫고 가란 것은 아니겠지. 난 그렇게 바보같이 죽고싶은 생각은 이제 정말 없었다.
"저라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하지만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답을 했다.
"아니, 방법이 있어. 란트 넌."
뭐, 외교적인 면에서 나라고 별 수가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는 추기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말투를 바꾸어 다시 말을 했다.
"추기경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방법과 추기경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동안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던 추기경은 황제 쪽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인 다음 내게 고개를 돌려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삼주 후, 테베에서 종교 총회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을 하던 중에 언데드들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회의에 참가하겠다는 이유라면, 아테네이오스 측도 우리를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께서도 그 회의에 참가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회의를 핑계되고 아테네이오스 진영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란 말이겠군.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테베가 아니라 투르크 훈이 되겠지. 아무리 전시라고 사제를 공격하지는 않을테니, 위험성도 많이 줄어들 것이었다. 난 추기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는 중립을 추구해야 되는게 아닌가? 하긴 나 역시 황제 편을 들고 있으니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추기경은 입장이 다를텐데, 쩝.
"하지만 아테니오스 측에서 제 얼굴을 알고 있는데 순순히 보내줄까요?"
그래, 그러고 보니, 아테네이오스 측에도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 숫자가 꽤 되었다. 그런 그들이라면 날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란트. 공식적으론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는 미카 크리센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래도 괜찮겠니? 란트."
켁, 잠깐 나보고 여장을 한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몇 달 동안 돌아다니란 말이야? 이 황제가 클라리에게 사주를 받았나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난 황당함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 같았다.
"제가 또 여장을 해란 말이에요? 그 것만은 절대 할 수 없어요."
내 대답에 황제는 난처한 표정을 한체 답을 했다. 훔, 누가 그런 표정을 한다고 넘어 갈 줄 아나?
"란트, 제발. 목소리를 조금 바꾸는 것 말고는 그렇게 여자행세를 할 필요는 없어. 사제복은 여자라고 특별히 다른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최고사제란 직위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야."
흐흠 안 되는 건 안되는거다. 부탁할게 따로있지. 하지만 솔직히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황제가 클라리처럼 가당찮은 소리를 하는 존재가 아닌데다, 내가 항상 투정을 부리곤 있지만 실제로 황제는 꼭 내가 해야만 하는일이 아니라면 내게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 한 예로, 이오니스에 온 뒤, 지원군을 맡으러 떠난 것을 제외하곤 내가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안돼요. 그것만은 절대로."
내가 고개를 저어 다시 한번 거부를 표시하자, 갑자기 황제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난 황제가 갑자기 왜 그러나 하는 생각에 황제를 쳐다보니, 황제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헛, 저 황제가 갑자기? 설마 클라리한테 배운건 아니겠지?
"란트, 제발. 제국의 수천만명의 목숨이 네게 달려있단다. 그리고 내 목숨까지도. 네가 가기 싫다면,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내가 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 누나가 죽어도 괜찮은 거니?"
황제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클라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면역이 잘 안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천만명의 목숨이라, 그에 대해서는 나역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수천만명은 조금 과장일지는 몰라도 수백만명의 목숨이 걸린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제국의 본토를 적들에게 공격당한다면 죽는 것은 병사들만이 아닐테니, 또 다시 수많은 약탈과, 살인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린 요새에서 보았던 민간인들의 시체와 불타버린 집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 사실이 절실히 가슴에 닿았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번 임무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받아낼테니. 그 것만 알고 개세요."
휴,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왠지 그랬다. 그런데 잠깐, 언젠가 비슷한 패턴을 겪었던 것 같은데, 아니겠지. 설마 내가 또 당했을 리가 없겠지.
"고마워, 란트.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 복은 내가 구해줄게."
황제는 눈물을 닦으며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지만 만약 저게 연기라면 클라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제는 대단한 연기자로써의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럼, 출발은 모레하기로 하겠습니다. 만약 최고사제께서 원하신다면 백명정도의 호위병은 대동하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백여명 정도는 끌고 다녀도 된단 말이지? 그렇다면 카밀 녀석들을 데려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다면 그 녀석들도 활동을 하지 않을테니까. 물론, 미카가 나라는 소리는 카밀에게 절대 할 수 없었다. 대장의 체면이 있지. 그냥 동생이라고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쩝.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청해서 몇 달동안 여자행세를 해야 된단 말인가? 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황제의 말처럼 더 높은 것을 위해서라니까 내가 이해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래저래 황제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찝찝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