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1장 끝없는 여정(3)

푸른바람 BlueWind·2003. 1. 2. PM 5:02:47·조회 2110·추천 63
에피소드 72 끝없는 여정-3


20여일 동안 닫혀있었던 거대한 이오니스 성의 북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중으로 된 성문 중, 철문이 먼저 올라갔다. 그리고 그 뒤, 깊게 파여진 해자 위로 나무로 된 목재 문이 내려졌다. 이게 모두 방어막의 설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방어막이 설치되지 않았다면, 아테네이오스 녀석들이 공격할 가능성 때문에 적의 본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북문을 여는 일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성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는다면 수문을 이용한다거나 아니면 비밀 통로 같은 것을 활용하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이 완전히 내려감에 따라, 유하네리스의 연녹색 바탕에 독수리 문양이 수놓인 깃발과, 흰색 바탕에 금빛으로 별문양이 수놓인 플라타니오를 나타내는 깃발을 든 병사를 선두로 약 백여명의 행렬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의 중앙 오른쪽에는 추기경의 마차가, 그리고 행렬 중앙의 왼쪽에는 황제가 특별히 구해준 내가 탄 플라타니오 최고사제용 마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차의 위치에 맞추어 행렬의 왼쪽에는 흰색의 천으로 만든 제복을 입은 카밀 녀석들이 있었고, 행렬의 오른쪽에는 유하네리스 신전의 복사들이 연두빛의 계열의 제복을 입은 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밀 녀석들도 깨끗한 제복을 입혀 놓으니 꽤 폼이 나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카밀 녀석이 부하들에게 뭐라고 귀뜸이라도 했었는지 녀석들 모두 오늘은 평소의 그 헝클어진 머리나 지저분하던 모습과는 달리 꽤 단정한 복장으로 있었다. 흠, 그리고 마차의 바로 앞에는 어색하게나마 플라타니오 성기사의 복장을 한 카밀 녀석이 백마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추기경의 마차 앞에는 유하네리스 신성기사단의 복장을 한, 헤리탄인가 하는 그 전사가 갈 빛의 말을 타고 있었다. 두 명 모두 실제 기사란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히 제대로 꾸며놓고 보니, 그런 대로 모양새가 나는 것 같았다. 훗.

난 마차에서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되도록 바른 자세를 유지해서 앉아 있었다. 특히,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여러 가지 면에서 꾸밀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녀석들의 본진을 통과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방어막이 설치된 뒤, 며칠 후에 수만에 이르는 병사들 중, 대부분은 철수했지만 아직도 수천의 병력은 이오니스 성의 주둔군을 견제하며 그 밖의 통로를 차단하려는 목적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피와 티티, 클라리에게도 내가 억지로 플라타니오 여 신관복을 입혀 놓았다. 물론 내 옷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세 명 모두 여 신관복을 입혀 놓으니 꽤 잘 어울렸다. 기본적인 교리 공부만 시켜놓으면 신관으로써의 활동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자애로운 신관의 이미지와는 성격상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본성격을 잘 들어내지 않는 존재들이니,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미에게도 흰색의 수호기사 옷을 입혀 놓았다. 등에 투핸드를 맨 여 수호기사라, 뭔가 이상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나 같은 놈이 최고 사제가 되는 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적들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그럴싸하게 꾸밀 필요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테네이오스시 내에도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플라타니오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니,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를 그렇게 홀대하지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녀석들 쪽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님아, 그런데 우리를 통과 시켜 줄까?"

클라리가 날 보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뭐, 오늘은 비상시에 아미를 출동시킨다는 각오까지 하고 왔으니, 정 안되면 피터지게 싸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수만이 아니라 수천이라면 어느 정도는 상대할 자신은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유하네리스의 복사들과 카밀 녀석들도 있으므로, 전멸시키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뚫고 지나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에 따르는 희생이 얼마나 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신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여전히 적응이 잘 되지 않는 내 목소리에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영주성 앞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있던 카밀 녀석들이 내가 나타나자 갑자기 환호를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었다. 게다가 녀석들 앞에서 이 목소리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라고 한마디를 했더니, 절반이 넘는 녀석들이 기겁을 하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녀석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만큼 비참해지는 느낌도 커졌다. 최소한 못생겼다는 소리는 듣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게다가 카밀 녀석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며,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서 내 앞에서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정말 이 상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적당히 놀려먹기에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이 모든게 내 운명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방어막 밖에 위치한 적들의 진형 쪽으로 다가가니, 녀석들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대열을 정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녀석들도 길을 중심으로 방어를 하다보니, 그렇게 많은 움직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돌발스러운 상황에 녀석들도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 흰색의 말을 탄 기사를 중심으로 수십여명의 기사들이 병사들의 대열 앞으로 오더니,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토의를 하는 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아미, 적들의 숫자는?"

난 만약을 대비해서 아미에게 물음을 던지자, 아미는 눈을 감더니 잠시 후에 답을 했다. 아마 내가 여장을 한 모습을 보면서도 가장 대우의 변함이 없는 것은 아미일 것이다. 하긴 성을 구별할 수 없는 드래곤의 시선에서 본다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 인간의 존재 자체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럴만도 했다.

"인간 삼천여명, 말 삼백여마리."

그 말은 기마병 삼백과 보병 이천 칠백이 있다는 말이겠군. 기마병들만 제거하면 녀석들을 뚫고 도망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아미에게 기병들의 움직임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주도록 부탁하며, 난 마법 몇가지 정도는 미리 캐스팅을 해뒀다.

이제 막 행렬의 제일 앞 깃발을 든 병사들이 방어막을 벗어나고 있었다. 난 긴장을 해서 녀석들의 움직임에 집중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살기 같은 것들은 그다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것 모두 녀석들의 함정일 수도 있으니, 일단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백여명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 무턱대고 부탁을 하기는 했지만 카밀 녀석들을 이런 일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왠지 죄책감을 느꼈다.

우리가 탄 마차도 서서히 방어막의 경계선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마차가 방어막을 통과하는 순간, 방어막에서 느껴지는 강한 마나의 압박감 때문에 순간 아찔할 지경이었다. 난 방어막을 7서클 마스터급 마법사들이 힘을 기울여 뚫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했었는데, 이 정도의 방어막이면 7서클 급 마법사들이 아니라, 내가 나서도 작은 구멍하나 만들기도 힘들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방어막을 설치해 놓은 걸까 하고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이 방어막을 만든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마나의 과용으로 인해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방어막을 만드는 순간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 방어막을 만든 존재는 엘프이거나 드래곤 또는 신이란 말이겠지.

"주인님아, 상대편 기사들이 무기를 들지 않고 이 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클라리의 말에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모두들 창이나 칼 같은 것들은 벗어 둔 채 우리쪽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최소한 공격할 의사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대열의 제일 앞인 깃발을 든 병사들 앞에 도달하자,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다가옴에 따라 헤리탄이란 전사와 카밀의 지휘 아래 우리측 병사들은 양쪽으로 갈라섰다. 물론, 상대가 눈치채지 않게 카밀 녀석들 모두의 손은 무기를 향해 있었다. 만약 기사들에게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카밀 녀석들은 바로 공격할 심산인 듯 했다. 녀석들 그래도 내 부탁이었다고, 미카란 존재에 대한 보호는 철저히 하려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무엇인가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지만,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질 것 같다는 예감에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다가옴에 따라 난 대충 추기경이 내리는 것에 맞추어 뒤에 클라리 일당을 대동한 다음 마차에서 내렸다. 후후, 오늘 이런 일이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어제 회의에 참가할 때와는 달리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며칠간 그렇게 추기경을 비롯한 클라리 일당의 도움을 받아 연습을 했는데 잘 될 수 있을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 사제님. 사제님께서도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로써의 정식 칭호를 정하셔야 합니다."

어제 밤에 회의가 끝나고 내 방으로 찾아온 추기경의 말에 난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식 최고사제라면 본이름 이외에 칭호를 가져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황제나 국왕이 아명과 등극 후 정식 칭호가 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름 하나 더 붙인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최고사제로써 정식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확신 같은 것과, 새로운 신분에 대한 자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외 선전용시 써먹기 위해 칭호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한다고 하다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정해야 하나요? 추기경."

추기경은 아직도 내 목소리에 적응이 안되었는지 조금 멈칫한 후에 날 보며, 말을 했다. 휴.  

"아무래도 최고 사제님께서 직접 정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정 자신이 없으시면, 역대 최고 사제님들의 이름 중 마음에 드시는 것을 하나 고르셔도 무난할 것 같습니다."

난 추기경의 말에 노란색 테두리의 책을 꺼내 맨 뒷장을 펼쳤다. 그 곳에는 역대 최고사제의 이름이 순서대로 빼곡이 적혀 있었다. 흐흠, 그러고 보니 제일 위에 적혀 있는 사람은 왠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리안타니우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도 아틀란티스 제국의 초대 황제의 이름이었다. 잠깐, 예전에 플라타니오가 아틸란티스의 수호신이었다고 본다면, 고대에는 신정일치가 기본이었을 것이므로, 이 곳에 적혀있는 인물들 중 실제 아틸란티스 제국의 황제였던 사람도 상당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흐흠. 황제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아틸란티스 제국의 초기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하던데, 이 것만으로도 꽤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나저나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 그런데 한참동안이나 역대 최고사제들의 이름을 살펴보던 도중 한 이름에서 눈이 멈췄다.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이름, 하지만 머릿속은 안개가 가득한 듯 흐리멍텅해져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왠지 찝찝한 느낌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라네티스"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무의식 적으로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금테표지의 성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 최고사제의 이름들이 나열된 것들 중 제일 마지막의 빈자리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35대 라네티스 2세-

잠깐, 그렇다면 이 이름이 내 칭호란 말이야? 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조금 아까웠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이름에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추기경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흠, 그런데 갑자기 이 상황에서 어제의 그 일은 갑자기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하긴, 이 일도 꽤 신기한 일들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어제의 그 일은 일단 최소한 내가 최고사제로써 플라타니오 신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겠지? 그렇다면 도박에 가까운 오늘 이 일도 신이란 존재에게 한 번 의지를 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제일 앞에서 아까 백마를 타고 있었던, 그 기사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왠지 범상치 않았다. 스승님과 비슷한 붉은색 머리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것 말고도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확실히 평범한 기사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두른 자줏빛 망토와 갑옷에 새겨진 방패무늬. 설마?

그 기사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그의 행동을 따라 일제히 무릎을 꿇는 그의 뒤에 있는 스무명의 기사들. 엘리트, 엘리트였다. 기사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한 눈에 기사들 모두가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만약 저들이 공격을 해온다면 아무리 카밀 녀석들이라고 해도 쉽게 막아내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테네이오스 국왕 페리클레스 6세. 두 고귀한 분께 인사올립니다."

세상에! 아테네이오스 국왕은 그 들의 본군과 함께 마케이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나? 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존재가 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서부대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란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헛, 그런데 정말,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국왕이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비무장인 상태로 무장을 한 적진에서 온 병사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정말 뜻밖이었다. 배짱도 배짱일뿐더러, 때로는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그 융통성하며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생각하던 사악한 국왕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백성 위에 군림하려만 하는 어리석은 국왕들은 보통 쓸데없는 자존심에 휩싸여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것이 더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상황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못하곤 하였다.

그나저나 슬쩍 추기경의 눈치를 보니, 나부터 답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별의 뜻은 모든 이에게.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일지라도, 죄없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랍니다. 제 이름은 미카 크리센, 정식 칭호는 라네티스 2세. 135대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입니다."  

난 차분한 어조로 말을 했지만 이 전쟁을 일으켜서 아무 죄 없는 이들이 고통에 휩쓸리게 만든 것에 대한 원망의 뜻을 담아 내 앞에 있는 페리클레스 국왕에게 말을 했다. 내 칼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혔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왠지 모를 원망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페리클레스는 내 말의 뜻을 알았는지 모르는지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유하네리스의 축복이 대지에 빛을 주시길. 전 유하네리스 교단 소속 평화위원회장 추기경 요한 바울루스 입니다."

내 뒤를 이은 추기경은 특별한 말없이 간단히 답 인사와 자기 소개만 했다. 나와 추기경의 답인사가 끝이 나자 페리클레스 국왕은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인상적인 붉은 머릿결과 강한 의지를 품은 눈, 분명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이 전쟁, 왠지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날 쳐다보았다. 강한 눈빛, 흐흠.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전쟁터인 이 곳을 지나시려 하시는지요?"

페리클레스 국왕은 최대한 정중한 어투로 내게 이야기를 했지만, 실제 그 내용은 내가 그에게 던졌던 말처럼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그 뜻을 해석하자면, '뭐 때문에 여기 오고 난리냐? 이 곳에서는 아무도 지나치게 할 수 없다.' 란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 같았다.

"전 그 분의 지팡이일 뿐 그분의 의지가 향하는 곳을 어찌 인간이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그 분의 뜻."

난 최대한 최고 사제란 신분에 입각해서, 아무리 국왕일지라도 종교지도자에게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은 없다는 의미를 담아 이야기를 했다. 그나저나 저 늙은 추기경은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 조금 도움을 줬으면 하는 의미로 그를 보니, 아무래도 내게 모든 것을 맡겨놓을 작정인가 보다. 쩝.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예하."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답을 했다.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페리클레스 국왕 역시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용을 겸비한 국왕인 것 같았다. 으흠, 가장 비슷한 인물을 들라고 하면 황태자 녀석 정도일까? 하지만 이 국왕에게서는 황태자보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원숙함이 더 묻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본적인 능력은 황태자 녀석이 더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흐흠,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세인트 녀석의 변명을 지금 하고 있는 거야. 참.

"그럼 저희에게 길을 내 주시겠어요?"

어떻게 보면, 아무리 종교 지도자라 할지라도 국왕 앞에서는 당돌한 질문이었지만, 난 그냥 한번 밀어붙이기로 했다. 물론, 말투와 목소리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까 와는 달리 조금 부드럽게 해서 말을 했다.

"저희가 어찌 신의 대리인께서 가시는 길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병사들을 곧 길에서 철수시키겠습니다."

페리클레스 국왕은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휴, 전혀 예상치 못한 국왕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이 곳에서도 또 시대를 움직여 나가는 영웅 중 보았다는 사실에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과도 이야기할 기회를 가진다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네티스 예하.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혼란이 끝난 다음 한번쯤, 아테네이오스를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묘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날 향해 말을 한 뒤, 기사들을 이끌고 병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방금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 왠지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클라리가 갑자기 내게 다가오더니 귀에다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주인님, 정말 좋겠네. 또 주인님을 사모하는 남자가 한 명, 더 늘은 것 같아."

잠깐, 뭐라고? 방금 클라리의 이야기는? 설마 그럴 리가. 난 계속 저 녀석 부아만 치솟는 말만 했었었다. 게다가 저 국왕의 나이는 최소한 내 나이의 두 배 이상일 것인데 무슨? 난 당황함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서 마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날 쳐다보는 카밀 녀석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허험.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유일하게 하나 할 말이 있었다. 아이고, 내 신세야.



서부대륙을 움직이는 영웅 중 두 사람의 운명의 끈은 이렇게 스쳐지나갔다. 역사를 살펴볼 때, 페리클레스 6세가 란트 1세가 테베를 향하도록 허용한 것은 페리클레스 6세로써는 뼈아픈 실수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페리클레스 6세는 그 자신이 죽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지만. 이로 인해, 제국을 둘러싼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옛 영웅들과 새로운 영웅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여러 곳에서 자신만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