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1장 끝없는 여정(4)
푸른바람 BlueWind·2003. 1. 3. PM 1:47:46·조회 2016·추천 55
에피소드 73 끝없는 여정-4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테네이오스 국왕 페리클레스 6세와 대면할 수 있었던 까닭에 어찌됐건 아테네이오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겉으로는 허락하는 척하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르므로, 난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뭐,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의 비상경보망인 아미가 있으므로 그렇게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말이다.
유하네리스의 복사들은 신에대한 믿음이 강해서 그렇다고 해도, 카밀 녀석들은 역시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수천의 병사들 사이를 고작 백여명도 안돼는 병력으로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별다르게 위축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흰색의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카밀의 모습은 멋지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플라타니오 성기사복. 게다가 평소의 그 지저분했던 머리도 오늘은 정돈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 같았다.
"주인님아, 정말 잘했어.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 해낼 수가 있어? 꼭 오래 전부터 해오던 일을 한 것 같았어. 주인님이 말을 할 때, 왠지 경건한 기분까지 들더라니까. 예전의 주인님을 생각하면 정말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야."
마차에 오른 뒤, 들리는 클라리의 칭찬소리가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 사이에 이상한 단어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나저나 사람은 입은 옷에 따라 그 행동도 바뀌게 된다고 했던가? 플라타니오의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 때문인지, 생각 역시 그런 쪽으로 계속 향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수많은 죄과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리클레스 국왕에게 그런 소리를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위선자라 부른다면 할말은 없었다. 하지만, 실제 마음이 그런 것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클라리의 말처럼,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해왔던 일인 것 같다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계속 감도록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왠지 예전에 해본 적이 있는 것 처럼 익숙한걸."
여행을 떠난 뒤부터, 꼭 무엇인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을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왠지 기억의 한 곳이 지워져 버린 듯, 마음 속 무엇인가가 텅빈 듯한 느낌 역시 언제나 날 감싸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이유일까?
어느새 우리 행렬은 아테네이오스 병사들 사이를 거의 다 빠져 나오고 있었다. 휴 일단 이 곳에서는 공격할 의사는 없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마차의 뒤에 있는 창을 통해 슬쩍 뒤를 돌아보니, 우리를 배웅하려는 듯 페리클레스 6세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제국의 황제가 철혈여제 세레니안느 1세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그가 행하려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테네이오스가 서부대륙의 패권을 장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는 법, 지금 제국의 황제는 철혈여제 세레니안느 1세였고 아테네이오스의 국왕은 페리클레스 6세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전쟁이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뛰어난 인물들 사이의 대립,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피해는 그들 자신의 국민들이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씁쓸한 마음이 감돌았다.
병사들 사이를 벗어난 우리들은 속도를 높여 신성도시 테베를 향해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언데드와 싸울 때, 왜 추기경에게 호위병이 없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추기경과 그 호위 복사들이 만나려 했던 장소가 이오니스 유하네리스 신전이었다고 한다. 카밀 일행들의 걸음에 맞추어 그들 역시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확실히 그들도 보통 실력을 가진 존재들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추기경이 위원장으로 있는 평화위원회란 단체 자체가 오랜 시간 동안 이단 심판소의 흉악한 녀석들과 싸워왔던 집단이니 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소피, 티티, 그 옷이 불편하진 않아?"
무의식 적으로 '않니?'란 여자들이 쓰는 말이 나올 번 한 것을 간신히 억제하며 두 엘프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소피는 그냥 고개를 조금 흔든다음 얼굴이 빨갛게 되어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고, 역시 옆에 있던 티티가 답을 하였다.
"아니요. 란트. 고귀하신 창조신 플라타니오님의 신관복인 걸요? 진실을 아는 존재라면, 이 옷을 입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 할거예요."
흐흠. 그렇게까지 플라타니오 신이 대단한 신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흐흠, 최고 사제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무지하다는 사실에 플라타니오신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교리 공부를 했어도, 위대하신 플라타니오란 구절 같은 것을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그냥 수많은 신들 중 하나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창조신이었다니! 게다가 엘프들의 경우, 유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유하네리스 신을 일반적으로 따르는 편이었기 때문에, 다크엘프라고 해도 어쨌든 엘프인 티티에게 그런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이 더 더욱 그 사실의 신빙성을 덧붙여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미가 옷을 억지로 바꿔 입힘을 당했음에도 별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티티는 이렇게 흰색의 플라타니오 신관복을 입혀놓고 보니, 다크엘프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원래 피부도 다크엘프 답지 않게 꽤 흰편인데다가 머릿색도 잿빛과는 거리가 먼 청은발이었고 이제는 옷차림 역시 그러니 더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흐흠.
거리가 멀어지며 서서히 보이지 않는 아테네이오스 병사들의 모습, 그리고 페리클레스 6세가 탄 흰색의 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번 일처럼 별 어려움 없이 끝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쩝.
저녁 무렵, 우리는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은 텅 빈 상태, 조용한 적막이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케이아로 향하는 아테네이오스 군단을 피해 피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탈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로 불탄 흔적이 없고 문들이 모두 꼭꼭 잠겨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을 중앙의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나야 마차 안에서 자고, 카밀 녀석들이야 텐트를 치고 자는데 익숙해서 괜찮다고 하지만, 유하네리스 복사측 복사들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난 클라리가 큰솥과 함께 요리도구를 챙겨 우물가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마차에서 내렸다. 추기경의 마차에서도 추기경과 함께, 어제 보았던 그 드워프와 폭력마도사, 그리고 루이경과 이자벨이 내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일 처음 루이경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루이경도 눈치를 못 챈 것 같군.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똑같은 얼굴에 옷만 바꿔 입고, 머리와 눈썹정도만 조금 다듬었을 뿐인데도 날 제대로 알아보는 존재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할 일이었다.
"별 빛은 언제나 모두를 따스하게. 전 동엘프 족 수장, 루이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훗, 역시 엘프 족을 이끄는 수장 중의 하나가 아니랄까봐 플라타니오의 인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아까 페리클레스 6세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조금 고개를 숙이며, 답을 했다. 그런데 루이경도 내가, 정확히는 란트로써의 내가 플라타니오의 신성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루이는 내보고 별의 뜻이여란 호칭을 붙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되도록 그런 표시를 내지 않고 루이에게 답을 했다.
"숲이 사라질 그날까지 그들의 수호자도 영원하길.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루이를 향해 말을 했다. 하지만 그다지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엘프의 특성상 루이가 나와 란트를 동일인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되도록 루이랑 접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플라타니오의 최고사제의 옷은 디자인상 그다지 치마의 폭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난 종종 걸음 비슷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예전에 입던 여자 옷 중 드레스나 원피스는 폭 때문에 그렇게 머리를 아플 필요는 없었는데, 하긴 그 옷은 그 옷 나름대로 뾰족구두를 싫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문제는 여장이란 말이군. 큰 것을 위해서 나하나 희생하는 것이니 참아야지 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라도 위안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우물가로 다가가는 내 모습을 본 카밀 녀석이 말에서 급히 내린 다음 내 쪽을 향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오늘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라네티스님."
카밀 녀석은 평소의 녀석의 이미지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자세로 내게 인사를 했다. 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카밀 녀석을 놀려보자는 의미로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카밀에게 답을 했다.
"네, 카밀 경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여행을 할 수 있었어요. 카밀 경, 감사해요."
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밀에게 이야기를 하자, 카밀은 역시 어울리지도 않게 머뭇거리며 답을 하는 것이었다. 으, 어색해. 그러고 보니, 카밀도 이제 카밀경이 되겠군. 어쨌든 현재 존재하는 유일한 플라타니오신의 성기사이니까. 경이란 칭호를 붙일 자격은 충분했다.
"편안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카밀은 정말 어울리지도 않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 내게 고개를 숙인 다음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후훗, 카밀 녀석들도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쪽을 쳐다보며 싱긋 웃자 카밀 녀석들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거참. 내가 그렇게 여자 같이 생겼나? 어휴. 못살겠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 쉰 다음 추기경 쪽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추기경은 능청스럽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는 날 향해 그렇게 말을 할뿐이었다.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정말.
"이게 모두 추기경 예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언제나 정말 감사드립니다."
난 여전히 웃으며 말을 했지만, 추기경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속에 담긴 다른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추기경은 예의 황제가 곤란스러울 때 종종 그러듯 모르는 척 넘어가 버렸다. 난 짧게 한숨을 내 쉰 다음 클라리 일당과, 유하네리스 여신관 몇 명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며칠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고 있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일주일 안으로 테베시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적 병력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강가 쪽 길을 선택했다. 대륙의 중서부, 구 그릭 연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미르센티 강을 따라 행군을 해갔지만, 며칠간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론가 대피를 갔는지 이미 강가에 즐비하게 위치한 마을은 우리가 도착하는 족족 텅 비어있었다.
을씨년한 분위기의 빈 마을에 들어서는 것은 그 대상의 기분을 그다지 좋지 않게 하고 있었다. 오늘로써 5일 째, 이 정도면 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기대를 품고, 지도상에 꽤 큰 규모로 묘사되어 있는 마을을 향해 다가갔다.
이 번 여행, 내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얼떨결에 전쟁에 휩쓸리게 되며, 전쟁이란 것이 미치는 영향을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을 하고 있었다. 최전방의 전투 현장에서, 그리고 그 주변까지. 통치자가 되면, 가장 처음으로 해야 할 것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국민을 지켜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풍요롭게 나라를 가꾼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까.
"주인님아, 정말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이번 마을에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난 클라리가 며칠간의 지루한 여정, 아마 뭔가 사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사지를 못해 싸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클라리는 계속해서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히스테리의 주 공격 대상은 아무래도 만만한 나나 소피가 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선 이미지 관리를 하는 까닭인지 얌전히 있다 마차에만 타면, 그 히스테리를 그동안 싸였던 고마움과 정이 싹 날아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몰라, 사람이 없으면 또 어때서."
그리고 일일이 여자 목소리인 채로 내가 대구를 해 주다보니, 결국 내 스트레스가 더욱더 쌓여 가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지쳐 포기를 하고 이제는 클라리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뭐라고 하든 그냥 귀를 닫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난 클라리가 또 뭐라 말할까 걱정이되어 그냥 고개를 밖으로 돌려버렸다.
강가를 따라 가는 여행길은 눈을 심심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잔잔히 흘러가는 미르센티 강의 주위로 펼쳐진 강풍경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강이란 존재를 그다지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만 접했던 수많은 생물들의 모습도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 있었다. 정말, 지금 내가 맡은 임무만 아니었다면, 잠시 행열을 멈추고, 쉬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강물 위로, 며칠 전의 요새에서 벌였던 전투와 그리고 티베리우스 단장과 황제의 모습. 그리고 성에서 나오며 보았던 아테네이오스 국왕 페리클레스 6세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전쟁의 처참한 시체의 모습과 우리마을로 들어오던 난민들의 모습이 연결되며 왠지 기분이 씁쓸해졌다.
"인생은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며
또한 바람처럼 허무하게 흩어지네
대륙을 뒤덮는 영웅들의 수많은 발자취는
단지 대지에 핏자국만 남길 뿐이고
배신과 욕망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은 변화되어 간다.
끝없는 전란의 회오리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들에 핀 작은 들꽃과 밤하늘을 뒤덮는 작은 별 빛 뿐."
난 강물을 보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을 읊었다. 그 효과일까 투덜거리던 클라리의 목소리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마차 안에는 다만 마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날 향한 모두의 시선, 그 중에서도 특히 소피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소피도 노래를 꽤 잘 불렀었지?
"란트, 아니 라네티스 예하. 방금 그 시에 제가 곡을 붙여도 되나요?"
소피는 날 향해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흐흠? 난 소피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곤란하다는 표시를 했다.
"뭐, 그냥 갑자기 헛소리한 것뿐인데, 소피만 번거로워지지 않아?"
거부감이 드는 여자 목소리로 남자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 뭔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난 생각해 봤자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었으므로 그냥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에요. 정말 좋은 내용의 시인 것 같아요. 엘프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제가 한 번 붙여 볼게요."
결국 정말 오랜만에 적극적으로 나오는 소피에게 항복을 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야, 주인님 그런 곳에도 소질이 있었어? 그런데 꼭 늙은이 같아. 그런 내용의 시는 인생 다 살은 노인네들이 강가에 앉아서 낚시대 하나 드리운 체 읊는 내용 아니야? 이렇게 예쁜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사제님께서 지으실 만한 내용의 시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흐흠, 난 클라리의 말을 조용히 무시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창밖에 고개를 조금 내밀어 밖을 내다보니, 멀리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다행이군, 일단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인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테네이오스 국왕 페리클레스 6세와 대면할 수 있었던 까닭에 어찌됐건 아테네이오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겉으로는 허락하는 척하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르므로, 난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뭐,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의 비상경보망인 아미가 있으므로 그렇게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말이다.
유하네리스의 복사들은 신에대한 믿음이 강해서 그렇다고 해도, 카밀 녀석들은 역시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수천의 병사들 사이를 고작 백여명도 안돼는 병력으로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별다르게 위축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흰색의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카밀의 모습은 멋지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플라타니오 성기사복. 게다가 평소의 그 지저분했던 머리도 오늘은 정돈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 같았다.
"주인님아, 정말 잘했어.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 해낼 수가 있어? 꼭 오래 전부터 해오던 일을 한 것 같았어. 주인님이 말을 할 때, 왠지 경건한 기분까지 들더라니까. 예전의 주인님을 생각하면 정말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야."
마차에 오른 뒤, 들리는 클라리의 칭찬소리가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 사이에 이상한 단어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나저나 사람은 입은 옷에 따라 그 행동도 바뀌게 된다고 했던가? 플라타니오의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 때문인지, 생각 역시 그런 쪽으로 계속 향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수많은 죄과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리클레스 국왕에게 그런 소리를 하였던 것이다. 물론, 위선자라 부른다면 할말은 없었다. 하지만, 실제 마음이 그런 것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클라리의 말처럼,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해왔던 일인 것 같다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계속 감도록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왠지 예전에 해본 적이 있는 것 처럼 익숙한걸."
여행을 떠난 뒤부터, 꼭 무엇인가 예전에 겪었던 일들을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왠지 기억의 한 곳이 지워져 버린 듯, 마음 속 무엇인가가 텅빈 듯한 느낌 역시 언제나 날 감싸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이유일까?
어느새 우리 행렬은 아테네이오스 병사들 사이를 거의 다 빠져 나오고 있었다. 휴 일단 이 곳에서는 공격할 의사는 없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마차의 뒤에 있는 창을 통해 슬쩍 뒤를 돌아보니, 우리를 배웅하려는 듯 페리클레스 6세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제국의 황제가 철혈여제 세레니안느 1세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그가 행하려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테네이오스가 서부대륙의 패권을 장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는 법, 지금 제국의 황제는 철혈여제 세레니안느 1세였고 아테네이오스의 국왕은 페리클레스 6세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전쟁이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뛰어난 인물들 사이의 대립,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피해는 그들 자신의 국민들이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씁쓸한 마음이 감돌았다.
병사들 사이를 벗어난 우리들은 속도를 높여 신성도시 테베를 향해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언데드와 싸울 때, 왜 추기경에게 호위병이 없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추기경과 그 호위 복사들이 만나려 했던 장소가 이오니스 유하네리스 신전이었다고 한다. 카밀 일행들의 걸음에 맞추어 그들 역시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확실히 그들도 보통 실력을 가진 존재들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추기경이 위원장으로 있는 평화위원회란 단체 자체가 오랜 시간 동안 이단 심판소의 흉악한 녀석들과 싸워왔던 집단이니 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소피, 티티, 그 옷이 불편하진 않아?"
무의식 적으로 '않니?'란 여자들이 쓰는 말이 나올 번 한 것을 간신히 억제하며 두 엘프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소피는 그냥 고개를 조금 흔든다음 얼굴이 빨갛게 되어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고, 역시 옆에 있던 티티가 답을 하였다.
"아니요. 란트. 고귀하신 창조신 플라타니오님의 신관복인 걸요? 진실을 아는 존재라면, 이 옷을 입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 할거예요."
흐흠. 그렇게까지 플라타니오 신이 대단한 신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흐흠, 최고 사제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무지하다는 사실에 플라타니오신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교리 공부를 했어도, 위대하신 플라타니오란 구절 같은 것을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그냥 수많은 신들 중 하나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창조신이었다니! 게다가 엘프들의 경우, 유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유하네리스 신을 일반적으로 따르는 편이었기 때문에, 다크엘프라고 해도 어쨌든 엘프인 티티에게 그런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이 더 더욱 그 사실의 신빙성을 덧붙여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미가 옷을 억지로 바꿔 입힘을 당했음에도 별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티티는 이렇게 흰색의 플라타니오 신관복을 입혀놓고 보니, 다크엘프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원래 피부도 다크엘프 답지 않게 꽤 흰편인데다가 머릿색도 잿빛과는 거리가 먼 청은발이었고 이제는 옷차림 역시 그러니 더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흐흠.
거리가 멀어지며 서서히 보이지 않는 아테네이오스 병사들의 모습, 그리고 페리클레스 6세가 탄 흰색의 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번 일처럼 별 어려움 없이 끝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쩝.
저녁 무렵, 우리는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은 텅 빈 상태, 조용한 적막이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케이아로 향하는 아테네이오스 군단을 피해 피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탈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로 불탄 흔적이 없고 문들이 모두 꼭꼭 잠겨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을 중앙의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나야 마차 안에서 자고, 카밀 녀석들이야 텐트를 치고 자는데 익숙해서 괜찮다고 하지만, 유하네리스 복사측 복사들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난 클라리가 큰솥과 함께 요리도구를 챙겨 우물가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마차에서 내렸다. 추기경의 마차에서도 추기경과 함께, 어제 보았던 그 드워프와 폭력마도사, 그리고 루이경과 이자벨이 내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일 처음 루이경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루이경도 눈치를 못 챈 것 같군.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똑같은 얼굴에 옷만 바꿔 입고, 머리와 눈썹정도만 조금 다듬었을 뿐인데도 날 제대로 알아보는 존재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할 일이었다.
"별 빛은 언제나 모두를 따스하게. 전 동엘프 족 수장, 루이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훗, 역시 엘프 족을 이끄는 수장 중의 하나가 아니랄까봐 플라타니오의 인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아까 페리클레스 6세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조금 고개를 숙이며, 답을 했다. 그런데 루이경도 내가, 정확히는 란트로써의 내가 플라타니오의 신성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루이는 내보고 별의 뜻이여란 호칭을 붙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되도록 그런 표시를 내지 않고 루이에게 답을 했다.
"숲이 사라질 그날까지 그들의 수호자도 영원하길.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루이를 향해 말을 했다. 하지만 그다지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엘프의 특성상 루이가 나와 란트를 동일인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되도록 루이랑 접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플라타니오의 최고사제의 옷은 디자인상 그다지 치마의 폭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난 종종 걸음 비슷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예전에 입던 여자 옷 중 드레스나 원피스는 폭 때문에 그렇게 머리를 아플 필요는 없었는데, 하긴 그 옷은 그 옷 나름대로 뾰족구두를 싫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문제는 여장이란 말이군. 큰 것을 위해서 나하나 희생하는 것이니 참아야지 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라도 위안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우물가로 다가가는 내 모습을 본 카밀 녀석이 말에서 급히 내린 다음 내 쪽을 향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오늘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라네티스님."
카밀 녀석은 평소의 녀석의 이미지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자세로 내게 인사를 했다. 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카밀 녀석을 놀려보자는 의미로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카밀에게 답을 했다.
"네, 카밀 경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여행을 할 수 있었어요. 카밀 경, 감사해요."
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밀에게 이야기를 하자, 카밀은 역시 어울리지도 않게 머뭇거리며 답을 하는 것이었다. 으, 어색해. 그러고 보니, 카밀도 이제 카밀경이 되겠군. 어쨌든 현재 존재하는 유일한 플라타니오신의 성기사이니까. 경이란 칭호를 붙일 자격은 충분했다.
"편안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카밀은 정말 어울리지도 않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 내게 고개를 숙인 다음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후훗, 카밀 녀석들도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쪽을 쳐다보며 싱긋 웃자 카밀 녀석들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거참. 내가 그렇게 여자 같이 생겼나? 어휴. 못살겠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 쉰 다음 추기경 쪽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추기경은 능청스럽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는 날 향해 그렇게 말을 할뿐이었다.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정말.
"이게 모두 추기경 예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언제나 정말 감사드립니다."
난 여전히 웃으며 말을 했지만, 추기경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속에 담긴 다른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추기경은 예의 황제가 곤란스러울 때 종종 그러듯 모르는 척 넘어가 버렸다. 난 짧게 한숨을 내 쉰 다음 클라리 일당과, 유하네리스 여신관 몇 명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며칠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고 있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일주일 안으로 테베시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적 병력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강가 쪽 길을 선택했다. 대륙의 중서부, 구 그릭 연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미르센티 강을 따라 행군을 해갔지만, 며칠간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론가 대피를 갔는지 이미 강가에 즐비하게 위치한 마을은 우리가 도착하는 족족 텅 비어있었다.
을씨년한 분위기의 빈 마을에 들어서는 것은 그 대상의 기분을 그다지 좋지 않게 하고 있었다. 오늘로써 5일 째, 이 정도면 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기대를 품고, 지도상에 꽤 큰 규모로 묘사되어 있는 마을을 향해 다가갔다.
이 번 여행, 내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얼떨결에 전쟁에 휩쓸리게 되며, 전쟁이란 것이 미치는 영향을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을 하고 있었다. 최전방의 전투 현장에서, 그리고 그 주변까지. 통치자가 되면, 가장 처음으로 해야 할 것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국민을 지켜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풍요롭게 나라를 가꾼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까.
"주인님아, 정말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이번 마을에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난 클라리가 며칠간의 지루한 여정, 아마 뭔가 사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사지를 못해 싸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클라리는 계속해서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히스테리의 주 공격 대상은 아무래도 만만한 나나 소피가 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선 이미지 관리를 하는 까닭인지 얌전히 있다 마차에만 타면, 그 히스테리를 그동안 싸였던 고마움과 정이 싹 날아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몰라, 사람이 없으면 또 어때서."
그리고 일일이 여자 목소리인 채로 내가 대구를 해 주다보니, 결국 내 스트레스가 더욱더 쌓여 가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지쳐 포기를 하고 이제는 클라리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뭐라고 하든 그냥 귀를 닫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난 클라리가 또 뭐라 말할까 걱정이되어 그냥 고개를 밖으로 돌려버렸다.
강가를 따라 가는 여행길은 눈을 심심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잔잔히 흘러가는 미르센티 강의 주위로 펼쳐진 강풍경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강이란 존재를 그다지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만 접했던 수많은 생물들의 모습도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 있었다. 정말, 지금 내가 맡은 임무만 아니었다면, 잠시 행열을 멈추고, 쉬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강물 위로, 며칠 전의 요새에서 벌였던 전투와 그리고 티베리우스 단장과 황제의 모습. 그리고 성에서 나오며 보았던 아테네이오스 국왕 페리클레스 6세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전쟁의 처참한 시체의 모습과 우리마을로 들어오던 난민들의 모습이 연결되며 왠지 기분이 씁쓸해졌다.
"인생은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며
또한 바람처럼 허무하게 흩어지네
대륙을 뒤덮는 영웅들의 수많은 발자취는
단지 대지에 핏자국만 남길 뿐이고
배신과 욕망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은 변화되어 간다.
끝없는 전란의 회오리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들에 핀 작은 들꽃과 밤하늘을 뒤덮는 작은 별 빛 뿐."
난 강물을 보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을 읊었다. 그 효과일까 투덜거리던 클라리의 목소리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마차 안에는 다만 마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날 향한 모두의 시선, 그 중에서도 특히 소피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소피도 노래를 꽤 잘 불렀었지?
"란트, 아니 라네티스 예하. 방금 그 시에 제가 곡을 붙여도 되나요?"
소피는 날 향해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흐흠? 난 소피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곤란하다는 표시를 했다.
"뭐, 그냥 갑자기 헛소리한 것뿐인데, 소피만 번거로워지지 않아?"
거부감이 드는 여자 목소리로 남자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 뭔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난 생각해 봤자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었으므로 그냥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에요. 정말 좋은 내용의 시인 것 같아요. 엘프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제가 한 번 붙여 볼게요."
결국 정말 오랜만에 적극적으로 나오는 소피에게 항복을 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야, 주인님 그런 곳에도 소질이 있었어? 그런데 꼭 늙은이 같아. 그런 내용의 시는 인생 다 살은 노인네들이 강가에 앉아서 낚시대 하나 드리운 체 읊는 내용 아니야? 이렇게 예쁜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사제님께서 지으실 만한 내용의 시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흐흠, 난 클라리의 말을 조용히 무시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창밖에 고개를 조금 내밀어 밖을 내다보니, 멀리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다행이군, 일단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