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1장 끝없는 여정(5)

푸른바람 BlueWind·2003. 1. 4. PM 1:30:31·조회 2440·추천 63
에피소드 74 끝없는 여정-5



마을의 방비는 작은 마을치고는 꽤 잘되어 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세히 보이는 마을의 모습들, 성벽은 아니었지만 높은 목책과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강물을 연결시켜 작은 해자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흐흠,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느 마을과는 왠지 다른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혹시, 이 마을이 그 마을인가? 내가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읽었던 책에 따르면 황제의 30여년 간의 치세로 인해 풍요로움을 얻게 된 제국으로 다른 나라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주를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속에서는 범죄자를 비롯한 사회악적인 요소도 섞여있기 마련이었고, 제국의 치안을 위협하는 중대한 요소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황제는 이주민도 수용을 하고, 기존의 치안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이주민들을 모아 제국의 곳곳에 이주민들의 마을을 건설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을은 구 그릭연맹의 영역이나 피투안과의 접경지역에 건설이 되었고, 특히, 구 그릭 연맹 지역에 건설된 마을은 제국에 귀속을 했지만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자치령주를 견재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보통 그런 마을에는 작게는 수십명 많게는 천여명에 이르는 제국군이 주둔을 하고 있다고 한다. 흐흠. 그래서 이 곳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나지 않은 것인가?

흐흠 어찌됐건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끼며, 난 마을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반가움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이제 며칠간은 클라리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마을로 다가서자 제국 정규군의 복장을 한 병사가 길을 막았다. 평상시였다면 그냥 통과를 시켰겠지만 이런 전시 상황에서 대규모의 무장을 한 병사가 이동을 한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일단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설혹 황제가 이끄는 병사일지라도 확인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일단 지금 이 마을의 병사들의 규율은 잘 잡혀 있다고 보아도 무난할 것 같았다. 제국의 관리로써 생활을 하다보니, 제국의 병사들을 보며 가장 먼저 생각을 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쩝.

잠시 행렬을 멈추게 한 카밀과 헤리탄은 말을 몰아 그 병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신과 이 행렬의 신분을 증명하는 황제의 도장과 최고사제로서의 내 도장, 그리고 추기경과 유하네리스 교황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각각 내미는 것이었다. 그 서류를 본 병사는 급히 두 사람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거대한 목책 문을 열어 마을로 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는 최고사제란 직위가 편리했다. 예전처럼, 내가 직접 나서서 통행증을 보여줘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리고 이 복장을 하고 있으면 최소한 무시를 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행렬이 서서히 목책을 통과해 마을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우리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환호하며 아주 반가운 얼굴을 했다. 꼭, 예전에 아티에넬 요새에 내가 들렸을 때, 사람들이 날 보던 표정과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생기는 것일까? 아! 그러고 보니, 이런 마을들은 난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고, 추기경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플라타니오 교단의 활동이 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으니, 분명 이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었으리란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게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을 중앙에 이르러 행렬을 멈춘 다음, 난 클라리 일당을 대동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주위에 몰려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는 듯 손을 맞잡았다. 그런 마을 사람들 틈을 지나 한 노인과 기사복장의 중년의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추기경은 어디로 갔지? 고개를 돌려 추기경의 마차를 쳐다보니 어느새 그들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귀찮은 일은 모두 나한테 다 떠넘기고 그냥 여유있게 여행이나 하시겠다는 말씀이군. 이 일은 나중에 확실히 따져야 할 것 같다. 촌장은 내게로 다가와서 무릎을 굻고 고개를 숙인 다음 플라타니오 식으로 성호를 그었다.

"Eurrl Isill Wid Mu(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전 이 마을의 촌장직을 맡고 있는 늙은이입니다. 최고 사제님께서 저희 마을에 찾아주시다니 이 늙은이는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촌장으로 여겨지는 노인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노인의 말속에서 진심이 가득 느껴졌다. 이 모두가 추기경이 사랑했던 전 최고사제의 공이겠지? 추기경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플라타니오 교단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이었지만 추기경이 사랑했던 그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정말 그녀 이상 헌신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도왔던 존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Ely Hamill Min Firu(언제나 들꽃의 마음으로)

아닙니다. 그 분의 뜻을 행할 뿐인 절 이렇게 환영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난 노인의 머리 위에 손을 조심스럽게 올린 다음 되도록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전 최고사제의 좋은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을 해서 이야기를 했다. 내 말이 마치자 노인인 감격한 듯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쩝, 왠지 꼭 사이비 교주가 된 듯한 느낌에 기분이 묘해졌다.

"전 이 곳 렌돌 마을의 수비대장 하룬 젠타네르 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노인이 진정되자, 옆에 있던 중년의 기사가 허리를 조금 굽혀 내게 인사를 했다. 워낙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만나왔던 까닭인지 그리 뛰어난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그에게서도 연륜이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최소한 자신의 맡은 일은 꼭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의 내는 사람들이 내곤 하는 눈빛을 하룬이라 불렸던 기사는 가지고 있었다. 난 플라타니오식으로 성호를 그은 다음 기사에게 답 인사를 했다.

"별빛은 언제나 편안히. 하룬 경. 번거로우실 텐데 이렇게 직접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확실히 이 목소리는 방방 뜰 때보다는 차분할 때가 더 듣기에 좋은 것 같았다. 확실히 차분하게 말을 하니, 목소리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말 내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정말 마음에 들어했을 목소리였을 것 같다. 기사는 내 대답에 허리를 굽혀 다시 예를 표했다. 어쨌든 플라타니오 최고사제란 자리가 최소한 무시당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사실에 새삼 전 사제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왠지 무엇인가 다른 짐하나를 짊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 어찌하랴, 모든 것이 내 운명인 것을.

난 촌장과 마을사람들의 요청으로 오늘은 마을 회관에서 자기로 했다. 물론, 클라리 일당도 함께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클라리 일당과 카밀 녀석들도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마을 회관 쪽을 향해 이동해 갔다. 소피, 티티는 자신들을 향한 사람들의 그런 행동이 익숙하지 않는 듯 조금 어색함이 보였지만, 클라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신관의 역할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얼굴에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고, 말투 역시 무척 차분했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난 다른사람이 눈치채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사람들은 걸어가는 우리 주위에 둘러싸고 있었다. 난 내 주위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플라타니오어로 축복을 내려주었다. 조금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지만, 전 최고사제의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즘엔 제국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들과 만나며 지냈지만, 원래 나와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부감 같은 것이 들지는 않았다.

마을 회관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마을회관에 도착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나와 일행들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한 채, 클라리 일당과 카밀을 이끌고 마을 회관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회관은 그 이름치고는 꽤 잘 정돈되어 있었다. 촌장이란 인물이 보기보다는 세심한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응접실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노스트립톤이나 황궁의 응접실과는 비할바가 아니었지만, 응접실은 단촐하게나마 깔끔한 느낌이 들게 꾸며져 있었다. 솔직히 내 취향에는 오히려 이게 더 편한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화려한 응접실은 편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그 색 때문에 눈이 피곤해 지기 마련이니까. 깔끔하기만 하다면 이런 평범한 응접실이 훨씬 더 편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께서 머무실 방을 준비시키는 동안 차나 드시며 잠시 이 곳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촌장은 여자 몇몇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더니 날 보며, 여전히 정중한 어투로 말을 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 촌장님."

내가 촌장에게 이야기를 하자 촌장은 정색을 하며 내게 답을 했다.

"아닙니다. 최고사제님. 이건 저희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도 다른 이에게 이렇게 기억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도움을 준 적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곧 정신을 차리고 앞에 촌장과 앉아있는 마을 수비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룬 수비대장님, 아테네이오스 군단이 필리포니스와 마케이아쪽을 향한다는데, 혹시 이 주변은 특별한 일이 없나요?"

내 질문에 수비대장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는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필리포니스나 마케이아가 벌써 무너진 것은 아니겠지.

"실은 상황이 그리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미 필리포니스의 경우 아테네이오스측에게 항복의사를 표명했고, 그 때문에 저희가 함부로 마케이아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케이아 측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배신을 하다니. 휴. 마케이아마져 아무런 전투조차 하지 않고 항복을 한다면 정규군인 저희가 포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니까요. 제국 중앙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동부 수비대 병사들과 함께 최대한 버텨야할 것 같습니다."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군. 필리포니스가 결국 배신을 했단 말인가? 하긴 그 충성스러운 이오니스의 다르넨 영주도 그렇게 흔들렸으니 그럴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제국 동부 수비대의 병력만 가지고 아테네이오스의 수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막기에는 벅차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동부 수비대 관할 지역은 강을 낀 평야지대가 대부분인 까닭에 특별히 거점을 삼아 적들을 막을 장소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필리포니스와 마케이아 마저 아무 대책 없이 항복을 한다면, 그들은 퇴각할 장소마저 잃게 되는 것이었다.

동부 수비대장은 황태자였고, 실질적으로 동부수비대를 이끄는 녀석은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검술대회 때 멋진 기술을 선보이던 레니안 스파코프란 녀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지모가 뛰어난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잘 해낼 수 있을런지. 하긴, 황태자 녀석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제 앞가림도 못하는 녀석을 자신의 대리로 임명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란 것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봐야 할 것 같다.

방안에는 한동안의 적막이 흘렀다. 내가 말을 꺼냈던 전쟁이란 커다란 사건이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런 적막을 깨고 촌장이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오늘 마을에 결혼식이 있는데, 최고사제님께서 주례를 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잠깐, 내가 잘못들은게 아니라면 나보고 주례를 서달라고? 내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촌장을 쳐다보고 있는데 촌장이 말을 이었다.

"전쟁 때문에 마을 분위기도 좋지 않고 해서, 마을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촌장은 이런 전시 상황에 결혼식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단 생각을 해서, 내가 그런 표정을 한다고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답을 했다. 휴. 주례라니? 말도 안돼는 소리였다. 내 주제에 무슨 주례를, 최고 사제 직을 맡고 있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말이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 어린 저 보다는 유하네리스 추기경께 부탁드리는 것이 더 나을 듯 한데 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난 추기경이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내게 떠넘겼던 사실을 머릿속에 새삼 떠올리며, 추기경에게 한번 떠넘겨 보자는 생각으로 촌장을 향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촌장은 조금 고개를 저으며 내게 답을 했다.

"물론, 추기경께서 주례를 서주시는 것도 영광이겠지만, 저희 마을 주민들에게는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께서 내리시는 축복 이상으로 큰 것이 없습니다. 주례를 서주신다면, 그 부부의 마음속에 평생동안 위안이 되고 충복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최고 사제님."

촌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난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한 채 아무말도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까지 간청을 하는데 거절을 한다면, 지금까지 깨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온 플라타니오 여사제란 이미지에 심각하게 손상이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쩝, 그러고 보니, 황제한테 받은 연설과 관련된 책에 주례에 관한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해봐야 할 것 같다.

수비대장과 촌장이 뭘 의논하는 듯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옆에서 킥킥거리고 있는 클라리의 옆구리를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꼬집어 버렸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몇 시간 동안이나 황제가 준 책으로 연구를 하고 플라타니오의 교리를 중심으로 결혼 주례 준비를 마쳤다. 난 지급 입고 있는 옷에 망토를 비롯한 몇 가지 장식을 덧붙인 다음 결혼식이 열리는 마을 중앙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론, 망토가 바닥에 끌리지 않게 아미와 티티가 뒤에서 잡고 있었다. 흐흠, 웬만해선 너절너절하게 여러 가지 것들이 붙은 정식 예복차림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결혼식 주례니만큼 예복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최고 사제 복장 중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은 신발 정도였다. 신발은 구두 같은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신어도 발에 무리가 가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는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중앙에는 우리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신랑과 신부의 복장을 한 두 남녀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다지 할 일이 없는지 카밀 녀석들과 추기경의 일행의 모습도 보였다. 저 원수 같은 추기경, 추기경이 저렇게 음흉한 인물일지는 정말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쩝.

내가 단위에 올라서자, 작은 노래와 함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곱게 차려입은 신부와 신랑이 내 앞으로 다가서고 난 준비를 한데로 주례사를 시작하였다.

"사랑이란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든 생명들은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걸쳐 노력을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런 생명들의 노력은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식물들은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혼신을 다해 꽃을 피우며, 새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노래를 부릅니다."

조용해진 결혼식장, 사람들의 익숙하지 않은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흐흠, 그 때 리투니아에서 병사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는 것 보다 왠지 더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난 짧게 숨을 내 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때론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치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다른이들은 어리석다고는 할지언정 그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이 두 부부 역시, 신께서 이끄신 인연을 따라 수많은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딛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두사람에게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끝이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일단 이상하진 않았나 보군, 왠지 등에서 식은땀이 가득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경쾌한 노래가 흐르며, 두 부부는 약속의 반지를 서로 나눈 다음 천천히 다시 사람들 사이로 걸어나갔다.



결혼식이 끝이 나고 해가 진 마을에는 간단한 피로연이 벌여졌다. 마을 중앙에 핀 화톳불을 중심으로 음악에 따라 사람들이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왠지 익숙한 풍경, 예전에 마을 축제 때 종종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촌장에게 초대를 받아 거의 반강제적으로 축제에 참가를 해, 한쪽 구석에서 춤을 추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카밀 녀석들 몇도 그런 마을 사람들 틈에 끼여 춤을 추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어딜 가나 쾌할하게 잘 지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내게 추기경이 한 손에 찻잔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축제라도 사제라는 신분 때문인지 술은 되도록 안마시려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술을 마시지 말라는 조항은 유하네리스 교단이나 플라타니오 교단이나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심신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사제로서의 도리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난 웃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말속에 가시를 담아 추기경에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 말에도 추기경은 그냥 허허하고 웃을 뿐이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 정도밖에 안되었다던데 추기경의 겉모습은 그에 비해서는 괘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런데 추기경이 찻잔을 한곳에 내려놓더니 무릎을 꿇으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라네티스 예하."

이 추기경이 갑자기 무슨? 내가 남자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난 갑작스러운 추기경의 말에 놀라 추기경을 보니, 추기경의 눈빛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휴, 그러고 보니, 전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하고 추기경이 결혼을 하려했던 사이였었지? 결혼식에다, 속은 남자였지만 어찌됐건 최고사제의 복장을 하고 있는 존재가 앞에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는 요즘 신세인데, 추기경의 요즘 행동을 생각하면 괘씸해서 들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조금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다.

난 추기경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흠, 난 황태자 녀석하고도 췄는데 추기경하고 못 출 이유가 뭐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왈츠 곡의 박자에 맞추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감사드립니다. 쉽게 들어주시기 힘든 부탁이었을 텐데."

힘없이 내게 말을 하는 추기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주례에서 말을 했었는데 추기경 역시 그런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 단체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란 입장 때문에 다른 이들의 아픈 마음은 감싸주곤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이 그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런 추기경의 모습과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경쾌한 왈츠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이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 속 한 곳이 쓰라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생각 날듯하며 생각이 나지 않는 답답함에 난 왠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왈츠가 끝이 나고 자리로 돌아온 뒤, 추기경은 회한에 휩싸여 뭔가를 생각하는 듯 멍하니 마을 중앙의 화톳불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를 뒤에 둔 채, 심란 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마을에서 강가가 보이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마을 중앙으로 몰려갔기 때문인지, 강가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내가 걸어가며 집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멀리 발 아래로 달빛에 비친 강의 모습이 보였다. 들려오는 물소리.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내가 그 모습을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렇게 다가설 때까지 내가 기척을 못 채다니, 난 최근에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란 감정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누, 누구세요?"

인공적인 불빛이 전혀 없는 강가인 까닭에 난 내 앞에 선 존재를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살펴 볼 수밖에 없었다. 큰 키와 표족한 귀, 엘프인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 앞에 나타난거지? 난 갑작스러운 일에 몸이 경직되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내 말에도 그 엘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달빛에 비친 내 모습만 한동안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살며시 내 귓가로 내려온 내 머릿결을 쓰다듬는 것이었다. 난 일단 공격을 해오지 않는 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며, 여전히 긴장된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날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라네티스"

엘프는 날 향해 그렇게 짧게 말을 했다. 내 이름을? 아니 내 칭호를 아는 존재인가? 하지만 칭호로써 날 부르는 것치고는 그 엘프의 말속에서 너무나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엘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두려움과 함께 뭔가 애틋한 그리움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뭐지? 전혀 상반되는 두 감정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인님아~!"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클라리의 목소리. 그 순간 갑자기 내 앞에 서 있던 엘프는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난 긴장이 풀리자 온몸에 힘이 빠지며 스르륵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도대체 방금 전 그 엘프는 뭐란 말인지. 그 압도적인 기운. 살기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그가 무의식 적으로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날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가 그렇게 무력하게 느껴진 것은 그 날 이후론 처음이었다.

"주인님아, 왜 그래 어디 아파?"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날 보며 클라리가 걱정스런 표정을 한 채 물었다. 갈수록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강해지는 클라리, 이제 클라리가 있으면 라이트 마법을 쓰지 안아도 충분할 정도였다. 난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 옆에 앉은 클라리에게 잠시 몸을 기대었다. 정체모를 혼란스러움에 도저히 몸을 지탱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리는 조용히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님아, 오늘 정말 잘했어. 하지만 너무 그렇게 무리는 하지마. 요즘 주인님을 보면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 같아 걱정이 돼."

난 클라리의 말에 그냥 웃는 것으로 답을 할뿐이었다. 클라리는 아무래도 오늘 결혼식 주례나 그런 일 때문에 힘이 빠져 내가 이런 것으로 생각을 한 것 같다. 잠시 말을 멈추고 강을 쳐다보던 클라리가 다시 말을 했다.

"주인님아, 사랑이란 정말 어떤 것인 것 같아?"

클라리의 말에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힘도 없었지만, 실제로 클라리의 질문에 답을 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의 말처럼 모든 생명체들은 사랑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생명체가 아닌 내게도 사랑할 자격이 있는걸까?"

클라리는 조금 슬픈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를 했다. 내 주례가 클라리에게는 걸렸던 모양인 것 같다. 쩝, 클라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례를 준비하는데 급급해 미쳐 클라리를 생각하지 못했던 내 잘못인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니야 클라리. 생명체들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모두 사랑을 할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닐까?"

난 조금 힘이 돌아오자, 클라리를 향해 천천히 말을 했다. 내 대답에 클라리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 클라리의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난 조금 힘을 내어 그런 클라리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서로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 왠지 그 엘프의 등장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던 마음 깊숙한 곳부터 서서히 편안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밤이 깊어가며 어둠은 점점 짙어졌지만 그 어둠 속을 비추는 한줄기 별빛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더욱더 자신만의 빛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