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외전 세번째 이야기 성 요한(1)

푸른바람 BlueWind·2003. 1. 12. PM 12:40:01·조회 2261·추천 65
외전-3 성 요한(1)



대지의 지붕 대고원의 끝자락과 엘프들의 성지 성수가 존재한다고 전해지는 엘프포레스트 사이에 펼쳐진 넓은 들판, 그 들판을 둥글게 휘감고 듀나인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그 들판에 흰빛의 대리석으로 뒤덮인 도시, 신성 도시 테베가 세워져 있었다.

신들의 세계와 연결된 곳이라고 전해지는 테베를 가득 메우고 있는 웅장한 건축물들, 모두 그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었다. 그 신전들 중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유하네리스 신전에 속한 정원 한 곳에서 녹빛 사제복을 입은 청년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정원의 한 곳에서 명상을 하고 있던 백발의 노사제는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노사제는 곧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띄었다.

"아, 안녕하세요? 헉, 헉, 제론님."

급히 뛰어가던 청년은 노사제를 보고는 급히 사제 앞에 멈춰서서 큰 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 제론이라 불리었던 노사제를 향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요한 형제,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연륜이 느껴지는 온화한 목소리로 제론 사제는 요한이라 불린 청년 사제를 향해 말을 하였다. 언뜻 겉모습만 보기에 키하고 덩치만 큰 요한은 사제라는 직책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또 다른 눈으로 노 사제는 요한의 어린 시절부터 요한이 사제의 길을 걸어가는데 적합한 인물인지 살펴보아 왔다.

"피스 프리한 추기경님을 뵙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그만 아침에 늦잠을 자버려서요. 헤헤."

요한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제론 사제를 향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너무나 맑고 순수한 마음, 제론 사제는 자신의 또 다른 눈으로 그런 요한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한이 외모와는 달리 사제라는 직책에 너무나 적합한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제론사제는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제론 사제는 요한을 향해 흡족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허허, 그럼 어서 가 보도록 하게."

제론 사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요한의 넓은 등을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제론 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키는 컸지만 아직 앳된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요한은 제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요한은 급히 추기경의 처소 쪽을 향해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요한을 제론 사제는 정이 가득 느껴지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제론 사제의 눈에 무엇인가 이상한 물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요한의 어깨 근처에서 보이는 무엇인가 빛나는 형체, 조금 시간이 흐르자 녹색 빛에 감싸인 그 존재가 모습을 들어냈다. 독수리, 유하네리스의 상징인 녹색빛의 독수리였다. 그리고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펼친 다음, 요한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한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론의 얼굴엔 그의 칠십 평생에 몇 번 나타나지 않았던 놀라움이란 감정이 나타났다. 그리고 요한이 뛰어간 쪽을 보며 노사제는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추기경의 처소 앞에 있는 정원과 연결된 작은 쪽문을 열고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큰 키 때문에 요한은 허리를 숙이고서야 간신히 문을 통과 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 곳에서 살아온 요한은 신전 내의 지리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정문으로 가는 길 역시 요한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약속시간에 많이 늦었기 때문에 요한은 샛길일지라도 최대한 시간이 적게 걸리는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요한은 조금 급한 발걸음으로 추기경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인지 잘 다듬어진 정원 속을 걸어가는 동안 요한은 왠지 급한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추기경이 직접 관리를 하는 정원, 피스 프리한 추기경의 또 다른 성격이 정원에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요한은 생각을 했다. 정원사용 가위를 든 추기경의 모습, 하지만 그와는 너무 대조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하네리스 교단의 한 축으로 이루고 있는 추기경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린 요한은 혼자서 피식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정원에 가득 핀 꽃들에게 시선을 두었던 요한은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추기경의 처소가 있는 건물의 문이 요한의 눈에 들어왔다. 요한은 문을 급히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을 닫고 돌아선 요한의 앞으로 한 무리의 여인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흰빛의 옷을 입은 여인들, 아무래도 다른 종교의 여사제들이 추기경께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것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 요한은 그냥 무심코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요한의 눈에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따스한 느낌을 주는 금실로 별무늬가 수놓아진 흰빛의 옷, 그리고 고결한 느낌을 주는 맑은 은빛의 머리결은 요한의 눈속으로 들어와 떠나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

요한은 키가 자신의 가슴정도 밖에 이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꼭 자신의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요한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런 요한을 향해 그녀는 싱긋 얼굴에 미소를 띄운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요한의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녀가 자신의 앞을 지나는 순간, 요한은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설레임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 앉을 뻔 했다. 요한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애에서 단 한번도 느낀 적이 없는 그럼 감정 때문에 추기경과의 약속도 잊고는 그녀가 나간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스 프리한 추기경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잔뜩 싸여 있는 서류들을 처리하느라 요한이 들어온 뒤에도 한동안 계속해서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하는 일 등을 계속하고 있었다. 요한은 혹시나 추기경이 늦은 것에 대해 꾸중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며 불안한 얼굴로 추기경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펴 보았다.

"자네도 평와 위원회에 소속되지 않겠나?"

자신을 향한 추기경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요한은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추기경에게 답을 했다.

"네, 예전부터 평화위원회에 소속되려 했었습니다."

추기경은 요한의 대답이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선뜻 나오자 조금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고개를 들어 요한을 쳐다보았다. 실제 평화 위원회는 유하네리스 교단 내에서도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유하네리스 교단과 적대적인 종파를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오 교단에서 제명된 이단 심판소와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기 때문에 교단 내에서도 가장 순교율이 높은 단체가 바로 평화위원회였다. 그런 까닭에 평화위원회에 소속되는 것을 웬만해서는 피하려 하는 것이 사제들의 일반 적인 경향이었다.

"요한, 자네 평화위원회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고서 말을 하는 것인가?"

추기경은 미심쩍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키가 무척이나 큰 사제 요한을 쳐다보았다. 만약 그가 별생각 없이 내린 결정이라면 아무리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추기경은 그를 평화위원회에 받아 드릴 수 없었다. 평화위원회에 소속된다는 것은 언제라도 신의 곁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동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희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이 추기경의 생각이었다.

"물론입니다. 예하. 매년 신께서 가장 많은 부름을 내리시는 곳이란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자신 있게 답을 하는 요한을 보며, 추기경은 정말 오랜만에 반가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요한 그의 어린 시절부터 맡아 키워왔었기에 그 반가움은 더욱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요한의 결정에 추기경 역시 평화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자신감이 다시 솟아나는 듯 했다. 하지만 추기격은 그런 모든 감정을 감추고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는 요한에게 말을 했다.

"각오는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걸세.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테니."

요한은 고개를 숙여 추기경의 말에 따를 것임을 나타내었다. 앞으로 수십여년의 세월동안 유하네리스 교단을 이끌어 나갈 두 위대한 인물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수년간의 평화위원회 소속 사제로서의 생활, 무력에 약한 다른 종교의 신관들과 신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단심판소와 끝없이 싸워온 생활이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생활을 하며, 요한에게는 정신적으로 많은 성숙이 있었다. 요한의 얼굴에 자리잡고 있던 앳된 기운과 천진함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고, 지금의 그에게서는 태산 같은 굳건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이단 심판소 측은 교묘하게 유하네리스신의 교리를 변형하여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는데 매우 능수능란 했다. 그런 그들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수많은 어리석은 민중들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세를 불려나갔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아니, 정확히는 더 많은 학살을 하기 위해 암살단이나, 살인범, 불량배, 용병들까지 돈을 주어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들이 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었다는 것은 세삼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했다.

요한은 이단 심판소의 움직임을 풀숲에서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이단 심판소 측은 언제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여 그 움직임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누군가가 그들을 정찰하고 있어야만 했다.

요한의 눈앞에 나타난 이단 심판소에 소속된 인간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모두 녹빛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옷의 형태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옷들이 너절너절하게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꼭 거지집단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이미 광기에 젖어 눈에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요한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떠올랐다.

"혹시 아편인가? 한번 조사해 봐야 되겠군."

저들이 만약 아편을 사용하고 있다면 정부군의 개입을 얻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쨌든 모양새는 종교단체간의 대립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했다고 하더라도 정부에서 죄를 물을 명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단 심판소 역시 그런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정부의 시책에 어긋나는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잇었다. 심지어는 정부가 주도하는 몬스터 토벌 작전에까지 참가하여 꽤 훌륭한 전적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만약 저들이 실제로 아편을 사용했다면 마약이란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정부의 도움을 받아 저들을 일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한의 생각이었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단 심판소 신도들을 따라 요한 역시 풀숲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 보다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는 요한이었기 때문에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정찰임무와 같은 것은 대부분 그의 몫이 되어 있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요한은 조금 속도를 높여 이단 심판소보다 앞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요한의 눈에 멀리 일단의 사람들 모습이 들어왔다. 요한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흰빛의 사제복, 이전에도 몇 번 도와준 적이 있는 플라타니오 교단측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단심판소 녀석들의 목표가 바로 저들이었군."

요한은 신전과 연결되어 신전에다 비상을 알리는 팔찌를 가동시켜 평화위원회에 이단심판소의 활동을 알리는 경고를 뛰운 다음, 플라타니오 교단측 사람들을 향해 급히 이동을 했다.

플라타니오 교단측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원래 대부분의 사제외 신도가 여자로 구성된 플라타니오 교단이었으므로 지금 그 일행들도 역시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을 피하게 하여야 된다는 일념으로 다급히 그들 앞으로 뛰어 들었다. 갑작스러운 요한의 출현에 그들 사이에서 약간의 술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잠시후 진정이 된 그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것이 요한의 눈에 들어왔다. 맑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요한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옴을 느꼈다. 몇 년전 추기경의 처소에서 보았던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 번 뵌적이 있는 분 같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태양신의 빛줄기여."

맑지만 고결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 요한은 자신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따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가슴이 심하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요한은 다급한 상황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별빛은 언제까지나 찬란히. 전 유하네리스 교단 평화위원회 소속 사제 요한 바울루스입니다. 이단심판소 측의 동향을 살피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지금 그들이 이 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시 피하십시오!"

요한은 조금 다급함이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을 했다. 요한의 말을 들은 플라타니오 신도들 사이에서 약간의 공포가 섞인 술렁임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안색이 조금 변하는 것을 요한은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대열의 뒤쪽에 서있던 플라타니오 교단 소속 성기사 몇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실비네스 님. 저희들이 시간을 최대한 끌어보도록 할테니. 예하께서는 어서 피하십시오."

허리를 조금 굽히며, 그녀에게 정중한 말투로 말을 하는 기사들. 기사들이 그녀를 실비네스라고 칭하는 것을 본 요한은 전혀 의외의 사실에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실비네스 4세, 현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의 호칭이었다. 지금은 많이 약해진 플라타니오 교단이었지만, 그래도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란 직위는 무시할 만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여리디 여리게만 보였던 그녀가 그런 높은 직위에 있었다는 것은 요한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요한은 그녀가 평범한 플라타니오 여사제들 중 한명이라고 지금까지 생각을 해왔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여러분들도 저도. 모두 그분의 똑같은 자식, 경들을 두고 제가 도망칠 수는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최고 사제, 실비네스 앞에서 성기사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사제들 역시 우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저 멀리 길 끝에서 이단심판소 신도들이 행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여지는 먼지가 모두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은 무엇인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실비네스를 향해 걸어갔다.

"예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 말을 마친 후, 요한은 품속에서 비상용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던 '슬립' 마법주문서를 찢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수면 마법이 가동되며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 최고사제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들어버렸다. 요한이 마법주문서를 찢는 것을 보며 칼을 뽑으려 했던 플라타니오 성기사들은 곧 요한의 뜻을 알아차리고 칼에서 손을 때었다. 잠이 들어버린 실비네스를 요한은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태양신의 빛줄기여."

성기사들은 요한을 보며,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성기사들의 말에 요한은 아무 대답없이 그냥 고개를 조금 숙였다.

"모두 절 따라오십시오."

요한은 플라타니오 여사제들을 이끌고 평화위원회가 대륙 곳곳에 마련해 둔 비밀 은시처 중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는 이들을 모두 버려두고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요한은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바로 저 성기사들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요한 자신의 목숨까지도.



작은 동굴안에는 빽빽하게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성스러운 기운이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결계가 쳐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단 심판소의 눈길로부터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성기사들의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요한과 수십여명의 플라타니오 사제들이 모두 은신처로 피할 수 있었다. 여사제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동굴 한쪽에 힘없이 주저 앉아 있었다. 여사제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득 느껴졌다. 결국, 한명의 여사제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동굴안은 순식간에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차 버렸다.

요한 역시 동굴 한쪽에서 땀을 닦아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요한은 이단 심판소를 향한 분노가 다시한번 치솟는 듯 했다.

그리고 만약, 마법사 길드가 봉인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플라타니오 교단이 이렇게 이단심판소 따위에게 핍박받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요한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플라타니오 교단 소속이었던 마법사 길드가 봉인된 다음, 기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던 플라타니오 교단의 특성상 전투 복사와 성기사를 거의 키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킬 힘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플라타니오 교단의 지지층 역시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힘있는 존재가 아니라 평소에 플라타니오 교단의 도움을 받곤 하는 평범한 서민들이었기에 정부나 귀족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었다.

요한은 자신이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그녀, 실비네스를 내려보았다. 잠이 든 그녀의 얼굴 역시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요한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샘솟는 여러 가지 욕망을 억누르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평상시였다면 이 고귀한 여인에게 이런 행동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런 요한의 행동에 신경을 쓰는 이는 최소한 요한이 있는 이 동굴 안에는 없었다. 왠지 약하게 빛이 나는 듯 느껴지는 은빛 머리칼, 요한은 조심스럽게 그 맑은 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한동안 요한 자신이 잊고 있었던 설레임과 두근거림, 하지만 요한은 이 여인이 자신이 믿는 신과는 다른 신의 최고사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으,응."

요한의 품에 안겨 있던 실비네스는 잠에서 깬 듯, 작게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요한은 순간 그녀가 너무 귀엽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곧 그런 모든 감정을 없애고, 깨어나는 그녀를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기는 어디죠?"

실비네스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떠올렸는지 급히 몸을 일으킨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요한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비밀 은신처입니다."

요한의 말에 그녀는 갑자기 요한을 세게 붙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요한에게 질문을 했다.

"그,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실비네스의 질문에 요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요한을 보고 있던 그녀의 맑은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결국 양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은 꼭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힘없이 말을 하는 요한을 향해 실비네스는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절 그 곳에 내버려두지, 왜 이곳으로 억지로 대려 오셨어요!"

그런 그녀의 말에 요한은 마음이 아픈 나머지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기도 힘들었지만 이번에도 요한은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실비네스에게 답을 하였다.

"만약, 예하께서 그 곳에 남으셨다면, 여기 있는 이 많은 이들 역시 그 곳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 들은 당신뿐만 아니라 이 모두를 위해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차분하게 말을 하는 요한, 하지만 그의 눈엔 이미 깊은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요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비네스는 여전히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들의 생명이 여기 있는 모두의 생명보다 소중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희생이란 단어는 그 아픔을 단지 미화할 뿐이에요."

평소와는 달리 감정이 격해진 목소리로 말을 하는 실비네스를 보며, 요한은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그녀에게 답을 했다.

"그렇게 소중한 그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려가며 지키려 했던 존재가 바로 실비네스님이 아닙니까? 지금 같이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신다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들의 소중한 생명까지 하찮게 만드는 것일 겁니다."

요한은 결국 말을 마칠 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금 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답을 했다.

"그, 그래도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이들이 언제나 저 하나 때문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 말을 마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끝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요한은 조용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최고사제란 직위에 오를 만큼 강인한 면을 가지고 있는 그녀 였지만, 결국 그녀 역시 아직 나이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수많은 어려움과 부딪히며 겉으로는 씩씩하게 해결해 내었을 지는 몰라도, 마음은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란 것을 요한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요한은 천천히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햇빛은 정원 구석구석까지 내리 쬐며, 작은 초록빛의 잎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 한 방울이 나뭇잎을 따라 흘러내리며 반짝 하고 빛을 내었다. 정원 한 구석의 나뭇잎들이 잠시 부산스럽게 흔들리더니, 그 곳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큰 키와 나뭇잎과 비슷한 녹빛의 사제복을 입은 요한이었다. 정원의 한 곳에서 걸어나오는 요한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한달 전의 사건은 요한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 옴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신전의 본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도라도 하면 마음이 약간이나마 진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 위 하늘에 하얀 깃털을 가진 작은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본 요한은 흰빛의 사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는 순간, 정원에 핀 작은 들꽃들 사이로 걸어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흰빛의 천에 금빛의 실로 수놓여진 여사제복, 고결하고 맑은 빛을 내는 은발, 요한은 지금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시 눈을 뜨자 요한의 앞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도 들어오지 않았다. 요한이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어디선가 너무나 기다려왔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요한 사제님."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밝에 웃으며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생생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요한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꿈이라도 좋다고 생각을 했다.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요한은 어떤 어려움 속이라도 뛰어들 생각이었다.

"아, 실비네스님. 그 때는 제가 너무 실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일은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요한은 그녀의 칭호가 실비네스라는 것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허리를 조금 굽혀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한달 전에는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한이 그녀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녀는 일개 사제가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요한 사제님. 오늘 유하네리스 신전에 찾아온 것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사제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실비네스는 그녀가 평소에 사용하는 너무나 어른스럽고 차분한 최고사제의 말투 대신에 그 또래의 소녀들이 종종 사용하는 밝은 목소리로 요한에게 이야기를 했다. 요한은 밝은 모습의 그녀를 보자, 왠지 모를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여전히 슬픔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요한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닙니다. 예하. 전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요한은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껴안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긴 딱딱한 말투로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흠, 전 정말 진심으로 그 일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한 사제님. 우리 밖에 없을 때는 그냥 절 루니라고 불러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실비네스나 예하란 칭호는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어서요. 다른사람은 몰라도 요한 사제님께는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요."

루니는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요한에게 이야기를 했다. 요한은 루니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시죠? 요한 사제님."

다시 한번 밝게 미소 띈 얼굴로 말을 하는 루니늘 보며, 고민하던 요한은 결국 루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요한이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이번에도 요한은 언겁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루니는 그런 요한의 옆에 서더니 고개를 돌려 요한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그 햇살 속에서 얼굴 가득 핀 그녀의 미소는 요한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광경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요한, 그럼 오늘 유하네리스 신전을 안내해 주시겠어요? 그동안 여러번 찾아왔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살펴볼 기회가 없었어요."

밝게 이야기를 하는 루니를 보며, 잠시 당황한 채 서 있었던 요한 역시 얼굴 가득 기쁨의 미소를 띄우며 루니에게 답을 하였다.

"물론입니다. 루니, 당신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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