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2장 여신의 사제(1)
푸른바람 BlueWind·2003. 1. 19. PM 4:53:27·조회 2417·추천 62
에피소드 75 여신의 사제-1
-플라타니오의 사제들은 언제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단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도울 때만 그들의 권능을 사용할 뿐이다. 그녀들은 그들이 따르는 신의 상징인 들꽃과 별처럼, 작지만 세상 어느 곳에선가 활짝 피고 또, 따듯한 빛을 어둠 속 구석구석까지 비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정점인 플라타니오신의 최고사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플라타니오 신이 여신인 까닭에 최고사제 역시 대부분 여사제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한결같이 자애로우며, 또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녀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동안 그 따스함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 일보> 259년 2월 3일자 특집 칼럼-
렌돌 마을의 촌장에게 난 황제에게 받은 활동비 중 일부를 사례로 지불하고 마을을 떠났다. 촌장은 극구 사양을 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전시상황에서 만약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라는 의미로 사례를 하는 것이라고, 설득을 하여 간신히 돈을 넘길 수 있었다. 이게 모두 눈치도 없는 카밀 녀석들이 마을의 식량을 무지하게 축냈기 때문이었다. 전시상황에서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텐데, 카밀 녀석들이 그렇게 많이 먹어치웠으니 일단 돈이라도 주어서 식량을 구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마차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예전에 리투니아로 마차를 타고 향하던 때에 비해서는 기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지만, 카밀 녀석들과 유하네리스 복사들이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전시상황에서 말의 산지인 북부지역도 아니고 남부지역에서 말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테베에 도착하면 사막 입구까지만이라도 타고 갈 말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느린 행군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이야 이미 저 하늘을 날아 투르크훈국이 있는 사막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길을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아무런 수행 행렬 없이, 내가 도착을 한들 왕을 만나게 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일테니까. 그리고 희망을 걸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투르크훈국이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는 신이 바로 그 미탄젤이라는 신이란 것이다. 교리 공부를 하다보니 미탄젤은 플라타니오에게 속해 있는 신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인 날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여장을 한 채 여행을 해야 한다는 비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희망이 하나 생긴 것일 것이다.
이제 전쟁의 관건은 내가 얼마나 빨리 투르크훈국을 움직이냐는 것과, 코리안트 왕국이 지원군을 얼마나 어떻게 보내주느냐에 결론이 나게 되었다. 코리안트 왕국으로 간 루이안 부시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만약 이 모두가 실패한다면 황제로서는 30년 전의 대 전쟁 보다 더 어려운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제국이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의 상처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이 상황에서 세 나라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 일테니. 그런 면에서 보면 예전에 내가 죽였던 그 둘째 왕자 녀석도 살아있었다면 바이킹의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죽였을 것이란 것에 생각이 미치자, 왠지 기분이 씁쓸했다.
"우앙, 보면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우리 주인님이 그렇게 조신하게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정말 예술이야. 햇볕이 주인님의 뽀얀 피부를 따스하게 감싸고, 창 밖 먼 곳을 향한 우수에 찬 맑은 녹색 눈망울,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날리는 긴 연갈빛 생머리, 그리고 그런 주인님의 외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사제복. 남자들이 끔뻑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지."
날 살펴보며 하나하나 말을 하는 클라리의 말에 난 창 밖을 향했던 시선을 클라리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두 엘프가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냔 말이야?
"클라리 너도, 그 왈가닥 성격만 아니라면 남자들이 참 좋아할텐데 말이야."
난 클라리를 노려보며, 오랜만에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라리 이 인간, 아니 이 놈의 검은 확실히 정이 들라고 할 때마다 정 떨어지는 소리를 해서, 사람 기분을 나쁘게 만든단 말이야.
"난 말이야 날 너무나도 좋아해 주는 주인님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안 좋아해도 괜찮아."
클라리는 내 반격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날 보며 말을 했다. 흐흠 누구 마음대로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거야?
"난 그렇다고 생각 안 하는데? 누가 저렇게 왈가닥에다가 말많고 사람 속만 박박 긁는데다 사고만 터트리는 수다쟁이 검을 좋아하겠어?"
쿡, 이번 건 조금 타격이 컸나보다, 클라리는 조금 불퉁하게 해서, 날 쳐다보았다. 후훔. 하지만 이십대 중반 정도의 연령대로 보이는 클라리가 불퉁하게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도 들기는 들었지만, 그 것보다는 그 모습을 보면, 웃음이 먼저 터져나왔다.
"내가 언제 사고만 터트렸어? 주인님아! 그리고 내가 왈가닥이라니?"
클라리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따지는 것을 슬쩍 무시하고 난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라는 것은 다시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 아무 상황도 모르고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날 본다면 뭔가 다른 고상한 이유 때문에 웃고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실제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가 웃는 이유는 이렇게 너무나 단순한 것이었다. 좀 안타까운 것은 최고사제란 직책 때문에 대놓고 하하 하며 웃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며칠간의 행군, 스파르타 근처의 북부 산맥을 원류로 한 미르센티 강의 본류와 사막 근처에서 흘러오는 까닭에 누런 금빛을 띠는 듀나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원래 이오니스에서 테베시로 향할 경우, 필리포니스와 마케이아를 통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곳을 지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일행은 사정상 마케이아와 필리포니스를 피해서 행군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 지점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었다. 렌돌 마을을 지난 이후로는 렌돌 마을과 비슷한 목적으로 세워진 몇몇의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며 지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난 렌돌 마을과 비슷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영지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필리포니스나 마케이아를 통과했다면 그런 대우는 받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내 선택이 그리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평화로운 풍경, 피로 뒤덮였던 수린 요새의 전투가 꼭 오래 전의 일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가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아마, 전쟁으로 인해, 강을 통한 배의 이동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더 그런 평화로움이 커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것이 아니라면 궁극적으론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난 내 안도감 때문에 그런 느낌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를 노린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아테네이오스 군이 노리고 있는 마케이아의 영지라고 하더라도 아테네이오스군이 이 곳까지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마을들을 처리하려는 목적으로 천여명의 병력 정도는 보낼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상대해낼 자신이 있었다.
후훔, 그런데 이 불길한 적막은 도대체 뭐란 말인지? 갑작스럽게 주위의 생명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귀로 전해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마음에 울려퍼지는 들꽃들의 합창소리가 멎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방금 그런 능력도 최고사제로써 라네티스 2세란 칭호를 결정한 이후에 생긴 능력이었다. 불길한 느낌. 생명들이 떨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 착각일까?
"주인, 암흑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목표는 우리 쪽인 것 같다."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해오는 아미, 그렇다면 내 예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젠장, 난 급하게 카밀을 호출했다. 카밀은 내가 부르자 즉각적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란트일 때보다 지금 이 모습일 때 더 말을 잘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흐흠.
"카밀 경. 적인 것 같아요. 추기경께 전해드린 다음 되도록 빨리 방어준비를 해주세요."
난 순간 다급함에 카밀이라고 말을 할 뻔했지만, 다행히 순간 자각을 하고 카밀에게 이야기를 했다. 카밀은 내 말을 듣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추기경의 마차 쪽으로 말을 몰아가 추기경에게 이야기를 했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추기경은 카밀의 말을 알아차린 듯 마차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빠르게 카밀은 카밀녀석들과 복사들의 대열을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되도록 숲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인도를 한 카밀은 진형을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그 전에 내가 란트로 있어서 명령을 내렸을 때는 내 명령에 한치의 거부도 없이 잘 따랐었는데, 지금 보니, 자기가 최고 지휘자의 역할을 맡았을 때도 아주 능숙히 잘 해내는 것 같았다. 하긴 최고의 용병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인물인데,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밀이 대열을 거의 정비시킬 무렵, 숲의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 들은 검붉은 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숲에서 한명씩 드러내는 녀석들은 언뜻 보기에도 수백여명이 넘는 것 같았다. 저 녀석들은 도대체?
"위험합니다. 최고 사제님께서는 마차안에 계십시오."
카밀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느껴지는 기운이 암흑 기운, 아무리 플라타니오의 축복을 받은 옷을 입고 있어도 상대를 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리고 스승님 때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뻔히 눈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가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카밀 경, 그럴 수는 없어요. 저들은 보통 방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니."
난 이 모습으로 카밀 앞에서 보통 말할 때와는 달리 조금 강한 어조로 카밀에게 말을 한 후, 난 클라리 일당을 이끌고 마차에서 내렸다. 추기경의 마차에서도 추기경과 그의 일행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추기경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암흑신의 사제들입니다. 저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군요. 일단 제가 해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추기경은 내게 그렇게 말을 한 다음, 네크로멘서를 상대할 때처럼, 카밀 녀석들과 복사들 사이를 지나, 적들의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암흑신의 사제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오! 우리의 위대하신 평화위원장님이 아니십니까? 추기경 예하. 정말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암흑신의 사제들 앞으로 나선 녀석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추기경에게 말을 했다. 음침한 목소리, 그다지 표시는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그 말속에서 적대감이 물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네, 네 녀석은!"
추기경은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그 녀석을 향해 이야기를 했다. 추기경의 말을 들은 녀석은 곧 후드를 벗어 자신의 얼굴을 들어냈다. 반쯤 벗겨진 잿빛 머리와 햇빛을 거의 쬐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탁한 눈빛은 보는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고 있었다.
"하하, 고귀하신 추기경께서 그래도 미천한 절 알아봐 주시는군요. 이 거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려."
추기경의 얼굴 흐르는 식은땀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조금 떨어진 이 곳에서도 보였다. 왠지 굳어 보이는 추기경의 얼굴, 네크로멘서와의 싸울 때보다 더 표정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거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비슷한 성향의 신일지라도 두 신의 신성력이 동시에 사용되면 충돌이 이러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추기경의 옆에서 제대로 거들지도 못하고 일단 카밀 녀석들 틈에서 만약을 대비한 채 물러나 있었다.
"켄테루알 페미네티즈, 네 녀석 죽은 것이 아니었더냐?"
추기경은 굳은 목소리로 앞에선 암흑신의 사제를 향해 말을 했다. 그러자 사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곤 추기경에게 답을 하였다.
"이단 심판소가 당신의 손에 제거된 후, 당신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려 왔었죠. 그리고 결국 이렇게 당신을 상대할만한 힘을 얻었지. 세티아수라님의 추기경의 권능이 강한지 유하네리스 따위 신의 추기경의 권능이 강한지 한 번 이 자리에서 비교해 보도록 하지요."
암흑신의 추기경? 헛, 암흑신은 다른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을 좋아한다던 말이 사실은 사실이었나보군, 옳지 않은 방향이었더라도 이단 심판소 소속이었다면 유하네리스 신도였다는 말일테니.
"무슨 소릴 하는거냐! 그 분을 또다시 욕되게 하지마라! 너 따위와 비교하기 위해 신께서 권능을 하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추기경은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암흑신의 사제에게 호통을 쳤다. 추기경의 큰 덩치에 어울리는 호탕한 일갈, 확실히 외모나 성격은 추기경보다는 오히려 장군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두고 보도록 하죠."
암흑신의 사제는 그 말을 마친 다음.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뒤에 있던, 다른 사제들과 함께 동시에 암흑신의 언어로 추정되는 의미 모를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유하네리스의 복사들 역시 추기경의 뒤에 대열을 맞추어 서서 유하네리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모여드는 두 신의 기운, 태양신 유하네리스와 암흑신 세티아수라의 상반된 두 기운이 서서히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추기경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두 기운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하며, 주위에는 엄청난 속도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난 아이스 쉴드를 쳐서 카밀 녀석들이 그 기운에 휩쓸리지 않도록 대비를 시켰다. 쩝,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개개인의 실력은 유하네리스 측이 월등했지만 인원수의 열세 때문에 두 신의 상반된 기운은 한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로부터 마음속으로 고통과 괴로움의 감정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이 느낌은? 난 끝없이 몰려드는 고통의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 들꽃들의 소리? 그 순간 난 정신이 혼미해 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그만 하세요!"
내 말과 동시에 갑자기 내 주위에 엄청난 양의 흰 빛 기운이 몰리더니 양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꼭, 예전에 신성 마법 진을 설치하고 기도문을 읊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 기운이 빠르게 퍼져나가며 충돌하고 있던 두 신의 기운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의 감정, 이 모두가 들꽃들의 감정이 모여 그렇게 된 것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으로는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아파왔다. 꼭 내가 둘로 나눠진 듯한 느낌을 받으며,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갑자가 조용히진 주위, 그런데 순간, 그 틈을 노리고 켄테루알이라 불렸던 암흑신의 사제가 추기경을 향해 급히 기운을 모운 다음 쏘아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잠잠해 졌던 분노의 감정이 다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들꽃들도 모든 것의 원흉이 그라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주위에서 흰빛의 기운이 모여들며 이번에는 그 암흑신의 사제를 향해 기운이 집중되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흑신의 사제가 쏘아보낸 검붉은 빛의 기운을 상쇄시켜버리고 그대로 녀석의 몸을 흰빛의 기운이 꿰뚫어 버렸다.
작은 들꽃들의 분노, 난 그들의 감정을 대신했을 뿐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언뜻 들었다. 신성력을 쓴 후유증 때문일까? 온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난 이번에도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힘이 없는 상황, 또한 이성과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더욱더 괴리되는 내 감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혼란함을 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식의 끈을 그냥 놓아버렸다.
-플라타니오의 사제들은 언제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단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도울 때만 그들의 권능을 사용할 뿐이다. 그녀들은 그들이 따르는 신의 상징인 들꽃과 별처럼, 작지만 세상 어느 곳에선가 활짝 피고 또, 따듯한 빛을 어둠 속 구석구석까지 비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정점인 플라타니오신의 최고사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플라타니오 신이 여신인 까닭에 최고사제 역시 대부분 여사제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한결같이 자애로우며, 또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녀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동안 그 따스함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 일보> 259년 2월 3일자 특집 칼럼-
렌돌 마을의 촌장에게 난 황제에게 받은 활동비 중 일부를 사례로 지불하고 마을을 떠났다. 촌장은 극구 사양을 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전시상황에서 만약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라는 의미로 사례를 하는 것이라고, 설득을 하여 간신히 돈을 넘길 수 있었다. 이게 모두 눈치도 없는 카밀 녀석들이 마을의 식량을 무지하게 축냈기 때문이었다. 전시상황에서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텐데, 카밀 녀석들이 그렇게 많이 먹어치웠으니 일단 돈이라도 주어서 식량을 구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마차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예전에 리투니아로 마차를 타고 향하던 때에 비해서는 기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지만, 카밀 녀석들과 유하네리스 복사들이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전시상황에서 말의 산지인 북부지역도 아니고 남부지역에서 말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테베에 도착하면 사막 입구까지만이라도 타고 갈 말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느린 행군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이야 이미 저 하늘을 날아 투르크훈국이 있는 사막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길을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아무런 수행 행렬 없이, 내가 도착을 한들 왕을 만나게 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일테니까. 그리고 희망을 걸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투르크훈국이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는 신이 바로 그 미탄젤이라는 신이란 것이다. 교리 공부를 하다보니 미탄젤은 플라타니오에게 속해 있는 신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인 날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여장을 한 채 여행을 해야 한다는 비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희망이 하나 생긴 것일 것이다.
이제 전쟁의 관건은 내가 얼마나 빨리 투르크훈국을 움직이냐는 것과, 코리안트 왕국이 지원군을 얼마나 어떻게 보내주느냐에 결론이 나게 되었다. 코리안트 왕국으로 간 루이안 부시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만약 이 모두가 실패한다면 황제로서는 30년 전의 대 전쟁 보다 더 어려운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제국이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의 상처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이 상황에서 세 나라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 일테니. 그런 면에서 보면 예전에 내가 죽였던 그 둘째 왕자 녀석도 살아있었다면 바이킹의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죽였을 것이란 것에 생각이 미치자, 왠지 기분이 씁쓸했다.
"우앙, 보면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우리 주인님이 그렇게 조신하게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정말 예술이야. 햇볕이 주인님의 뽀얀 피부를 따스하게 감싸고, 창 밖 먼 곳을 향한 우수에 찬 맑은 녹색 눈망울,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날리는 긴 연갈빛 생머리, 그리고 그런 주인님의 외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사제복. 남자들이 끔뻑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지."
날 살펴보며 하나하나 말을 하는 클라리의 말에 난 창 밖을 향했던 시선을 클라리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두 엘프가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냔 말이야?
"클라리 너도, 그 왈가닥 성격만 아니라면 남자들이 참 좋아할텐데 말이야."
난 클라리를 노려보며, 오랜만에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라리 이 인간, 아니 이 놈의 검은 확실히 정이 들라고 할 때마다 정 떨어지는 소리를 해서, 사람 기분을 나쁘게 만든단 말이야.
"난 말이야 날 너무나도 좋아해 주는 주인님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안 좋아해도 괜찮아."
클라리는 내 반격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날 보며 말을 했다. 흐흠 누구 마음대로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거야?
"난 그렇다고 생각 안 하는데? 누가 저렇게 왈가닥에다가 말많고 사람 속만 박박 긁는데다 사고만 터트리는 수다쟁이 검을 좋아하겠어?"
쿡, 이번 건 조금 타격이 컸나보다, 클라리는 조금 불퉁하게 해서, 날 쳐다보았다. 후훔. 하지만 이십대 중반 정도의 연령대로 보이는 클라리가 불퉁하게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도 들기는 들었지만, 그 것보다는 그 모습을 보면, 웃음이 먼저 터져나왔다.
"내가 언제 사고만 터트렸어? 주인님아! 그리고 내가 왈가닥이라니?"
클라리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따지는 것을 슬쩍 무시하고 난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라는 것은 다시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 아무 상황도 모르고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날 본다면 뭔가 다른 고상한 이유 때문에 웃고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실제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가 웃는 이유는 이렇게 너무나 단순한 것이었다. 좀 안타까운 것은 최고사제란 직책 때문에 대놓고 하하 하며 웃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며칠간의 행군, 스파르타 근처의 북부 산맥을 원류로 한 미르센티 강의 본류와 사막 근처에서 흘러오는 까닭에 누런 금빛을 띠는 듀나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원래 이오니스에서 테베시로 향할 경우, 필리포니스와 마케이아를 통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곳을 지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일행은 사정상 마케이아와 필리포니스를 피해서 행군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 지점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었다. 렌돌 마을을 지난 이후로는 렌돌 마을과 비슷한 목적으로 세워진 몇몇의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며 지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난 렌돌 마을과 비슷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영지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필리포니스나 마케이아를 통과했다면 그런 대우는 받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내 선택이 그리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평화로운 풍경, 피로 뒤덮였던 수린 요새의 전투가 꼭 오래 전의 일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가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아마, 전쟁으로 인해, 강을 통한 배의 이동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더 그런 평화로움이 커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것이 아니라면 궁극적으론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난 내 안도감 때문에 그런 느낌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를 노린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아테네이오스 군이 노리고 있는 마케이아의 영지라고 하더라도 아테네이오스군이 이 곳까지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마을들을 처리하려는 목적으로 천여명의 병력 정도는 보낼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상대해낼 자신이 있었다.
후훔, 그런데 이 불길한 적막은 도대체 뭐란 말인지? 갑작스럽게 주위의 생명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귀로 전해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마음에 울려퍼지는 들꽃들의 합창소리가 멎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방금 그런 능력도 최고사제로써 라네티스 2세란 칭호를 결정한 이후에 생긴 능력이었다. 불길한 느낌. 생명들이 떨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 착각일까?
"주인, 암흑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목표는 우리 쪽인 것 같다."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해오는 아미, 그렇다면 내 예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젠장, 난 급하게 카밀을 호출했다. 카밀은 내가 부르자 즉각적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란트일 때보다 지금 이 모습일 때 더 말을 잘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흐흠.
"카밀 경. 적인 것 같아요. 추기경께 전해드린 다음 되도록 빨리 방어준비를 해주세요."
난 순간 다급함에 카밀이라고 말을 할 뻔했지만, 다행히 순간 자각을 하고 카밀에게 이야기를 했다. 카밀은 내 말을 듣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추기경의 마차 쪽으로 말을 몰아가 추기경에게 이야기를 했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추기경은 카밀의 말을 알아차린 듯 마차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빠르게 카밀은 카밀녀석들과 복사들의 대열을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되도록 숲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인도를 한 카밀은 진형을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그 전에 내가 란트로 있어서 명령을 내렸을 때는 내 명령에 한치의 거부도 없이 잘 따랐었는데, 지금 보니, 자기가 최고 지휘자의 역할을 맡았을 때도 아주 능숙히 잘 해내는 것 같았다. 하긴 최고의 용병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인물인데,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밀이 대열을 거의 정비시킬 무렵, 숲의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 들은 검붉은 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숲에서 한명씩 드러내는 녀석들은 언뜻 보기에도 수백여명이 넘는 것 같았다. 저 녀석들은 도대체?
"위험합니다. 최고 사제님께서는 마차안에 계십시오."
카밀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느껴지는 기운이 암흑 기운, 아무리 플라타니오의 축복을 받은 옷을 입고 있어도 상대를 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리고 스승님 때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뻔히 눈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가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카밀 경, 그럴 수는 없어요. 저들은 보통 방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니."
난 이 모습으로 카밀 앞에서 보통 말할 때와는 달리 조금 강한 어조로 카밀에게 말을 한 후, 난 클라리 일당을 이끌고 마차에서 내렸다. 추기경의 마차에서도 추기경과 그의 일행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추기경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암흑신의 사제들입니다. 저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군요. 일단 제가 해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추기경은 내게 그렇게 말을 한 다음, 네크로멘서를 상대할 때처럼, 카밀 녀석들과 복사들 사이를 지나, 적들의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암흑신의 사제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오! 우리의 위대하신 평화위원장님이 아니십니까? 추기경 예하. 정말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암흑신의 사제들 앞으로 나선 녀석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추기경에게 말을 했다. 음침한 목소리, 그다지 표시는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그 말속에서 적대감이 물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네, 네 녀석은!"
추기경은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그 녀석을 향해 이야기를 했다. 추기경의 말을 들은 녀석은 곧 후드를 벗어 자신의 얼굴을 들어냈다. 반쯤 벗겨진 잿빛 머리와 햇빛을 거의 쬐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탁한 눈빛은 보는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고 있었다.
"하하, 고귀하신 추기경께서 그래도 미천한 절 알아봐 주시는군요. 이 거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려."
추기경의 얼굴 흐르는 식은땀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조금 떨어진 이 곳에서도 보였다. 왠지 굳어 보이는 추기경의 얼굴, 네크로멘서와의 싸울 때보다 더 표정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거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비슷한 성향의 신일지라도 두 신의 신성력이 동시에 사용되면 충돌이 이러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추기경의 옆에서 제대로 거들지도 못하고 일단 카밀 녀석들 틈에서 만약을 대비한 채 물러나 있었다.
"켄테루알 페미네티즈, 네 녀석 죽은 것이 아니었더냐?"
추기경은 굳은 목소리로 앞에선 암흑신의 사제를 향해 말을 했다. 그러자 사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곤 추기경에게 답을 하였다.
"이단 심판소가 당신의 손에 제거된 후, 당신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려 왔었죠. 그리고 결국 이렇게 당신을 상대할만한 힘을 얻었지. 세티아수라님의 추기경의 권능이 강한지 유하네리스 따위 신의 추기경의 권능이 강한지 한 번 이 자리에서 비교해 보도록 하지요."
암흑신의 추기경? 헛, 암흑신은 다른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을 좋아한다던 말이 사실은 사실이었나보군, 옳지 않은 방향이었더라도 이단 심판소 소속이었다면 유하네리스 신도였다는 말일테니.
"무슨 소릴 하는거냐! 그 분을 또다시 욕되게 하지마라! 너 따위와 비교하기 위해 신께서 권능을 하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추기경은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암흑신의 사제에게 호통을 쳤다. 추기경의 큰 덩치에 어울리는 호탕한 일갈, 확실히 외모나 성격은 추기경보다는 오히려 장군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두고 보도록 하죠."
암흑신의 사제는 그 말을 마친 다음.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뒤에 있던, 다른 사제들과 함께 동시에 암흑신의 언어로 추정되는 의미 모를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유하네리스의 복사들 역시 추기경의 뒤에 대열을 맞추어 서서 유하네리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모여드는 두 신의 기운, 태양신 유하네리스와 암흑신 세티아수라의 상반된 두 기운이 서서히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추기경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두 기운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하며, 주위에는 엄청난 속도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난 아이스 쉴드를 쳐서 카밀 녀석들이 그 기운에 휩쓸리지 않도록 대비를 시켰다. 쩝,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개개인의 실력은 유하네리스 측이 월등했지만 인원수의 열세 때문에 두 신의 상반된 기운은 한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로부터 마음속으로 고통과 괴로움의 감정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이 느낌은? 난 끝없이 몰려드는 고통의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 들꽃들의 소리? 그 순간 난 정신이 혼미해 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그만 하세요!"
내 말과 동시에 갑자기 내 주위에 엄청난 양의 흰 빛 기운이 몰리더니 양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꼭, 예전에 신성 마법 진을 설치하고 기도문을 읊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 기운이 빠르게 퍼져나가며 충돌하고 있던 두 신의 기운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의 감정, 이 모두가 들꽃들의 감정이 모여 그렇게 된 것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으로는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아파왔다. 꼭 내가 둘로 나눠진 듯한 느낌을 받으며,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갑자가 조용히진 주위, 그런데 순간, 그 틈을 노리고 켄테루알이라 불렸던 암흑신의 사제가 추기경을 향해 급히 기운을 모운 다음 쏘아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잠잠해 졌던 분노의 감정이 다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들꽃들도 모든 것의 원흉이 그라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주위에서 흰빛의 기운이 모여들며 이번에는 그 암흑신의 사제를 향해 기운이 집중되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흑신의 사제가 쏘아보낸 검붉은 빛의 기운을 상쇄시켜버리고 그대로 녀석의 몸을 흰빛의 기운이 꿰뚫어 버렸다.
작은 들꽃들의 분노, 난 그들의 감정을 대신했을 뿐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언뜻 들었다. 신성력을 쓴 후유증 때문일까? 온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난 이번에도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힘이 없는 상황, 또한 이성과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더욱더 괴리되는 내 감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혼란함을 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식의 끈을 그냥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