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2장 여신의 사제(2)
푸른바람 BlueWind·2003. 1. 26. PM 4:56:12·조회 2431·추천 73
에피소드 76 여신의 사제-2
봄의 따스함에 온통 연두빛으로 물든 공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난 공원의 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꽤 한적해 보이는 공원은 분명 내가 처음 보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익숙함과 친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휴."
내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저절로 내 쉬어지는 한숨, 이번에도 몸이 내 의지를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꿈속인 것 같다는 느낌이 언뜻 들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꽤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여자 드레스였다. 옛날 옷과 관련된 책에서 본적이 있는 듯한 드레스, 여자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이 두 번째라는 것이 떠오르며 다시한번 왠지 클라리와 황제에게 원망이 들었다. 쩝.
지금 '나'인 듯한 여자는 뭔가 고민이 있는지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과 안타까움, 고민과 같은 감정이 내 마음속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이유일까?
"그래, 힘내야지!"
한참동안이나 고민을 하던 '나'는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더니, 조금 마음이 풀린 듯 웃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이 왠지 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나저나 지금 '나'인 여자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전에도 꿈에서 본적이 있는 세인트와 무척 닮은 잘생긴 녀석이 이쪽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때문일까?
그 순간 왠지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며, 왠지 모를 반가움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눈으로 들어온 존재는 역시 예전 꿈에서 본적이 있는 듯 느껴지는 엘프였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느껴지는 이 설레임, 그리고 이 기쁨은 도대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내 몸은 내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센!"
내 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 엘프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쩝, 정말 꿔서는 안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라니, 조금 오늘은 조금 늦었군요.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 엘프는 조심스럽게 날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의 몸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 하지만 왠지 거부감보다는 지금 저절로 움직이고 있는 '나'에게서 안도와 편안함과 같은 감정이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휴
"아니에요. 센.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 걸요."
나는 잠시후 그 엘프의 품에서 벗어나 센이라 불린 엘프의 옆에 서서 그의 한쪽 팔을 붙잡고 걸음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공원은 따스한 햇빛과 어울려 꽤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 센. 그런데 잠시 할말이 있어요."
다시 우울해 지는 내 마음,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입을 열어 힘없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무척이나 마음이 아파왔다. 그 엘프는 나의 힘없는 말에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라니?"
그 엘프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한 마음이 더욱더 날 감싸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저, 이제 센을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집안에 일이 생겨서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
지금의 나는 조금 떨림이 느껴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센이란 엘프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몰려드는 안타까움과 슬픔이란 감정,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너무 마음이 아팠다.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니. 한동안 만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엘프는 조금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날 붙잡으며 말을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결국 지금 '나'인 존재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미안, 미안해요. 센.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그 말을 마치며, 나는 고개를 숙인 뒤,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날 센이란 엘프는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의 덜컹거리는 진동이 느껴지며 난 눈을 조금 떴다. 이놈의 신성력은 도대체 한번 심하게 쓰기만 하면 기절을 해버리니, 그만큼 강한 능력이었지만, 솔직히 난 그다지 새로운 힘에 대한 욕망은 없었다. 신성력이 없어도 웬만해서 죽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까 말이다. 힘이란 것은 생기면 생길수록 그 책임이 커진다는 사실을 최근들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이오니스 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제국 역시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내 충실한 부하들까지 희생한 덕택에 이오니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수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식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와같은 임무를 맡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어! 주인님, 깨어났어?"
귓속으로 들어오는 클라리의 목소리, 난 누워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기침을 몇 번 쿨럭하고 마른기침을 했다. 확실히 과다한 기운을 사용한 까닭인지 몸상태가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곤해 난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휴. 난 아직도 멍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었고, 아침 무렵인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 사악한 티티가 왜 동경의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걸까? 흐흠, 불길해.
"일은 어떻게 됐어?"
난 피곤함에 몸에서 힘을 빼고 뒤의 의자에 몸을 기대며, 클라리에게 물었다. 클라리는 한참동안이나 날 가만히 지켜보더니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암흑신의 추기경은 아무래도 죽어버린 것 같고,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저 앞에 용병 아저씨, 아니 카밀 경하고 요한 추기경님이 가뿐히 처리해 버렸지. 추기경님이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꽤 힘들어졌을 번했다고 했어. 하지만 또 쓰러져 버리면 어떻게 해! 요즘에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으면서."
클라리의 질책에 난 그냥 웃을 뿐이었다. 다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휴. 그나저나 나도 좀 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매번 쓰러져 버리면, 정말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매번 이렇게 다짐을하고서도 꼭 쓰러질 일이 생기니 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빈혈 걸린 여자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매번 쓰러지는지 모르겠다.
"라네티스 최고사제님~!"
살갑게 날 부르는 이 정체는? 난 의아함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티티가 있었다. 그런데 티티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쳐다보며 뭔가 존경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그러시나요? 티티 사제?"
난 티티가 '라네티스'라 불렀으므로, '라네티스'에 알맞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정말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내가 부르자 부끄럽다는 듯 조금 움츠려들었던 티티가 조심스럽게 날 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 다크엘프가 갑자기 왜 이러지? 소피가 저런 행동을 하면 조금 이해는 하겠지만, 지금 소피는 그냥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낮에 정말 아름다우셨어요. 라네티스님.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저 놈의 다크 엘프는 내가 란트 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라네티스란 호칭을 너무나 익숙하게 부르며 내게 말을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 라네티스란 인물에 대해 완전히 넘어가 버린 걸까? 확실히 그런 기미가 없지 않았다. 물론, 이성적인 그런 감정이라기 보다는, 뭔가 위대한 존재를 향한 맹목적인 동경, 그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았다. 하, 정말 할말이 없군.
난 황당함에 그냥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점점 폭이 좁아지는 강줄기, 이제 얼마가지 않아 미르센티 강을 건너 테베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올 것 같았다. 디세느 다리와 같이 큰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력과 자금이 드는데다, 미르센티강은 배가 다니는 운송통로로도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류에는 큰다리를 건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류의 폭이 좁아지는 지점 중 적당한 곳에 소규모의 다리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주인님아,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
흐흠, 그러고 보니, 꼬박 하루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군. 클라리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느끼지 못했는데, 배가 조금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내 대답에 클라리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옆에 놓여져 있던 바구니에서 간단한 음식들을 꺼내는 것이었다. 클라리는 뭔가 어설픈 듯 하면서도 꽤 세심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오히려 클라리의 숨겨진 본모습을 느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클라리 자신이나 황제등의 클라리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해들은 클라리에 대한 이야기로 추론해 볼 때, 클라리의 성격이 분명 지금의 이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클라우 그 녀석과의 일 때문에 이런 성격으로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로서는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웃음으로 그 슬픔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써는 그런 클라리의 행동에 특별히 질책을 한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맛있게 드세요. 우리 아름다우신 최고 사제님."
난 클라리의 말을 무시하고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주접스럽게 음식을 먹는 스타일이 아닌 나였으므로 천만다행으로 식사시에 특별히 이미지 관리를 하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 모두가 어릴 때, 엄마의 교육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식사예절이나 손님에 대한 예절 같은 것은 꽤 엄격한 편이셨으니. 그 덕택에 최근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서 예의범절 때문에 망신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은 것 같았다. 훗, 어쨌든 엄마도 신분을 감추고 계셨지만, 공주는 어쩔 수 없는 공주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마차가 달려감에 따라 우리는 멀리 계곡 사이를 연결하는 연붉은빛 돌로 지어진 다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디세느다리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아기자기함이 많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다리를 뒤덮고 있는 오랜 연륜의 흔적 역시 다리가 세워진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엘프나 드위프들의 솜씨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 다리로 올라서는 길 앞에 국경을 지키고 있는 리투안의 병사들, 또 다리 너머에 있는 테베 신성기사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예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말의 속도를 멈추어 마차의 옆으로 다가온 카밀이 창을 통해서 말을 해왔다. 정중한 어투, 하지만 그래도 꽤 진심이 느껴졌기에 난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흐흠. 불쌍한 카밀 녀석, 내가 란트라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있겠지? 아마, 저 녀석은 평생동안 내가 란트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게 될 것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러해야 했다.
"네, 이제 조금 좋아진 것 같아요. 카밀경.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흐흠. 내가 말해놓고도 왠지 닭살이 돋는건 왜일까? 거의 열흘에 가까운 시간을 이 목소리로 보냈음에도 가끔씩 내가 말하고도 내가 놀라는 일이 생기곤 했다.
"아, 아닙니다. 아, 그리고 별일이 생기지 않으면 오늘 안으로는 테베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하."
내 말에 카밀은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하더니, 말을 더듬으며 답을 했다. 정말, 요즘엔 이렇게 부하들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어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트레스에 일찍이 폭주를 하거나 해서, 이 옷을 찢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다리로 다가가는데 리투안 국경수비대의 복장을 한 병사들의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인원수로 보건데 저 병력으로 공격을 해오지는 않을 것 같고,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런데 역시나 우리가 다가서자 우리의 진로를 국경수비대가 막았다. 급히 카밀이 그쪽으로 다가가서 통행증을 보였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지나갈 수 없음을 표시했다. 도대체, 무슨? 그런데 카밀이 곤란한 표정을 하고선 마차쪽으로 돌아왔다.
"예하, 송구스럽게도 저들이 다리의 통행을 거부했습니다. 누구든지 통행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중앙정부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 정상적인 이유에서라면 통행을 제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다리는 다른 곳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성도시 테베를 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테베같은 경우에는 30년 전의 전쟁에서 신성기사단을 파견해 제국을 도와줬던 곳이기 때문에 그 곳으로 향하는 길을 제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슨이유라고 하던가요?"
만약, 전시라서 그렇다는 핑계를 댄다면 무엇인가 다른 음모 같은 것이 있는게 틀림이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핑계이겠지만, 또한 테베를 향하는 길을 차단하는 이유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이라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마케이아 영주가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테네이오스 측의 농간일 수도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우리 일행을 막기 위한 방법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 쪽을 보니, 다리 건너에 있던 테베 신성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리투안 국경수비대에게 항의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흐흠. 그래도 유하네리스 교단의 추기경쯤 되는 인물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은 테베측으로 볼 때는 큰 모욕일 수도 있었다.
"누구의 명령인지 알아보도록 하세요. 카밀경"
만약 섭정인 스승님의 명령이라면 곤란한 점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마차안에 있는 일행이 아니라면 여기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내 특권이 하나 있었으니까. 카밀은 수비대 쪽으로 다시 말을 몰아가더니 국경수비대와 대화를 나눈 다음 명령서를 들고, 다시 마차쪽으로 돌아왔다.
"부총리 대신 가이우스 폰 힐튼 공의 명령이랍니다."
카밀은 그 말을 하며 내게 명령서를 내밀었다. 확실히 그 곳에는 가이우스 녀석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서명을 한 것이라던지 필체가 분명 가이우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마을에 있을 때 가이우스 녀석과 여러 가지 연락을 해온 나로서는 가이우스의 필체 정도는 확실하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뭔가 짙은 음모의 냄새가 느껴졌지만 지금 나는 그 것을 조사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제가 직접 가보도록 하지요."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나보다는 먼저 추기경과 그의 일행들이 나와 국경수비대장으로 보이는 기사를 붙잡고 점잖게 항의를 하고 있었지만 기사는 단지 고개를 계속 저을 뿐이었다. 훗, 과연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난 뒤에 클라리 일당을 대동하고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국경수비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해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쪽이 담당자 분이신가요?"
내가 기사를 보며 이야기를 하자 기사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답을 했다.
"네, 예하."
내 신분을 알아보기는 알아본다는 것인가? 흐흠. 확실히 플라타니오의 최고 사제라는 직책이 함부로 할 직책은 아닌 것 같았다. 이래저래 조심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군. 그나저나 아무래도 저 기사는 단지 부총리 대신의 명령을 수행할 뿐인 것 같았다. 고지식한 전형적인 기사의 스타일, 그런 고지식한 스타일이나까 관세나 밀입국, 난민해결등 여러 가지 일들을 법에 맞게 해결해야할 위치에 있는 국경수비대 초소장의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다시 한번 부탁드리죠. 신의 발걸음을 인간이 막을 수는 없는 일. 저희가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말을 들은 기사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다시 고개를 저으며 답을 했습니다.
"기사란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예하."
흐흠, 할 수 없군. 아테네이오스 국왕에게도 통했던 방법이 이 기사에게는 통하지 않다니. 이 방법은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서류를 하나 빼들었다. 그리고 서류의 봉인을 뜯어서 기사 앞에 펼쳤다. 비밀 감사관 증명 서류, 최근에는 그다지 쓸 일이 없었고, 왠지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는 듯한 느낌이 그다지 사용하지 않으려고 생각을 해왔는데 이렇게 쓸일이 생기다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이라고 나 스스로 위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휴, 기사는 내가 펼친 금빛이 나는 서류를 보더니 급히 무릎을 꿇었다.
"비밀 감사관은 총리대신에 준하는 위치를 가지는 법, 고작 부총리령으로 비밀 감사관의 행로를 막을 수는 없지 않나요? 그리고 그 부총리령은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군요. 제 권한으로 그 명령은 취소하도록 하지요."
"네, 예하. 물론입니다. 어찌 제가 비밀 감사관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기사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명령을 따를 것을 표시했다. 훗, 나중에 가이우스 녀석을 만나면 한소리 해야 되겠다. 부총리령 따위로 내 발걸음을 막는 일이 일어나게 하다니. 추기경과 루이등 일행들 역시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지만 난 조용히 서류를 다시 챙겨넣고, 마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추기경 역시 어깨를 조금 으쓱하고는 허탈한 듯한 느낌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몇번 웃은다음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후후, 추기경에게 한방 먹였다는 쾌감에 기분이 왠지 좋아졌다. 나도 참.
내가 마차에 오르고 서서히 일행들은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국경수비대 초소장쯤 되어 보이는 그 기사는 내가 지나갈 때까지 허리를 굽혀 배웅을 했다. 흐흠, 확실히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스타일처럼 보이는군. 그런데 정말 가이우스 녀석 무슨 속셈이었을까? 냉정한 그 녀석이 이런 무리수를 둘 리가 없었다. 확실히 무엇인가 다른 것이 분명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제를 노렸다고 밖에 추정할 수 없는 아테네이오스 마법사의 공격, 그리고 리투니아에서의 괴물 사냥꾼 녀석들과의 일, 필리포니스와 마케이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그리고 이오니스의 그 부시장 녀석의 행동. 그리고 지금의 일, 분명 미심쩍은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제국의 관료제 전반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내부의 적,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흐흠, 아무래도 이번 일을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법, 그렇다고 누가 적일지도 모를 포세트립톤으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으로썬 단지, 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최고사제의 부탁인데 플라타니오 신께서도 조금 고려는 해주시겠지.
봄의 따스함에 온통 연두빛으로 물든 공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난 공원의 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꽤 한적해 보이는 공원은 분명 내가 처음 보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익숙함과 친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휴."
내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저절로 내 쉬어지는 한숨, 이번에도 몸이 내 의지를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꿈속인 것 같다는 느낌이 언뜻 들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꽤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여자 드레스였다. 옛날 옷과 관련된 책에서 본적이 있는 듯한 드레스, 여자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이 두 번째라는 것이 떠오르며 다시한번 왠지 클라리와 황제에게 원망이 들었다. 쩝.
지금 '나'인 듯한 여자는 뭔가 고민이 있는지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과 안타까움, 고민과 같은 감정이 내 마음속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이유일까?
"그래, 힘내야지!"
한참동안이나 고민을 하던 '나'는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더니, 조금 마음이 풀린 듯 웃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이 왠지 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나저나 지금 '나'인 여자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전에도 꿈에서 본적이 있는 세인트와 무척 닮은 잘생긴 녀석이 이쪽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때문일까?
그 순간 왠지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며, 왠지 모를 반가움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눈으로 들어온 존재는 역시 예전 꿈에서 본적이 있는 듯 느껴지는 엘프였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느껴지는 이 설레임, 그리고 이 기쁨은 도대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내 몸은 내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센!"
내 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 엘프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쩝, 정말 꿔서는 안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라니, 조금 오늘은 조금 늦었군요.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 엘프는 조심스럽게 날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의 몸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 하지만 왠지 거부감보다는 지금 저절로 움직이고 있는 '나'에게서 안도와 편안함과 같은 감정이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휴
"아니에요. 센.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 걸요."
나는 잠시후 그 엘프의 품에서 벗어나 센이라 불린 엘프의 옆에 서서 그의 한쪽 팔을 붙잡고 걸음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공원은 따스한 햇빛과 어울려 꽤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 센. 그런데 잠시 할말이 있어요."
다시 우울해 지는 내 마음,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입을 열어 힘없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무척이나 마음이 아파왔다. 그 엘프는 나의 힘없는 말에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라니?"
그 엘프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한 마음이 더욱더 날 감싸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저, 이제 센을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집안에 일이 생겨서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
지금의 나는 조금 떨림이 느껴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센이란 엘프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몰려드는 안타까움과 슬픔이란 감정,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너무 마음이 아팠다.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니. 한동안 만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엘프는 조금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날 붙잡으며 말을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결국 지금 '나'인 존재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미안, 미안해요. 센.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그 말을 마치며, 나는 고개를 숙인 뒤,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날 센이란 엘프는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의 덜컹거리는 진동이 느껴지며 난 눈을 조금 떴다. 이놈의 신성력은 도대체 한번 심하게 쓰기만 하면 기절을 해버리니, 그만큼 강한 능력이었지만, 솔직히 난 그다지 새로운 힘에 대한 욕망은 없었다. 신성력이 없어도 웬만해서 죽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까 말이다. 힘이란 것은 생기면 생길수록 그 책임이 커진다는 사실을 최근들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이오니스 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제국 역시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내 충실한 부하들까지 희생한 덕택에 이오니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수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식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이와같은 임무를 맡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어! 주인님, 깨어났어?"
귓속으로 들어오는 클라리의 목소리, 난 누워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기침을 몇 번 쿨럭하고 마른기침을 했다. 확실히 과다한 기운을 사용한 까닭인지 몸상태가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곤해 난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휴. 난 아직도 멍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었고, 아침 무렵인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 사악한 티티가 왜 동경의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걸까? 흐흠, 불길해.
"일은 어떻게 됐어?"
난 피곤함에 몸에서 힘을 빼고 뒤의 의자에 몸을 기대며, 클라리에게 물었다. 클라리는 한참동안이나 날 가만히 지켜보더니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암흑신의 추기경은 아무래도 죽어버린 것 같고,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저 앞에 용병 아저씨, 아니 카밀 경하고 요한 추기경님이 가뿐히 처리해 버렸지. 추기경님이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꽤 힘들어졌을 번했다고 했어. 하지만 또 쓰러져 버리면 어떻게 해! 요즘에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으면서."
클라리의 질책에 난 그냥 웃을 뿐이었다. 다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휴. 그나저나 나도 좀 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매번 쓰러져 버리면, 정말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매번 이렇게 다짐을하고서도 꼭 쓰러질 일이 생기니 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빈혈 걸린 여자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매번 쓰러지는지 모르겠다.
"라네티스 최고사제님~!"
살갑게 날 부르는 이 정체는? 난 의아함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티티가 있었다. 그런데 티티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쳐다보며 뭔가 존경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그러시나요? 티티 사제?"
난 티티가 '라네티스'라 불렀으므로, '라네티스'에 알맞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정말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내가 부르자 부끄럽다는 듯 조금 움츠려들었던 티티가 조심스럽게 날 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 다크엘프가 갑자기 왜 이러지? 소피가 저런 행동을 하면 조금 이해는 하겠지만, 지금 소피는 그냥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낮에 정말 아름다우셨어요. 라네티스님.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저 놈의 다크 엘프는 내가 란트 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라네티스란 호칭을 너무나 익숙하게 부르며 내게 말을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 라네티스란 인물에 대해 완전히 넘어가 버린 걸까? 확실히 그런 기미가 없지 않았다. 물론, 이성적인 그런 감정이라기 보다는, 뭔가 위대한 존재를 향한 맹목적인 동경, 그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았다. 하, 정말 할말이 없군.
난 황당함에 그냥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점점 폭이 좁아지는 강줄기, 이제 얼마가지 않아 미르센티 강을 건너 테베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올 것 같았다. 디세느 다리와 같이 큰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력과 자금이 드는데다, 미르센티강은 배가 다니는 운송통로로도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류에는 큰다리를 건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류의 폭이 좁아지는 지점 중 적당한 곳에 소규모의 다리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주인님아,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
흐흠, 그러고 보니, 꼬박 하루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군. 클라리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느끼지 못했는데, 배가 조금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내 대답에 클라리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옆에 놓여져 있던 바구니에서 간단한 음식들을 꺼내는 것이었다. 클라리는 뭔가 어설픈 듯 하면서도 꽤 세심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오히려 클라리의 숨겨진 본모습을 느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클라리 자신이나 황제등의 클라리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해들은 클라리에 대한 이야기로 추론해 볼 때, 클라리의 성격이 분명 지금의 이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클라우 그 녀석과의 일 때문에 이런 성격으로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로서는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웃음으로 그 슬픔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써는 그런 클라리의 행동에 특별히 질책을 한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맛있게 드세요. 우리 아름다우신 최고 사제님."
난 클라리의 말을 무시하고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주접스럽게 음식을 먹는 스타일이 아닌 나였으므로 천만다행으로 식사시에 특별히 이미지 관리를 하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 모두가 어릴 때, 엄마의 교육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식사예절이나 손님에 대한 예절 같은 것은 꽤 엄격한 편이셨으니. 그 덕택에 최근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서 예의범절 때문에 망신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은 것 같았다. 훗, 어쨌든 엄마도 신분을 감추고 계셨지만, 공주는 어쩔 수 없는 공주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마차가 달려감에 따라 우리는 멀리 계곡 사이를 연결하는 연붉은빛 돌로 지어진 다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디세느다리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아기자기함이 많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다리를 뒤덮고 있는 오랜 연륜의 흔적 역시 다리가 세워진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엘프나 드위프들의 솜씨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 다리로 올라서는 길 앞에 국경을 지키고 있는 리투안의 병사들, 또 다리 너머에 있는 테베 신성기사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예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말의 속도를 멈추어 마차의 옆으로 다가온 카밀이 창을 통해서 말을 해왔다. 정중한 어투, 하지만 그래도 꽤 진심이 느껴졌기에 난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흐흠. 불쌍한 카밀 녀석, 내가 란트라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있겠지? 아마, 저 녀석은 평생동안 내가 란트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게 될 것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러해야 했다.
"네, 이제 조금 좋아진 것 같아요. 카밀경.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흐흠. 내가 말해놓고도 왠지 닭살이 돋는건 왜일까? 거의 열흘에 가까운 시간을 이 목소리로 보냈음에도 가끔씩 내가 말하고도 내가 놀라는 일이 생기곤 했다.
"아, 아닙니다. 아, 그리고 별일이 생기지 않으면 오늘 안으로는 테베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하."
내 말에 카밀은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하더니, 말을 더듬으며 답을 했다. 정말, 요즘엔 이렇게 부하들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어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트레스에 일찍이 폭주를 하거나 해서, 이 옷을 찢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다리로 다가가는데 리투안 국경수비대의 복장을 한 병사들의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인원수로 보건데 저 병력으로 공격을 해오지는 않을 것 같고,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런데 역시나 우리가 다가서자 우리의 진로를 국경수비대가 막았다. 급히 카밀이 그쪽으로 다가가서 통행증을 보였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지나갈 수 없음을 표시했다. 도대체, 무슨? 그런데 카밀이 곤란한 표정을 하고선 마차쪽으로 돌아왔다.
"예하, 송구스럽게도 저들이 다리의 통행을 거부했습니다. 누구든지 통행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중앙정부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 정상적인 이유에서라면 통행을 제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다리는 다른 곳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성도시 테베를 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테베같은 경우에는 30년 전의 전쟁에서 신성기사단을 파견해 제국을 도와줬던 곳이기 때문에 그 곳으로 향하는 길을 제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슨이유라고 하던가요?"
만약, 전시라서 그렇다는 핑계를 댄다면 무엇인가 다른 음모 같은 것이 있는게 틀림이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핑계이겠지만, 또한 테베를 향하는 길을 차단하는 이유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이라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마케이아 영주가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테네이오스 측의 농간일 수도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우리 일행을 막기 위한 방법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 쪽을 보니, 다리 건너에 있던 테베 신성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리투안 국경수비대에게 항의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흐흠. 그래도 유하네리스 교단의 추기경쯤 되는 인물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은 테베측으로 볼 때는 큰 모욕일 수도 있었다.
"누구의 명령인지 알아보도록 하세요. 카밀경"
만약 섭정인 스승님의 명령이라면 곤란한 점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마차안에 있는 일행이 아니라면 여기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내 특권이 하나 있었으니까. 카밀은 수비대 쪽으로 다시 말을 몰아가더니 국경수비대와 대화를 나눈 다음 명령서를 들고, 다시 마차쪽으로 돌아왔다.
"부총리 대신 가이우스 폰 힐튼 공의 명령이랍니다."
카밀은 그 말을 하며 내게 명령서를 내밀었다. 확실히 그 곳에는 가이우스 녀석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서명을 한 것이라던지 필체가 분명 가이우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마을에 있을 때 가이우스 녀석과 여러 가지 연락을 해온 나로서는 가이우스의 필체 정도는 확실하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뭔가 짙은 음모의 냄새가 느껴졌지만 지금 나는 그 것을 조사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제가 직접 가보도록 하지요."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나보다는 먼저 추기경과 그의 일행들이 나와 국경수비대장으로 보이는 기사를 붙잡고 점잖게 항의를 하고 있었지만 기사는 단지 고개를 계속 저을 뿐이었다. 훗, 과연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난 뒤에 클라리 일당을 대동하고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국경수비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해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쪽이 담당자 분이신가요?"
내가 기사를 보며 이야기를 하자 기사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답을 했다.
"네, 예하."
내 신분을 알아보기는 알아본다는 것인가? 흐흠. 확실히 플라타니오의 최고 사제라는 직책이 함부로 할 직책은 아닌 것 같았다. 이래저래 조심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군. 그나저나 아무래도 저 기사는 단지 부총리 대신의 명령을 수행할 뿐인 것 같았다. 고지식한 전형적인 기사의 스타일, 그런 고지식한 스타일이나까 관세나 밀입국, 난민해결등 여러 가지 일들을 법에 맞게 해결해야할 위치에 있는 국경수비대 초소장의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다시 한번 부탁드리죠. 신의 발걸음을 인간이 막을 수는 없는 일. 저희가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말을 들은 기사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다시 고개를 저으며 답을 했습니다.
"기사란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예하."
흐흠, 할 수 없군. 아테네이오스 국왕에게도 통했던 방법이 이 기사에게는 통하지 않다니. 이 방법은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서류를 하나 빼들었다. 그리고 서류의 봉인을 뜯어서 기사 앞에 펼쳤다. 비밀 감사관 증명 서류, 최근에는 그다지 쓸 일이 없었고, 왠지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는 듯한 느낌이 그다지 사용하지 않으려고 생각을 해왔는데 이렇게 쓸일이 생기다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이라고 나 스스로 위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휴, 기사는 내가 펼친 금빛이 나는 서류를 보더니 급히 무릎을 꿇었다.
"비밀 감사관은 총리대신에 준하는 위치를 가지는 법, 고작 부총리령으로 비밀 감사관의 행로를 막을 수는 없지 않나요? 그리고 그 부총리령은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군요. 제 권한으로 그 명령은 취소하도록 하지요."
"네, 예하. 물론입니다. 어찌 제가 비밀 감사관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기사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명령을 따를 것을 표시했다. 훗, 나중에 가이우스 녀석을 만나면 한소리 해야 되겠다. 부총리령 따위로 내 발걸음을 막는 일이 일어나게 하다니. 추기경과 루이등 일행들 역시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지만 난 조용히 서류를 다시 챙겨넣고, 마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추기경 역시 어깨를 조금 으쓱하고는 허탈한 듯한 느낌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몇번 웃은다음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후후, 추기경에게 한방 먹였다는 쾌감에 기분이 왠지 좋아졌다. 나도 참.
내가 마차에 오르고 서서히 일행들은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국경수비대 초소장쯤 되어 보이는 그 기사는 내가 지나갈 때까지 허리를 굽혀 배웅을 했다. 흐흠, 확실히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스타일처럼 보이는군. 그런데 정말 가이우스 녀석 무슨 속셈이었을까? 냉정한 그 녀석이 이런 무리수를 둘 리가 없었다. 확실히 무엇인가 다른 것이 분명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제를 노렸다고 밖에 추정할 수 없는 아테네이오스 마법사의 공격, 그리고 리투니아에서의 괴물 사냥꾼 녀석들과의 일, 필리포니스와 마케이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그리고 이오니스의 그 부시장 녀석의 행동. 그리고 지금의 일, 분명 미심쩍은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제국의 관료제 전반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내부의 적,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흐흠, 아무래도 이번 일을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법, 그렇다고 누가 적일지도 모를 포세트립톤으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으로썬 단지, 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최고사제의 부탁인데 플라타니오 신께서도 조금 고려는 해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