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외전 네번째 이야기 30년전 어느 전투(1)
푸른바람 BlueWind·2003. 2. 7. PM 7:19:11·조회 2427·추천 80
흐흠 재수생활을 하다보니
컴퓨터로 칠시간이 별로 없군요. 그래서 오늘은 네번째이야기의
삼분의 일 정도만 올립니다. 다음에 시간이 생기면 나머지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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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4 30년 전 어느 전투
3월, 남에서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북부산맥을 넘어 얼어붙었던 파나단 지역의 차가운 들판을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하지만 길고 길었던 겨울은 시련의 한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려는 듯 햇빛이 비치지 않는 음지의 곳곳에 아직 차가운 눈과 얼음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을 품은 작은 들풀들은 따스한 남풍의 재촉에 굳은 땅을 뚫고 자신의 연둣빛 작은 잎을 욺 틔우고 있었다.
따스한 남풍의 뒤를 따라 파나단의 높은 고원지대를 넘어 일단의 인마가 행군을 하고 있었다. 노란색 바탕에 금빛 실로 장미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든 병사들,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곳곳에 상처를 입어 그 광택을 잃었으나 그들 손에 들린 창은 날카롭게 손질되어 맑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 눈 하나하나에는 어려운 시련을 이겨낸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굳은 의지와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인간 병사들 사이에서 허리엔 단검을 차고, 손에는 큰 활을 든 뾰족한 귀의 엘프들의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인간과 엘프들로 이루어진 항마 연합군 소속의 병사 15만명, 그 숫자만으로도 무시할만한 전력의 병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평범한 15만명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전쟁, 혹은 항마 대전이라 불린 수년간의 전투에서 수많은 몬스터와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이렇게 살아남았던 병사들이었다. 또한 전쟁을 인간과 엘프들의 승리로 이끈 진정한 주역들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들이 길고도 길었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 전쟁이 시작되었던 곳, 피투안의 수도 피투니아를 향해 진군을 하고 있었다.
대륙 남부의 리투니아에서 바로 이 곳, 파나단 지역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적들의 주력인 몬스터와 언데드 군단을 궤멸시킨 그들의 길 앞에는 이제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다고 보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투니아 성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그리고 단 한번도 점령을 당한적이 없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피투안으로서는 이들을 맞아 얼마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바다를 통해 해군과 코리안트 연합군이 지원 공격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피투안의 운명은 폭풍 앞에 놓여진 가느린 촛불에 비유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 행렬의 선봉에 선 오천의 기마대를 이끌고 있는 존재. 그는 가슴부근에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맑은 푸른빛이 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주인만큼이나 당당한 느낌을 주는 진남빛의 말을 탄 채 행렬의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전체적으로 여려 보이는 그의 외모는 기사보다는 학자의 그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수십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의 그 것보다 더 강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행군을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말을 탄 병사 한 명이 길의 앞쪽에서 급히 달려왔다.
"장군, 척후병입니다."
푸른 빛 갑옷을 입은 기사의 한 발걸음 뒤에서 말을 몰고 있던 녹 빛 망토의 기사가 말을 했다. 장군이라 불린 푸른 빛 갑옷의 기사는 그 기사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 뒤를 따르던 수천의 군마가 일사분란하게 멈춰섰다.
척후병은 선두에선 기사에게 다가온 뒤, 기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다음 입을 열었다.
"장군, 언덕 너머의 들판에 일단의 병사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기사는 전혀 예상 밖의 척후병의 보고에 조금 의아함이 담긴 눈빛으로 척후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적들의 구성은 어떠하던가?"
짧게 말을 하는 기사, 그의 목소리는 그 외모만큼이나 맑았지만 또한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오직 인간들로 구성된 기마병 삼천 여명이었습니다."
척후병은 인간이란 말을 강조하며 기사에게 말을 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난 척후병의 보고에 표시를 내진 않았지만 기사는 조금 당황스러운 느낌이 마음속을 감돌았다. 항마 전쟁이란 이름이 붙을 만큼, 적의 대부분이 몬스터와 언데드였고, 지금까지 전쟁을 겪어오며, 단 한번도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적을 상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 적에게 3천이나 되는 기마병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기사에게는 의외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군."
녹빛 망토를 두른 기사의 말에 그는 잠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휘하는 선발대로만으로 그들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여왕이 이끄는 중군을 기다릴 것인가 하는 선택을 놓고 고민을 하던 그는 일단 자신의 눈으로 상황을 살펴보고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일단 적들을 살펴보고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군."
젊은 장군의 대답에 녹 빛 망토의 기사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장군은 다시 척후병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입을 열었다.
"수고했네. 그럼 폐하께도 보고를 드리도록 해주게."
"네, 장군."
그의 명령에 척후병은 허리를 굽히며 답을 했다. 그리고 척후병은 다시 말을 몰아 중군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척후병이 떠난 후, 기사는 다시 손을 들어 부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푸른 갑옷의 기사는 바로 후에 성기사단장에 오르는 블루이글 티베리우스 폰 힐튼, 현 성기사 제 3군단장,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녹빛 망토의 기사는 후에 북부 수비대장이 되는 그린 라이언 메넬리오 비아니스, 19살 그리고 27살.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들치고는 아직 어리다면 어리다고도 볼 수 있는 그들이었다.
넓은 들판,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파나단 지역에서는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피투안의 수도 피투니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그 들판에는 삼천여명의 기사들이 방어진이 아닌 공격진을 펼친 채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병사들, 그들 중 단 한명도 그들의 승리를 꿈꾸고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그들의 적이 될 연합군들의 행동이 그릇된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적들에게 그들이 있었음을 기억시키기 위해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마녀의 농간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조국이 적의 말발굽에 맥없이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파나단령 소속 병사들, 지금 마녀의 저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동파나단 영주 유린 린 리시나가 흑마녀의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물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덕택에 흑마녀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가운데에서 윤기가 나는 황빛의 털을 가진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유린 린 리시나의 외아들 다니엘 린 리시나는 아직 17살밖에 안된 소년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병사들을 이끌고 적을 막으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전쟁터로 항하였다.
"적들이 언덕 너머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부장의 보고에 다니엘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실전, 하지만 그는 이 전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린 린 리시나는 그의 하나뿐인 혈육을 전쟁터로 보냈고, 다니엘은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사리지 않는 기사들의 정석적인 지형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 검한자루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은 린 리시나 가문의 사람들다운 행동이었다.
이미 피투니아 성안에는 제대로 된 병사들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전의를 잃은 패잔병 몇과 마녀의 깊은 저주로 인해 마녀가 죽은 뒤에도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언데드와 몬스터 병사들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피투안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기정 사실화가 되어 있었다.
회색 망토를 두른 소년기사 다니엘은 병사들 쪽을 향해 말을 돌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을 한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단지 3천, 하지만 적들의 병력은 15만명이다. 아마 너희들 대부분이 우리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예전의 흑태자 리투안께서는 우리와 같은 삼천의 기마병으로 30만의 바이킹들을 물리치셨다. 그 때의 상황이 지금 우리보다 유리하다고는 결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쳐도 좋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임을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다니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병사는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런 병사들을 보며 조금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군들이여, 동파나단의 백성들이여, 그리고 자랑스러운 피투안의 국민들이여! 우리의 선조들이 일군 이 땅을 적들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짓밟힐 수는 없지 않는가! 리투안의 꼬맹이들에게 여전히 피투안이 건재함을 보이자! 수백년간 매서운 혹한과, 이민족들로부터 이땅을 지켜온 피투안 기마대의 기상을 보여주자!"
기교는 없었지만 진실함이 담긴 다니엘의 연설은 병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니엘을 향한 병사들의 시선은 이미 주군의 아들을 향한 눈빛을 넘어서 그들 자신의 목숨을 맡겨도 충분한 그런 존재를 향한 시선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맑은 목소리의 다니엘이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피투안의 병사들은 일제히 칼을 빼들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대지를 가득 매우는 함성, 15만명의 적을 앞에 둔 3천명의 병사들의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 아니 자부심이 담긴 함성이었다.
갓 언덕을 넘어선 티베리우스와 그가 이끄는 항마연합군 선발대에게 들판으로부터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티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서는 척후병의 말처럼 수천명의 기마대가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장군, 아무래도 기습은 아닌 듯 싶습니다."
메넬리오의 말에 티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습이나 매복은 아니라는 사실에 티베는 조금 긴장을 풀고, 들판에 잇는 피투안 기마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들을 살펴보던 티베는 의외의 사실에 조금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메넬리오, 저 진형은 공격진형이 아닌가?"
티베의 질문에 메넬리오는 다시 한번 기마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티베를 향해 답을 했다.
"네, 장군. 기마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공격형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했던 적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들이 당황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언데드와 몬스터로 구성된데다가 흑마법사나 마녀들이 지휘를 하는 부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격을 해올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무모하군. 단 3천으로 15만의 군대를 향해 돌격진형을 취하다니, 최후의 발악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목숨 따위는 이미 포기했다는 것인가?"
티베는 조금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였다. 메넬리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전쟁터에서 보낸 그였기에 티베의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티베는 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신중히 병사들을 진군시켰다. 기습은 하지 않아도 어쨌든 지금 이 곳은 전쟁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휘관은 언제나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했다.
언덕을 넘어 들판 쪽으로 내려가는 티베의 눈에 적들의 모습이 조금씩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색빛 망토를 두르고 검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 티베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곧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린 리시나 가문이었군. 그렇지 피투안에는 아직 그들이 남아있었지."
티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어 작게 혼잣말을 하였다. 린 리시나 가문, 리투안에도 그 명성이 자자한 가문이었다. 피투안과 리투안이 두나라로 나뉘기 전, 필립 1세의 북벌이 있던 시절부터 뛰어난 무공을 세웠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주군에 대한 충정과 관련된 이야기는 수많은 기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었다.
티베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에 들었던 수많은 의문점이 모두 해결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티베는 느꼈다. 흑마녀가 주도하던, 어떻게 보면 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전쟁이었음에도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들이 나라가 패망해가는 이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것이었다. 병력의 많고 적음 따위는 이미 그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사실이라는 것 역시 티베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나라와 주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으므로. 티베는 그들과 자신과의 동질감이 느껴지며 그들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언덕 아래의 들판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온 티베는 병사들의 진형을 상대와 똑같은 모습으로 배치하였다. 그 역시 기사였기에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기사와 기사의 결투, 티베는 지금 이 상황이 그 것과 비슷함을 떠올렸다. 그 자신이 언제나 꿈꿔왔던 그런 이상적인 전투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전투는 너무나 무자비했다. 감정이 거의 없는 몬스터와 언데드와의 계속된 전투, 그 참혹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메넬리오. 저들은 우리들만으로 상대하도록 한다."
티베의 말을 들은 메넬리오 역시 티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티베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는 이상 말고도 현실적인 전략적 이유도 있었다. 티베와 메넬리오의 눈에 들어온 적 병사들의 눈빛,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눈빛이 아니었다. 저런 적들을 상대할 때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결코 아군에 득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저들과 본군이 직접 대결을 하게 된다면 넓은 들판으로 된 지형의 특성상 저들은 방어선을 뚫고 본군의 보병들을 공격하게될 가능성이 높았다. 항마연합군의 보병들은 몬스터들과의 전투에 익숙해져 있어 아무래도 대 기병전에 대한 대응은 약할 것이기 때문에 생각 외로 큰 피해가 발생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병사들에게 뛰어든 피투안 기마대 병사들의 그러한 처절한 죽음이 리투안군에 대한 피투안 백성들의 적개심을 유발하여 전국민적인 봉기를 유도할 수도 있었다. 결국, 가장 최선의 방법은 비슷한 병력의 기마대로 정정당당하게 저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었다.
티베는 병사들을 뒤에 둔 채 혼자 말을 조금 앞으로 몰아갔다. 메넬리오가 뒤따르려 했지만 티베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티베가 앞으로 나오자 맞은 편에서도 지휘관의 옷을 입은 한 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티베는 자신의 검을 높이 뽑아 숭고한 정신을 가진 기사들에 대한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항마연합군 제 3군단장, 그리고 피투안 정벌군의 선봉을 맡은 티베리우스 폰 힐튼이오. 린 리시나 가문의 기사께 예를 표하는 바이오."
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있음에도 쥐죽은 듯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던 들판 가득 티베의 맑지만 강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티베는 항복을 권고한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일체 꺼내지 않았다. 그 말에 군사를 돌릴 것이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으리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고결한 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티베의 말이 끝난 후 맞은 편에 있던 다니엘 역시 검을 들어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동파나단 회색기사단장 다니엘 린 리시나입니다. 장군의 높으신 무명은 많이 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니엘은 말을하며 조금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적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동경하던 인물이 지금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유시인들을 통해 전해 들었던 블루이글 티베리우스 폰 힐튼 경의 모습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런 인물과 검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년기사의 가슴이 뜨거워지기에는 충분했다. 이미, 다니엘 그의 머릿속에서 두려움이나 걱정과 같은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니엘이 투구를 쓰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나이를 알 수 없었던 티베는 무척 어린 목소리가 그에게서 들려오자 조금 의외의 눈으로 맞은 편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나이가 많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고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항마연합군의 주요인물들도 대부분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예를 표한 두 기사는 말을 돌려 다시 그들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두 기사는 거의 동시에 칼을 뽑아들었다.
"전군 돌격!"
두 기사의 호령소리와 함께, 조용하던 들판은 순식간에 지축을 꼭 울리는 듯, 만여마리의 말이 내는 엄청난 크기의 말발굽 소리로 가득찼다.
컴퓨터로 칠시간이 별로 없군요. 그래서 오늘은 네번째이야기의
삼분의 일 정도만 올립니다. 다음에 시간이 생기면 나머지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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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4 30년 전 어느 전투
3월, 남에서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북부산맥을 넘어 얼어붙었던 파나단 지역의 차가운 들판을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하지만 길고 길었던 겨울은 시련의 한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려는 듯 햇빛이 비치지 않는 음지의 곳곳에 아직 차가운 눈과 얼음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을 품은 작은 들풀들은 따스한 남풍의 재촉에 굳은 땅을 뚫고 자신의 연둣빛 작은 잎을 욺 틔우고 있었다.
따스한 남풍의 뒤를 따라 파나단의 높은 고원지대를 넘어 일단의 인마가 행군을 하고 있었다. 노란색 바탕에 금빛 실로 장미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든 병사들,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곳곳에 상처를 입어 그 광택을 잃었으나 그들 손에 들린 창은 날카롭게 손질되어 맑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 눈 하나하나에는 어려운 시련을 이겨낸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굳은 의지와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인간 병사들 사이에서 허리엔 단검을 차고, 손에는 큰 활을 든 뾰족한 귀의 엘프들의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인간과 엘프들로 이루어진 항마 연합군 소속의 병사 15만명, 그 숫자만으로도 무시할만한 전력의 병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평범한 15만명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전쟁, 혹은 항마 대전이라 불린 수년간의 전투에서 수많은 몬스터와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이렇게 살아남았던 병사들이었다. 또한 전쟁을 인간과 엘프들의 승리로 이끈 진정한 주역들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들이 길고도 길었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이 전쟁이 시작되었던 곳, 피투안의 수도 피투니아를 향해 진군을 하고 있었다.
대륙 남부의 리투니아에서 바로 이 곳, 파나단 지역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적들의 주력인 몬스터와 언데드 군단을 궤멸시킨 그들의 길 앞에는 이제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다고 보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투니아 성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그리고 단 한번도 점령을 당한적이 없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피투안으로서는 이들을 맞아 얼마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바다를 통해 해군과 코리안트 연합군이 지원 공격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피투안의 운명은 폭풍 앞에 놓여진 가느린 촛불에 비유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 행렬의 선봉에 선 오천의 기마대를 이끌고 있는 존재. 그는 가슴부근에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맑은 푸른빛이 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주인만큼이나 당당한 느낌을 주는 진남빛의 말을 탄 채 행렬의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전체적으로 여려 보이는 그의 외모는 기사보다는 학자의 그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수십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의 그 것보다 더 강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행군을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말을 탄 병사 한 명이 길의 앞쪽에서 급히 달려왔다.
"장군, 척후병입니다."
푸른 빛 갑옷을 입은 기사의 한 발걸음 뒤에서 말을 몰고 있던 녹 빛 망토의 기사가 말을 했다. 장군이라 불린 푸른 빛 갑옷의 기사는 그 기사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 뒤를 따르던 수천의 군마가 일사분란하게 멈춰섰다.
척후병은 선두에선 기사에게 다가온 뒤, 기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다음 입을 열었다.
"장군, 언덕 너머의 들판에 일단의 병사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기사는 전혀 예상 밖의 척후병의 보고에 조금 의아함이 담긴 눈빛으로 척후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적들의 구성은 어떠하던가?"
짧게 말을 하는 기사, 그의 목소리는 그 외모만큼이나 맑았지만 또한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오직 인간들로 구성된 기마병 삼천 여명이었습니다."
척후병은 인간이란 말을 강조하며 기사에게 말을 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난 척후병의 보고에 표시를 내진 않았지만 기사는 조금 당황스러운 느낌이 마음속을 감돌았다. 항마 전쟁이란 이름이 붙을 만큼, 적의 대부분이 몬스터와 언데드였고, 지금까지 전쟁을 겪어오며, 단 한번도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적을 상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 적에게 3천이나 되는 기마병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기사에게는 의외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군."
녹빛 망토를 두른 기사의 말에 그는 잠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휘하는 선발대로만으로 그들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여왕이 이끄는 중군을 기다릴 것인가 하는 선택을 놓고 고민을 하던 그는 일단 자신의 눈으로 상황을 살펴보고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일단 적들을 살펴보고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군."
젊은 장군의 대답에 녹 빛 망토의 기사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장군은 다시 척후병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입을 열었다.
"수고했네. 그럼 폐하께도 보고를 드리도록 해주게."
"네, 장군."
그의 명령에 척후병은 허리를 굽히며 답을 했다. 그리고 척후병은 다시 말을 몰아 중군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척후병이 떠난 후, 기사는 다시 손을 들어 부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푸른 갑옷의 기사는 바로 후에 성기사단장에 오르는 블루이글 티베리우스 폰 힐튼, 현 성기사 제 3군단장,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녹빛 망토의 기사는 후에 북부 수비대장이 되는 그린 라이언 메넬리오 비아니스, 19살 그리고 27살.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들치고는 아직 어리다면 어리다고도 볼 수 있는 그들이었다.
넓은 들판,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파나단 지역에서는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피투안의 수도 피투니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그 들판에는 삼천여명의 기사들이 방어진이 아닌 공격진을 펼친 채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병사들, 그들 중 단 한명도 그들의 승리를 꿈꾸고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그들의 적이 될 연합군들의 행동이 그릇된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적들에게 그들이 있었음을 기억시키기 위해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마녀의 농간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조국이 적의 말발굽에 맥없이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파나단령 소속 병사들, 지금 마녀의 저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동파나단 영주 유린 린 리시나가 흑마녀의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물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덕택에 흑마녀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가운데에서 윤기가 나는 황빛의 털을 가진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유린 린 리시나의 외아들 다니엘 린 리시나는 아직 17살밖에 안된 소년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병사들을 이끌고 적을 막으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전쟁터로 항하였다.
"적들이 언덕 너머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부장의 보고에 다니엘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실전, 하지만 그는 이 전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린 린 리시나는 그의 하나뿐인 혈육을 전쟁터로 보냈고, 다니엘은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사리지 않는 기사들의 정석적인 지형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 검한자루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은 린 리시나 가문의 사람들다운 행동이었다.
이미 피투니아 성안에는 제대로 된 병사들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전의를 잃은 패잔병 몇과 마녀의 깊은 저주로 인해 마녀가 죽은 뒤에도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언데드와 몬스터 병사들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피투안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기정 사실화가 되어 있었다.
회색 망토를 두른 소년기사 다니엘은 병사들 쪽을 향해 말을 돌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을 한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단지 3천, 하지만 적들의 병력은 15만명이다. 아마 너희들 대부분이 우리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예전의 흑태자 리투안께서는 우리와 같은 삼천의 기마병으로 30만의 바이킹들을 물리치셨다. 그 때의 상황이 지금 우리보다 유리하다고는 결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쳐도 좋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임을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다니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병사는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런 병사들을 보며 조금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군들이여, 동파나단의 백성들이여, 그리고 자랑스러운 피투안의 국민들이여! 우리의 선조들이 일군 이 땅을 적들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짓밟힐 수는 없지 않는가! 리투안의 꼬맹이들에게 여전히 피투안이 건재함을 보이자! 수백년간 매서운 혹한과, 이민족들로부터 이땅을 지켜온 피투안 기마대의 기상을 보여주자!"
기교는 없었지만 진실함이 담긴 다니엘의 연설은 병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니엘을 향한 병사들의 시선은 이미 주군의 아들을 향한 눈빛을 넘어서 그들 자신의 목숨을 맡겨도 충분한 그런 존재를 향한 시선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맑은 목소리의 다니엘이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피투안의 병사들은 일제히 칼을 빼들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대지를 가득 매우는 함성, 15만명의 적을 앞에 둔 3천명의 병사들의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 아니 자부심이 담긴 함성이었다.
갓 언덕을 넘어선 티베리우스와 그가 이끄는 항마연합군 선발대에게 들판으로부터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티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서는 척후병의 말처럼 수천명의 기마대가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장군, 아무래도 기습은 아닌 듯 싶습니다."
메넬리오의 말에 티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습이나 매복은 아니라는 사실에 티베는 조금 긴장을 풀고, 들판에 잇는 피투안 기마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들을 살펴보던 티베는 의외의 사실에 조금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메넬리오, 저 진형은 공격진형이 아닌가?"
티베의 질문에 메넬리오는 다시 한번 기마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티베를 향해 답을 했다.
"네, 장군. 기마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공격형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했던 적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들이 당황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언데드와 몬스터로 구성된데다가 흑마법사나 마녀들이 지휘를 하는 부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격을 해올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무모하군. 단 3천으로 15만의 군대를 향해 돌격진형을 취하다니, 최후의 발악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목숨 따위는 이미 포기했다는 것인가?"
티베는 조금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였다. 메넬리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전쟁터에서 보낸 그였기에 티베의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티베는 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신중히 병사들을 진군시켰다. 기습은 하지 않아도 어쨌든 지금 이 곳은 전쟁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휘관은 언제나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했다.
언덕을 넘어 들판 쪽으로 내려가는 티베의 눈에 적들의 모습이 조금씩 자세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색빛 망토를 두르고 검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 티베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곧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린 리시나 가문이었군. 그렇지 피투안에는 아직 그들이 남아있었지."
티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어 작게 혼잣말을 하였다. 린 리시나 가문, 리투안에도 그 명성이 자자한 가문이었다. 피투안과 리투안이 두나라로 나뉘기 전, 필립 1세의 북벌이 있던 시절부터 뛰어난 무공을 세웠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주군에 대한 충정과 관련된 이야기는 수많은 기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었다.
티베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에 들었던 수많은 의문점이 모두 해결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티베는 느꼈다. 흑마녀가 주도하던, 어떻게 보면 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전쟁이었음에도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들이 나라가 패망해가는 이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것이었다. 병력의 많고 적음 따위는 이미 그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사실이라는 것 역시 티베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나라와 주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으므로. 티베는 그들과 자신과의 동질감이 느껴지며 그들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언덕 아래의 들판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온 티베는 병사들의 진형을 상대와 똑같은 모습으로 배치하였다. 그 역시 기사였기에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기사와 기사의 결투, 티베는 지금 이 상황이 그 것과 비슷함을 떠올렸다. 그 자신이 언제나 꿈꿔왔던 그런 이상적인 전투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전투는 너무나 무자비했다. 감정이 거의 없는 몬스터와 언데드와의 계속된 전투, 그 참혹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메넬리오. 저들은 우리들만으로 상대하도록 한다."
티베의 말을 들은 메넬리오 역시 티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티베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는 이상 말고도 현실적인 전략적 이유도 있었다. 티베와 메넬리오의 눈에 들어온 적 병사들의 눈빛,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눈빛이 아니었다. 저런 적들을 상대할 때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결코 아군에 득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저들과 본군이 직접 대결을 하게 된다면 넓은 들판으로 된 지형의 특성상 저들은 방어선을 뚫고 본군의 보병들을 공격하게될 가능성이 높았다. 항마연합군의 보병들은 몬스터들과의 전투에 익숙해져 있어 아무래도 대 기병전에 대한 대응은 약할 것이기 때문에 생각 외로 큰 피해가 발생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병사들에게 뛰어든 피투안 기마대 병사들의 그러한 처절한 죽음이 리투안군에 대한 피투안 백성들의 적개심을 유발하여 전국민적인 봉기를 유도할 수도 있었다. 결국, 가장 최선의 방법은 비슷한 병력의 기마대로 정정당당하게 저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었다.
티베는 병사들을 뒤에 둔 채 혼자 말을 조금 앞으로 몰아갔다. 메넬리오가 뒤따르려 했지만 티베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티베가 앞으로 나오자 맞은 편에서도 지휘관의 옷을 입은 한 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티베는 자신의 검을 높이 뽑아 숭고한 정신을 가진 기사들에 대한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항마연합군 제 3군단장, 그리고 피투안 정벌군의 선봉을 맡은 티베리우스 폰 힐튼이오. 린 리시나 가문의 기사께 예를 표하는 바이오."
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있음에도 쥐죽은 듯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던 들판 가득 티베의 맑지만 강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티베는 항복을 권고한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일체 꺼내지 않았다. 그 말에 군사를 돌릴 것이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으리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고결한 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티베의 말이 끝난 후 맞은 편에 있던 다니엘 역시 검을 들어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동파나단 회색기사단장 다니엘 린 리시나입니다. 장군의 높으신 무명은 많이 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니엘은 말을하며 조금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적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동경하던 인물이 지금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유시인들을 통해 전해 들었던 블루이글 티베리우스 폰 힐튼 경의 모습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런 인물과 검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년기사의 가슴이 뜨거워지기에는 충분했다. 이미, 다니엘 그의 머릿속에서 두려움이나 걱정과 같은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니엘이 투구를 쓰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나이를 알 수 없었던 티베는 무척 어린 목소리가 그에게서 들려오자 조금 의외의 눈으로 맞은 편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나이가 많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고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항마연합군의 주요인물들도 대부분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예를 표한 두 기사는 말을 돌려 다시 그들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두 기사는 거의 동시에 칼을 뽑아들었다.
"전군 돌격!"
두 기사의 호령소리와 함께, 조용하던 들판은 순식간에 지축을 꼭 울리는 듯, 만여마리의 말이 내는 엄청난 크기의 말발굽 소리로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