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외전 네번째 이야기 30년전 어느전투(2)

푸른바람 BlueWind·2003. 2. 14. PM 1:56:23·조회 2195·추천 78
선두에 선 기사들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창을 겨누었다. 수 백개에 이르는 날카롭게 다듬어진 창들이 상대방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선두의 기사들의 대열이 엇갈림과 동시에 엄청난 소리와 함께 창이 충돌하며, 부실한 창들은 부러져버렸고 아니면 기사들의 두꺼운 갑옷을 뚫고 들어가 기사들을 말에서 떨어트렸다.

티베와 다니엘은 둘 모두 능숙한 기사로 그들을 향한 수많은 날카로운 창끝들을 피했다. 그리고 적들을 향해 뛰어든 그들은 칼을 휘두르며, 능숙하게 전쟁터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창을 던져버린 기사들이 각자 칼을 뽑아 든 뒤, 전투에 참가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복장을 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5천의 선발대를 맞아 회색망토를 두른 3천의 기마대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고 있었다. 명마의 산지인 동파나단령에서 어릴 때부터 말과 함께 살아온 그들이 죽음까지 각오하였기에 수많은 전쟁터를 거쳐온 5천의 베테랑 병사들을 맞아서도 그다지 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기마병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전투, 그 대치상황을 뚫고 티베리우스는 그 자신의 별명처럼 한 마리의 독수리와 같이 빠르게 회색망토들 사이로 돌진하며, 그들의 진형을 흩트려 놓고 있었다. 한줄기의 푸른색 빛줄기와 같은 그의 돌진을 회색 기사들은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그의 검을 감싸는 푸른빛의 검기는 빠른 검의 움직임과 함께 티베리우스의 주위에 푸른빛 막을 펼쳐놓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가득한 전쟁터만 아니었다면, 마치 한 폭의 그림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티베와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로 인해 전투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발견한 다니엘은 급히 자신의 주위에 있던 호위기사들을 이끌고 티베가 있는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도저히 첫 전투를 경험하고 있는 어린 지휘관의 행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대처, 린 리시나란 이름이 헛되지 않았음을 다니엘은 증명을 해주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회색 기사들 사이를 별다른 장애 없이 누비고 있었던 티베는 그의 앞에 나타난 다니엘을 발견하고는 말을 자신의 진남빛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는 표시가나지 않을 정도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었다. 무인이라면 설혹 적일지라도 뛰어난 소질을 가진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상대와 정당한 방법으로 검을 나눌 수 있는 것 또한 또 다른 기쁨이었다.

다니엘 역시 자신이 그렇게 동경하던 존재와 검을 맞댈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어옴을 느꼈다. 지금 이 곳은 전쟁터, 그리고 이 대결에 자신의 목숨이 결려 있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지만, 다니엘 역시 나이는 어려도 타고난 무인은 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기사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아무말없이 말을 몰아 서로에게 다가섰다. 진남빛의 티베의 말과 밝은 황색의 털을 가진 다니엘의 말이 서로 뒤엉키며 두 기사의 검역시 맑은 소리를 내며 충돌을 하였다.

티베는 많은 병사들 사이를 뚫으며 돌격을 하던 때와는 달리 그리 빠르지 않는 조금 여유가 느껴지는 듯한 검의 움직임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느리다고도 할 수 있는 검의 움직임,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니엘이 공격을 하기 위해 검을 휘두를 때면 어느 순간엔가 검을 움직여 그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쓸데없는 동작이 거의 없는 체력의 소모를 최대한 줄여주는 움직임, 티베리우스의 그리 많지 않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많은 경험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다니엘은 그런 티베를 상대로 빠른 쾌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수련과정을 거치며 다니엘 역시 자신에게 알맞다고 생각되어지는 검술을 몸에 익혔던 것이었다. 실제 린 리시나 가문의 수련과정은 그 과정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함은 물론이요,  각각의 임무를 마칠 때쯤이면 거의 반사상태가 되기가 일수였다. 그런 모든 수련과정을 이겨낸 다니엘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영웅 티베리우스 폰 힐튼 앞에서도 조금의 위축됨 없이 검을 들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린 린 리시나가 어린 다니엘을 전쟁터로 자신있게 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최소한 자신의 아들이 회색기사단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이 빠르게 티베의 가슴 쪽으로 검을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티베는 전쟁터에서 다져진 뛰어난 기마술을 선보이며 재빠르게 뒤로 말을 물려 다니엘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움직임이 조금 흩트려진 것을 노리고 순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말을 다니엘 쪽으로 접근 시켰다. 그리고 푸른빛 검광과 함께 다니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다니엘 역시 자신의 빠른 검술을 활용하여 급히 티베의 검을 차단했다.

두 기사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검무,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기사 사이에는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그렇게 격렬한 몸놀림을 보였음에도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티베에 반해, 다니엘은 어느새 얼굴 가득 땀이 흐르며 급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왠지 여유가 느껴지는 티베의 움직임과 사력을 다하여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다니엘, 경험의 차이가 불러온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다니엘의 결정적인 오산이 하나 있었다. 항마 연합군 선발대에는 블루이글 티베리우스 폰 힐튼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 라이온 메넬리오 비아니스, 티베리우스의 부장이 되기 전 한동안 살아남은 북부지역의 기사들을 지휘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던 그도 있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 폰 힐튼이란 거대한 존재에 정신이 팔려, 다니엘은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두 지휘관이 대결을 펼치고 있는 사이 메넬리오의 지휘아래 선발대의 병사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회색 기사단을 조금씩 밀어 붙였다. 세력이 비슷한 군대 사이의 전투에서 지휘관의 유무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발대에 비해 출전경험이 아무래도 부족한 회색 기사단의 병사들로써는 지휘관이 없는 상황에서의 유연한 대처가 아무래도 어려웠다. 처절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용감히 싸웠던 회색 기사단의 병사들이었지만 이미 전투의 흐름은 선발대 쪽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티베와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던 다니엘이 그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주위에 있던 호위기사들의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다니엘은 곧 지금 전투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훌륭하게 싸운 다니엘이었지만, 전쟁에서는 승패가 우선인 것, 다니엘은 자신의 어리석음에대해 분노를 하였다. 지휘관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자신의 부대를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니엘은 자기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만 검을 거두어야 되겠습니다."

다니엘은 조금 굳은 어조로 티베가 듣건 안 듣건 상관없이 말을 한 다음, 일단 티베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티베를 향해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왠지 모를 분노가 섞인 공격, 순간 다니엘의 검에서 하늘빛의 기운이 약하게 감돌았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미쳐 깨닫지 못했다. 이번에도 티베는 그런 다니엘의 공격을 여유있게 피했다. 하지만 분명히 공격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티베의 얼굴에 약하게 상처가 생겨 피가 조금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다급한 다니엘은 그 것을 보지 못한 채 말을 돌렸지만 당사자였던 티베는 전혀 의외의 상황에 잠시 당황하여 다니엘을 보내 주고 말았다.

'하늘빛 기운, 그래 검기였어!'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지만 자신의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는 사실을 티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 것도 자신보다 더 어린 소년기사에게 당했다는 것은 티베로서는 전혀 뜻밖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그였으므로 그런 자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아깝군. 적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티베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아가는 다니엘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말 역시 동파나단 산의 명마였으나 블루 드레곤의 피가 섞였다고 전해지는 티베의 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엘은 티베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었던 다니엘은 그런 티베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경험의 부족, 그 것이 다니엘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검이 도달할 범위까지 다니엘을 따라 붙은 티베는 다니엘의 투구를 칼등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티베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다니엘은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머리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충격에 다니엘은 결국 정신을 잃고 기절을 했다. 기절한 다니엘이 말에서 떨어지기 전, 티베는 가볍게 그를 받아들었다.

"적장을 사로잡았다."

힘찬 티베의 목소리가 들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뒤이어 선발대의 병사들 역시 티베를 따라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적장이 사로잡혔다."

"블루 이글께서 적장을 사로잡으셨다!"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커져가며, 결국 저항을 계속하던 얼마 남지 않은 회색기사단의 병사들은 칼을 놓고 허탈한 표정으로 말 위에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항마 연합군 선발대의 승리였다. 그리고 꼭 시간을 맞춘 듯 티베가 넘어왔던 언덕 위로 노란색 바탕에 장미 문양이 새겨진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항마 연합군의 본군, 여왕이 이끄는 십만여의 병사들이었다.



천막 안 한 곳에 놓여 있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있던 다니엘은 머리 뒤 쪽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여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다니엘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자신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신의 갑옷은 벗겨져 천막의 한 곳에 고이 잘 정돈되어 놓여져 있었지만, 검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전투 중이었는데, 왜 내가 여기에?'

이런 저런 혼돈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다니엘의 눈에 천막에 새겨진 장미 문양의 무늬가 들어왔다. 리투안의 최고 마법사인 옐로우 로즈를 상징하는 노란 장미 문양, 그 문양을 보는 순간 다니엘은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렇군, 결국 포로가 된 것인가?'

다니엘은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희생된 병사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더욱더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곁에 검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천막의 입구에 있던 천이 올려지며 누군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연갈빛의 긴 머리, 그리고 맑은 녹색의 눈,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다니엘은 곧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미카 공주님! 살아 계셨군요!"

그녀를 보는 다니엘은 언제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냐는 듯 밝은 얼굴로 변해 있었다. 전쟁터를 누비던 그 강인하던 모습과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너무나 순수한 소년의 표정을 다니엘은 하고 있었다.

"다니엘 경,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미카는 그런 다니엘을 보며 조금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칠 동안 손수 간호를 하며 그를 돌보아 왔던 그녀였으므로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네, 공주님.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마녀의 손에 공주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니엘은 너무나 큰 기쁨에 조금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미카를 향해 이야기를 했다. 지금 그에게 있어 이 이상으로 기쁜 일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다니엘의 말을 들은 미카는 곧 어두운 표정이 되어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다니엘을 향해 말을 했다.

"네, 원래라면 그렇게 죽었어야 했겠죠.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도움인지, 아니면 그녀의 장난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어요."

다니엘은 공주의 말속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그 역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표정이 되어 공주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괜한 말을 꺼내서..."

다니엘의 말이 끝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동안 적막이 흘렀다. 어떻게 보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는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마음 속 가득한 슬픔 역시 가볍게 흘려 보낼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그 적막을 깨고 미카는 밝은 목소리로 다니엘을 향해 말을 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니엘 경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박게 웃으며 말을 하는 공주, 하지만 그녀의 맑은 녹색의 눈 속에는 여전히 깊은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미카의 말에 다니엘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한명은 공주, 그리고 또 한명은 대영주의 아들이라는 위치상 어린 시절부터 만나온 그들, 높디높은 신분의 장벽 속에서 아마도 서로가 그들에게는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망국의 공주, 그리고 패전한 장수로서의 상대방의 마음을 너무나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미카 공주님께서 여왕 폐하께 간청하시어 무사히 돌아가게 되었으니 공주님을 생각해서라도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말게."

다니엘에게 그의 검을 돌려주며, 티베리우스는 말을 하였다. 들판 가득 세워진 항마연합군의 숙영지를 뒤에 두고, 티베리우스와 선발대의 기사들이 풀려난 회색 기사단의 기사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어쨌든, 포로가 되었던 이들이었기에 말과 갑옷은 모두 돌려받았지만, 다니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무기를 돌려 받지 못한 상태였다. 회색 기사단의 병사들이 혹시나 다시 또 무모한 행동을 취할까 하는 걱정에 리투안 수뇌부에서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공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말 위에 올라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던 다니엘은 티베리우스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왕궁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실 생각인 것 같으시더군. 우리로서는 미카 공주님께서 피투안을 맡아주시길 바라지만, 공주님의 의견이 그러시니 어쩔 수 없을 것 같네."

티베는 조금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로 다니엘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말을 마친 뒤 잠시 후 티베는 무엇인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래! 내가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군."

갑작스러운 티베의 행동에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의아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을 마친 티베는 급히 자신의 허릿춤에 있는 주머니를 풀더니 작은 봉투 두 개를 꺼내 다니엘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게, 미카 공주님의 서신 일세."

다니엘은 티베가 내민 두 개의 봉투를 받아들고는 많은 감정이 느껴지는 눈으로 그 봉투를 쳐다보았다. 한 곳에는 '유린 린 리시나'란 이름이 그리고 나머지 하나에는 '다니엘 린 리시나'란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다니엘은 그 봉투 두 개를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품속에 고이 넣었다.

"다니엘 경, 이제 기운을 내게나. 자네에게는 피투안이란 이름보다 더 소중한 동파나단의 백성들이 있지 않나. 이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그들을 돌볼 차례인 것 같네."

정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 티베를 다니엘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쟁터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티베 역시 다니엘 자신보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에 비해 다니엘 자기 자신이 모든 면에서 너무나 모자란 것 같다는 느낌을 다니엘은 받았다.

"내가 노파심에 한 말이니 너무 신경을 쓰지는 말게나. 단지 자네보다 조금 경험이 많은 선배의 조언이라고만 여겨주게."

19살 아직 어리다고 볼 수도 있는 나이, 하지만 다른 평범한 이들과는 달리 사춘기 시절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보낸 티베리우스였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티베리우스 경, 충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다니엘은 그다지 힘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 속에는 슬픔이란 감정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런 다니엘의 대답을 들으며, 티베는 그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설혹, 훗날에 다니엘이 리투안에 큰 위험을 안겨주는 존재가 될지라도 그 것은 알 수 없는 먼 훗날의 일, 지금 이 상황에서 티베는 다니엘과 같은 인재가 이런 일로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말의 방향을 동파나단령을 향한 길쪽으로 돌리며, 다니엘은 티베에게 말을 했다.

"다음에 다시 장군을 뵐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에게 말을 하는 다니엘을 보며, 티베는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띄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은 크든 작든 부상을 입지 않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천여명의 기마병들 앞에 서서 차분하게 병사들을 다시 지휘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분명, 그들은 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여명의 병사들은 그들만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티베는 선발대를 향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군 사열!"

티베의 구령소리와 함께 선발대 사천여명의 병사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칼을 뽑아 들어 회색기사단의 뒤를 배웅하였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