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외전 네번째 이야기 30년전 어느 전투(3)
푸른바람 BlueWind·2003. 2. 22. PM 1:44:02·조회 2119·추천 77
늦봄인 지금도 여전히 산 정상에는 눈이 쌓여 녹지 않고 있는 북부 산맥을 뒤로하고, 상당한 높이와 웬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성벽을 가진 웅장한 성 하나가 서 있었다. 특별한 장식 없이 성에는 단지 한 자루의 검 문양만 새겨진 회색빛의 깃발만 곳곳에 걸려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동파나단령의 본성 그레이 캐슬, 피투안의 삼대 성 중 가장 장엄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는 성이었다.
그 성을 뒤로하고 일단의 인마가 성문 앞에 대열을 갖추어 서 있었다. 성문의 바로 밑에는 머리에 백발이 가득한 한 노인과 회색 빛의 망토를 두른 중년의 기사가 마주서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군, 꼭 가셔야 하시겠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 노인을 보며, 주군이라 불린 회색망토를 두른 기사는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마르틴. 나 회색 표범이 고작 이런 일에 두려움을 떨어서야 어디 병사들 앞에 설 수 있겠나."
회색 망토를 두른 남자는 동파나단의 회색표범, 항마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출몰하여 사람들을 공격하곤 하는 몬스터들을 토벌하였고, 바다나 산악지역을 통해 파나단 지역으로 침략을 해온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피투안의 마지막 남은 영웅, 다니엘 린 리시나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노인은 다니엘의 아버지 유린 린 리시나 시절부터 동파나단령의 행정관과 리시나 가문의 집사를 맡아온 마르틴 군터였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주군의 모습을 보았지만 마르틴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거듭 다니엘의 여정을 만류했다.
"그 교활한 늙은 여우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주군, 주군께서 이 곳에 계셔야지 저들도 쉽게 주군께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르틴의 만류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실제 지금 피투안 국왕 하레스에게는 다니엘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레스가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과도한 세금을 동파나단에서는 영주의 권한으로 탕감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정책에도 다니엘의 곧은 성격상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기사로서 군주에게 행하는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욕심만 큰 폭군 하레스에게 그런 것이 제대로 보일리 만무했고, 게다가 백성들에게 다니엘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더욱더 다니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레스가 다니엘에게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니엘이 피투안 최고의 지휘관인데다 동파나단의 군사력 역시 피투안의 왕실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병사들의 질까지 고려한다면 동파나단의 군대가 왕실군을 오히려 압도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다니엘이 소수의 호위병만 이끌고 적지라고도 보아도 좋을 피투니아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마르틴으로서는 다니엘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마르틴을 보며 다니엘은 조금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마르틴, 그런 소리하지 말게. 어찌 되었건 그는 우리의 조국, 피투안의 국왕이 아닌가?"
노집사 마르틴은 평소의 차분하고 냉정한 그의 모습으로는 전혀 생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감정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니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그 늙은 여유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신 적도 없으시지 않으십니까? 굳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기사도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을 듯 싶은데, 왜 꼭 그의 명령을 따르려 하시는 것입니까?"
다니엘은 마르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조금 단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아닐세. 마르틴. 그가 바르지 않은 인물인데다 정통 계승자는 아닐지라도 그 역시 피투안 베르크 대왕의 후손이 아닌가? 사논 님께서 대왕께 피로서 충성을 맹세 하셨고 지금 내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으니, 충성의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네. 그리고 옳지 않은 명령이라면, 거절하겠지만 수도의 연화에 초청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기사로써 옳지 않은 행동이란 생각이 드네. 그리고 혹시 이번 기회로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나. 피투안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연회에는 참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마르틴은 결국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마르틴은 여전히 근심히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럼 다녀오겠네."
그런 마르틴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다니엘은 밝은 목소리로 마르틴에게 말을 한 다음, 밝은 황빛의 털을 가진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몰아가는 그의 뒤를 따라 십여명의 기사들과 종자들, 그리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간의 여행, 별달리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여행, 다니엘과 그의 행렬은 이제 막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은 잘 닦여 있었고 폭 역시 꽤 넓은 편이었지만, 길 한 편에는 절벽, 그리고 반대편에는 깊은 숲이 있어서 움직임이 그리 자유롭지 못한 길이었다.
마차의 옆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다니엘을 향해 마차 안에서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가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을 하였다.
"아빠,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에 가는 거예요?"
그 목소리를 들은 다니엘은 따스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여자아이를 보며, 말을 했다.
"수도에 가고 있단다. 신디. 도착하면, 맛있는 것들 많이 사줄테니, 조금만 더 참을 수 있지?"
"정말, 맛있는 것 많이 사줄거야? 아빠?"
꼭 다짐을 받듯 말을 하는 신디를 보며 다니엘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디는 무척 기뻐하며 마차 안에 같이 타고 있던 신디의 엄마, 크리스틴을 향해 밝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엄마! 아빠가 맛인 것 많이 사주신다고 하셨어. 정말 좋겠지?"
신디의 말에 크리스틴은 부드러운 손길로 신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함이 담긴 목소리로 신디에게 답을 하였다.
"이번 여행은 신디가 제일 기쁠 것 같네? 하지만 아버님께 너무 때를 많이 쓰면 못써요."
평민 출신으로 동파나단 영주 부인이 된 그녀였지만, 그 어떤 귀족 부인보다도 자애로웠으며, 또한 고귀하고 정숙한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한 가족,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살기!'
갑자기 느껴지는 강한 살기에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었다. 하지만 그 화살은 시작에 불과했다. 숲으로부터 다니엘과 그의 일행을 향해 엄청난 숫자의 화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크리스틴, 어서 창을 닫아!"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다니엘을 보며, 크리스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신디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마차의 창을 닫았다.
"웬 녀석들이냐!"
일갈, 분노가 실린 다니엘의 외침에, 숲 가득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끝없이 날아오던 화살들도 순간 멈춰버렸다.
떨어진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활을 든 병사들의 모습, 다니엘이 대충 살펴보기에도 수백이 넘는 숫자의 병사들이었다. 산적이 아닌, 계획된 기습 다니엘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병사들 사이에서 걸어나오는 한 인물, 빛나는 갑옷을 입었고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눈빛이 무척이나 탁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눈에 들어온 그의 마음색 역시 가장 사악한 자들의 색인 검붉은 색이었다. 다니엘은 곧 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괴물 사냥꾼, 페아넬리온. 그래 네 녀석의 짓이었군."
페아넬리온이라 불린 사내는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채 다니엘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위대하신 영웅 다니엘 경.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서 제 수고를 덜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하여 이 미천한 몸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꼬는 듯한 페아넬리온의 말을 듣는 순간, 다니엘의 온몸에서 분노가 섞인 하늘 빛 기운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마르틴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이런 비겁한 방법이나 쓰는 국왕 하레스를 향한 분노가 다니엘의 마음을 가득 매웠다.
"하레스, 그 놈이 시킨 일이냐!"
다니엘은 맞은 편의 페아넬리온을 보며, 그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정통성이 없는 하레스 국왕, 아마 다니엘이 마음만 먹었다면, 동파나단 병사들을 동원하여 충분히 그를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나마 그에게도 피투안의 개국왕 피투안 베르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언젠가는 변할 것이란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르러서야 다니엘은 자신의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고귀하신 그 분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시다니, 아무래도 경께서는 반역의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다니엘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페타넬리온은 여전히 비열한 느낌이 드는 미소를 얼굴에 띄운채 답을 하였다.
"반역이라,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네 놈과 그 녀석의 목을 이 손으로 따버리고 싶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허허허."
다니엘은 허탈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을 하였다. 함정, 솔직히 다니엘은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수십년간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온 그 였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린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다니엘 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다니엘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그의 부인과 딸이 있었기에,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들까지 함정에 빠지게 된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하레스의 들쥐! 회색 표범이 네 놈의 손에 그리 쉽게 당할성 싶으냐!"
다시 주위로 다니엘의 힘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런 다니엘의 호통소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페아넬리온은 자신의 양손을 마주하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과 함께 검은 빛 기운을 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처 다니엘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 기운을 쏘아보냈다. 그 모습을 본 다니엘은 급히 자신의 검에 하늘빛 기운을 모우며, 방어를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순간, 검은 빛 기운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크리스틴과 신디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빛 기운이 방향을 트는 것을 본 다니엘은 냉정함을 잃고 당황하여 급히 마차 쪽을 향해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번 페아넬리온의 손에 검은 빛 기운이 모이며, 이번에는 정확하게 등을 돌린 다니엘을 향해 그 기운을 쏘아보냈다. 그리고 그 것을 신호로 숲으로부터 수많은 화살과 검은빛 기운들 역시 다니엘을 향해 집중되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의 기습에서 살아남은 기사 몇 명이 다니엘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중과부족이었다. 열명이 채 한되는 기사들이 막기에는 화살과 흑마법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결국, 기사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함께 고슴도치같이 화살을 온몸에 맞은 채 쓰러졌다.
마차를 향하던 검은빛 기운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다니엘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많은 검은빛 기운들이 다니엘의 등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몸을 감싸던 하늘빛 기운이 흑마법을 맞아 저항을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화살과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대로 맞은 다니엘은 곧 극심한 통증에 힘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마차 안에서 작은 창으로 상황을 살피던 크리스틴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사색이 되어 마차문을 열고 뛰쳐나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다니엘을 향해 달려갔다.
"크리스, 어서 신디를 데리고 피해."
자신을 붙잡는 크리스틴을 보며, 다니엘은 마지막 힘을 짜내 말을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다니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점점 식어 가는 다니엘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적들의 공격, 몇 명 살아남지 않은 호위 병사들이 크리스틴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화살 하나가 그들 사이를 뚫고 크리스틴의 등을 꽤 뚫었다. 연녹색의 드레스가 붉게 피로 물들며, 크리스틴은 다니엘의 차갑게 시어버린 몸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갑자기 주위의 땅이 흔들리며,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체는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최후로서는 너무나 비참한 결말이었다.
"흐흐, 미카년이나 ,아인트 녀석이나 이놈이나. 영웅이란 작자들은 이렇게 어리석다니까."
페아넬리온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며, 비웃음이 담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 쓰러진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를 넘어 마차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무엇인가 쓸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마음이 검붉은 빛이야. 시, 싫어. 무,무섭단말이야."
열러진 마차문 쪽으로 모습을 들어낸 페아넬리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신디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부들부들 떨더니 극심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을 해버렸다. 고아가되어 버린 소녀, 그래도 마차안에 있었던 까닭에 부모가 죽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다행이라 해야 할까? 운명의 여신의 선택은 아직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었다. 페아넬리온은 그런 신디의 행동을 상관하지 않고 신디의 몸을 묶은 다음 끌어내렸다.
"예쁘장한게 크면 꽤 괜찮을 것 같군. 왕자님께서 좋아하시겠어. 크크."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늘에서 서서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는 참혹했던 현장의 핏방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어난 계곡물과 함께 절벽 아래의 아직 완전히 꽃피지 못한 한 영웅과 그의 부인의 몸은 먼바다를 향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연두빛 식물들로 가득한 황궁의 정원, 그 밝은 느낌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인가 무거운 분위기가 황궁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파란색, 하얀색 할아버지!"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봄의 햇살만큼이나 밝은 느낌의 한 꼬마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다. 그 꼬마가 달려가고 있는 곳에는 푸른 망토를 두른 중년의 기사와 녹색망토를 두른 머리에 백발이 가득한 노기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꼬마의 밝은 목소리에 두 기사는 이야기를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시나 양이군요."
녹 빛 망토를 두른 노기사, 메넬리오는 그 전까지와는 달리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자기 쪽으로 달려오는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두고 푸른 망토의 티베리우스를 향해 말을 하였다.
"그래, 전에 란트 영주 곁에서 한 번 본적이 있지."
티베 역시 무엇인가 친근함이 담긴 눈으로 여자아이를 쳐다보며 메넬리오에게 답을 하였다. 아니, 여자아이를 보는 두 기사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친근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 두 기사의 눈에 담겨진 감정은 바로 그 것이었다.
자신에게 달려온 여자아이를 가볍게 안아들며, 메넬리오는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여자아이에게 말을 했다.
"리시나 양, 요즘 혼자서 심심하지는 않나요?"
여자아이는 자신을 안아든 메넬리오를 보며, 방긋 밝에 웃었다. 그리고 곧 듣는 사람까지 기분을 좋게 만드는 듯한 밝은 목소리로 메넬리오를 향해 답을 하였다.
"네, 할아버지. 하나도 심심하지 않아요!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많은데요?"
여자아이를 보는 메넬리오는 그 여자아이가 너무나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들과 손자들이 대부분인데다 유일하게 있는 딸이라고 해도 기사라는 직업을 택할 정도로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카렌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밝은 성격에 애교만점인 꼬마 신디에게 정이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신디!"
정원의 저 편에서 굵직하고 힘찬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들어냈다. 큰 키와 균형 잡힌 몸, 그리고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눈, 기사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청년기사이며 제국의 둘째 황자, 리아인 슈타이튼이었다.
"신디!"
곤란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주위를 한참이나 두리번 거리던 리아인은 곧 두 기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어서, 메넬리오의 품에 안겨있는 신디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여유있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분과 같이 있었군요. 제가 딴 곳에 정신을 쓰는 바람에 두 분을 귀찮게 만들어 드린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자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한 다음, 고개를 숙이는 리아인을 보며 메넬리오와 티베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황자님. 귀찮다니요? 이렇게 오랜만에 리시나 양을 만나니 왠지 기분이 가벼워진 듯 합니다."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리아인을 향해 메넬리오는 황급히 답을 하였다. 그리고 곁에 있던 티베 역시 메넬리오의 말을 거들었다.
"비아니스 공의 말이 옳습니다. 황자님."
두 기사의 말에 리아인은 조금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신디를 향해 고개를 돌린 리아인이 눈짓을 주자, 신디는 못 본척 고개를 팩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리시나 양, 그럼 다음에도 이 할아버지한테 꼭 다시 오세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메넬리오는 웃으며 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네 할아버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답을 하는 신디, 신디의 대답을 들은 메넬리오는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신디를 땅에 내려 놓았다. 그 순간, 신디는 주름 가득한 노기사의 볼에 살짝 보뽀를 하곤 리아인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메넬리오는 갑작스러운 꼬마 숙녀의 공격에 허허하고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을 하는 리아인을 향해 두 기사 역시 조금 허리를 굽혀 답을 하였다. 리아인가 신디가 정원 저편으로 사라진 뒤, 메넬리오는 티베를 보며 조금 씀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니엘 경이 살아있었다면, 이번에는 힘을 합칠 수 있었을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메넬리오의 말을 들은 티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그러게 말일세. 그 무능한 피투안의 멍청이들 때문에 정말 훌륭한 기사를 한명 잃어버렸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신디가 사라진 곳을 두기사는 한참동안이나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은 어느새 30년이란 세월을 뛰어 넘어 예전의 그 들판으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념이 가득찬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눈으로 자신들을 보며 그들을 향해 당당한 자세로 말을 몰아오던 회색 망토를 두른 한 소년기사의 모습이 있었다.
-외전 4 30년전 어느전투 끝-
그 성을 뒤로하고 일단의 인마가 성문 앞에 대열을 갖추어 서 있었다. 성문의 바로 밑에는 머리에 백발이 가득한 한 노인과 회색 빛의 망토를 두른 중년의 기사가 마주서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군, 꼭 가셔야 하시겠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 노인을 보며, 주군이라 불린 회색망토를 두른 기사는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마르틴. 나 회색 표범이 고작 이런 일에 두려움을 떨어서야 어디 병사들 앞에 설 수 있겠나."
회색 망토를 두른 남자는 동파나단의 회색표범, 항마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출몰하여 사람들을 공격하곤 하는 몬스터들을 토벌하였고, 바다나 산악지역을 통해 파나단 지역으로 침략을 해온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피투안의 마지막 남은 영웅, 다니엘 린 리시나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노인은 다니엘의 아버지 유린 린 리시나 시절부터 동파나단령의 행정관과 리시나 가문의 집사를 맡아온 마르틴 군터였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주군의 모습을 보았지만 마르틴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거듭 다니엘의 여정을 만류했다.
"그 교활한 늙은 여우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주군, 주군께서 이 곳에 계셔야지 저들도 쉽게 주군께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르틴의 만류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실제 지금 피투안 국왕 하레스에게는 다니엘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레스가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과도한 세금을 동파나단에서는 영주의 권한으로 탕감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정책에도 다니엘의 곧은 성격상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기사로서 군주에게 행하는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욕심만 큰 폭군 하레스에게 그런 것이 제대로 보일리 만무했고, 게다가 백성들에게 다니엘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더욱더 다니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레스가 다니엘에게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니엘이 피투안 최고의 지휘관인데다 동파나단의 군사력 역시 피투안의 왕실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병사들의 질까지 고려한다면 동파나단의 군대가 왕실군을 오히려 압도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다니엘이 소수의 호위병만 이끌고 적지라고도 보아도 좋을 피투니아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마르틴으로서는 다니엘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마르틴을 보며 다니엘은 조금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마르틴, 그런 소리하지 말게. 어찌 되었건 그는 우리의 조국, 피투안의 국왕이 아닌가?"
노집사 마르틴은 평소의 차분하고 냉정한 그의 모습으로는 전혀 생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감정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니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그 늙은 여유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신 적도 없으시지 않으십니까? 굳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기사도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을 듯 싶은데, 왜 꼭 그의 명령을 따르려 하시는 것입니까?"
다니엘은 마르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조금 단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아닐세. 마르틴. 그가 바르지 않은 인물인데다 정통 계승자는 아닐지라도 그 역시 피투안 베르크 대왕의 후손이 아닌가? 사논 님께서 대왕께 피로서 충성을 맹세 하셨고 지금 내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으니, 충성의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네. 그리고 옳지 않은 명령이라면, 거절하겠지만 수도의 연화에 초청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기사로써 옳지 않은 행동이란 생각이 드네. 그리고 혹시 이번 기회로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나. 피투안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연회에는 참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마르틴은 결국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마르틴은 여전히 근심히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럼 다녀오겠네."
그런 마르틴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다니엘은 밝은 목소리로 마르틴에게 말을 한 다음, 밝은 황빛의 털을 가진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몰아가는 그의 뒤를 따라 십여명의 기사들과 종자들, 그리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간의 여행, 별달리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여행, 다니엘과 그의 행렬은 이제 막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은 잘 닦여 있었고 폭 역시 꽤 넓은 편이었지만, 길 한 편에는 절벽, 그리고 반대편에는 깊은 숲이 있어서 움직임이 그리 자유롭지 못한 길이었다.
마차의 옆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다니엘을 향해 마차 안에서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가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을 하였다.
"아빠,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에 가는 거예요?"
그 목소리를 들은 다니엘은 따스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여자아이를 보며, 말을 했다.
"수도에 가고 있단다. 신디. 도착하면, 맛있는 것들 많이 사줄테니, 조금만 더 참을 수 있지?"
"정말, 맛있는 것 많이 사줄거야? 아빠?"
꼭 다짐을 받듯 말을 하는 신디를 보며 다니엘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디는 무척 기뻐하며 마차 안에 같이 타고 있던 신디의 엄마, 크리스틴을 향해 밝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엄마! 아빠가 맛인 것 많이 사주신다고 하셨어. 정말 좋겠지?"
신디의 말에 크리스틴은 부드러운 손길로 신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함이 담긴 목소리로 신디에게 답을 하였다.
"이번 여행은 신디가 제일 기쁠 것 같네? 하지만 아버님께 너무 때를 많이 쓰면 못써요."
평민 출신으로 동파나단 영주 부인이 된 그녀였지만, 그 어떤 귀족 부인보다도 자애로웠으며, 또한 고귀하고 정숙한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한 가족,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살기!'
갑자기 느껴지는 강한 살기에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었다. 하지만 그 화살은 시작에 불과했다. 숲으로부터 다니엘과 그의 일행을 향해 엄청난 숫자의 화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크리스틴, 어서 창을 닫아!"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다니엘을 보며, 크리스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신디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마차의 창을 닫았다.
"웬 녀석들이냐!"
일갈, 분노가 실린 다니엘의 외침에, 숲 가득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끝없이 날아오던 화살들도 순간 멈춰버렸다.
떨어진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활을 든 병사들의 모습, 다니엘이 대충 살펴보기에도 수백이 넘는 숫자의 병사들이었다. 산적이 아닌, 계획된 기습 다니엘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병사들 사이에서 걸어나오는 한 인물, 빛나는 갑옷을 입었고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눈빛이 무척이나 탁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눈에 들어온 그의 마음색 역시 가장 사악한 자들의 색인 검붉은 색이었다. 다니엘은 곧 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괴물 사냥꾼, 페아넬리온. 그래 네 녀석의 짓이었군."
페아넬리온이라 불린 사내는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채 다니엘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위대하신 영웅 다니엘 경.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서 제 수고를 덜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하여 이 미천한 몸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꼬는 듯한 페아넬리온의 말을 듣는 순간, 다니엘의 온몸에서 분노가 섞인 하늘 빛 기운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마르틴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이런 비겁한 방법이나 쓰는 국왕 하레스를 향한 분노가 다니엘의 마음을 가득 매웠다.
"하레스, 그 놈이 시킨 일이냐!"
다니엘은 맞은 편의 페아넬리온을 보며, 그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정통성이 없는 하레스 국왕, 아마 다니엘이 마음만 먹었다면, 동파나단 병사들을 동원하여 충분히 그를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나마 그에게도 피투안의 개국왕 피투안 베르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언젠가는 변할 것이란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르러서야 다니엘은 자신의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고귀하신 그 분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시다니, 아무래도 경께서는 반역의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다니엘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페타넬리온은 여전히 비열한 느낌이 드는 미소를 얼굴에 띄운채 답을 하였다.
"반역이라,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네 놈과 그 녀석의 목을 이 손으로 따버리고 싶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허허허."
다니엘은 허탈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을 하였다. 함정, 솔직히 다니엘은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수십년간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온 그 였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린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다니엘 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다니엘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그의 부인과 딸이 있었기에,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들까지 함정에 빠지게 된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하레스의 들쥐! 회색 표범이 네 놈의 손에 그리 쉽게 당할성 싶으냐!"
다시 주위로 다니엘의 힘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런 다니엘의 호통소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페아넬리온은 자신의 양손을 마주하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과 함께 검은 빛 기운을 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처 다니엘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 기운을 쏘아보냈다. 그 모습을 본 다니엘은 급히 자신의 검에 하늘빛 기운을 모우며, 방어를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순간, 검은 빛 기운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크리스틴과 신디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빛 기운이 방향을 트는 것을 본 다니엘은 냉정함을 잃고 당황하여 급히 마차 쪽을 향해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번 페아넬리온의 손에 검은 빛 기운이 모이며, 이번에는 정확하게 등을 돌린 다니엘을 향해 그 기운을 쏘아보냈다. 그리고 그 것을 신호로 숲으로부터 수많은 화살과 검은빛 기운들 역시 다니엘을 향해 집중되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의 기습에서 살아남은 기사 몇 명이 다니엘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중과부족이었다. 열명이 채 한되는 기사들이 막기에는 화살과 흑마법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결국, 기사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함께 고슴도치같이 화살을 온몸에 맞은 채 쓰러졌다.
마차를 향하던 검은빛 기운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다니엘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많은 검은빛 기운들이 다니엘의 등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몸을 감싸던 하늘빛 기운이 흑마법을 맞아 저항을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화살과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대로 맞은 다니엘은 곧 극심한 통증에 힘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마차 안에서 작은 창으로 상황을 살피던 크리스틴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사색이 되어 마차문을 열고 뛰쳐나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다니엘을 향해 달려갔다.
"크리스, 어서 신디를 데리고 피해."
자신을 붙잡는 크리스틴을 보며, 다니엘은 마지막 힘을 짜내 말을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다니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점점 식어 가는 다니엘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적들의 공격, 몇 명 살아남지 않은 호위 병사들이 크리스틴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화살 하나가 그들 사이를 뚫고 크리스틴의 등을 꽤 뚫었다. 연녹색의 드레스가 붉게 피로 물들며, 크리스틴은 다니엘의 차갑게 시어버린 몸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갑자기 주위의 땅이 흔들리며,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체는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최후로서는 너무나 비참한 결말이었다.
"흐흐, 미카년이나 ,아인트 녀석이나 이놈이나. 영웅이란 작자들은 이렇게 어리석다니까."
페아넬리온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며, 비웃음이 담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 쓰러진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를 넘어 마차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무엇인가 쓸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마음이 검붉은 빛이야. 시, 싫어. 무,무섭단말이야."
열러진 마차문 쪽으로 모습을 들어낸 페아넬리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신디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부들부들 떨더니 극심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을 해버렸다. 고아가되어 버린 소녀, 그래도 마차안에 있었던 까닭에 부모가 죽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다행이라 해야 할까? 운명의 여신의 선택은 아직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었다. 페아넬리온은 그런 신디의 행동을 상관하지 않고 신디의 몸을 묶은 다음 끌어내렸다.
"예쁘장한게 크면 꽤 괜찮을 것 같군. 왕자님께서 좋아하시겠어. 크크."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늘에서 서서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는 참혹했던 현장의 핏방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어난 계곡물과 함께 절벽 아래의 아직 완전히 꽃피지 못한 한 영웅과 그의 부인의 몸은 먼바다를 향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연두빛 식물들로 가득한 황궁의 정원, 그 밝은 느낌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인가 무거운 분위기가 황궁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파란색, 하얀색 할아버지!"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봄의 햇살만큼이나 밝은 느낌의 한 꼬마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다. 그 꼬마가 달려가고 있는 곳에는 푸른 망토를 두른 중년의 기사와 녹색망토를 두른 머리에 백발이 가득한 노기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꼬마의 밝은 목소리에 두 기사는 이야기를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시나 양이군요."
녹 빛 망토를 두른 노기사, 메넬리오는 그 전까지와는 달리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자기 쪽으로 달려오는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두고 푸른 망토의 티베리우스를 향해 말을 하였다.
"그래, 전에 란트 영주 곁에서 한 번 본적이 있지."
티베 역시 무엇인가 친근함이 담긴 눈으로 여자아이를 쳐다보며 메넬리오에게 답을 하였다. 아니, 여자아이를 보는 두 기사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친근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 두 기사의 눈에 담겨진 감정은 바로 그 것이었다.
자신에게 달려온 여자아이를 가볍게 안아들며, 메넬리오는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여자아이에게 말을 했다.
"리시나 양, 요즘 혼자서 심심하지는 않나요?"
여자아이는 자신을 안아든 메넬리오를 보며, 방긋 밝에 웃었다. 그리고 곧 듣는 사람까지 기분을 좋게 만드는 듯한 밝은 목소리로 메넬리오를 향해 답을 하였다.
"네, 할아버지. 하나도 심심하지 않아요!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많은데요?"
여자아이를 보는 메넬리오는 그 여자아이가 너무나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들과 손자들이 대부분인데다 유일하게 있는 딸이라고 해도 기사라는 직업을 택할 정도로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카렌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밝은 성격에 애교만점인 꼬마 신디에게 정이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신디!"
정원의 저 편에서 굵직하고 힘찬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들어냈다. 큰 키와 균형 잡힌 몸, 그리고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눈, 기사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청년기사이며 제국의 둘째 황자, 리아인 슈타이튼이었다.
"신디!"
곤란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주위를 한참이나 두리번 거리던 리아인은 곧 두 기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어서, 메넬리오의 품에 안겨있는 신디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여유있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분과 같이 있었군요. 제가 딴 곳에 정신을 쓰는 바람에 두 분을 귀찮게 만들어 드린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자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한 다음, 고개를 숙이는 리아인을 보며 메넬리오와 티베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황자님. 귀찮다니요? 이렇게 오랜만에 리시나 양을 만나니 왠지 기분이 가벼워진 듯 합니다."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리아인을 향해 메넬리오는 황급히 답을 하였다. 그리고 곁에 있던 티베 역시 메넬리오의 말을 거들었다.
"비아니스 공의 말이 옳습니다. 황자님."
두 기사의 말에 리아인은 조금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신디를 향해 고개를 돌린 리아인이 눈짓을 주자, 신디는 못 본척 고개를 팩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리시나 양, 그럼 다음에도 이 할아버지한테 꼭 다시 오세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메넬리오는 웃으며 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네 할아버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답을 하는 신디, 신디의 대답을 들은 메넬리오는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신디를 땅에 내려 놓았다. 그 순간, 신디는 주름 가득한 노기사의 볼에 살짝 보뽀를 하곤 리아인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메넬리오는 갑작스러운 꼬마 숙녀의 공격에 허허하고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을 하는 리아인을 향해 두 기사 역시 조금 허리를 굽혀 답을 하였다. 리아인가 신디가 정원 저편으로 사라진 뒤, 메넬리오는 티베를 보며 조금 씀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니엘 경이 살아있었다면, 이번에는 힘을 합칠 수 있었을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메넬리오의 말을 들은 티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그러게 말일세. 그 무능한 피투안의 멍청이들 때문에 정말 훌륭한 기사를 한명 잃어버렸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신디가 사라진 곳을 두기사는 한참동안이나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은 어느새 30년이란 세월을 뛰어 넘어 예전의 그 들판으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념이 가득찬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눈으로 자신들을 보며 그들을 향해 당당한 자세로 말을 몰아오던 회색 망토를 두른 한 소년기사의 모습이 있었다.
-외전 4 30년전 어느전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