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2장 여신의 사제(3)

푸른바람 BlueWind·2003. 3. 1. AM 12:49:44·조회 2423·추천 76


우리 일행은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어쨌든 다리를 넘어 테베 신성령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완만한 언덕 위에 올라서니, 넓은 들판과 함께 수많은 흰빛 신전들로 이루어진 신성도시 테베가 내 눈에 들어왔다.

햇빛에 빛나 은빛을 내는 듀나인강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고, 테베의 뒤로 있는 숲과 산들은 전체적으로 아늑하다는 느낌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테베 시내에 새워진 수많은 거대한 신전들이 만들어내는 웅장함도 또한 테베에서 느껴졌다. 흐흠, 그러고 보니, 스승님의 직함 중에 하나가 신성도시 테베 장로회 원수직이었지? 그러고 보면 나와도 그다지 인연이 없는 도시는 아닌 것 같았다.

테베는 일단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종교 총회에 몇 번 얼굴을 내밀어야 되었기에 며칠간 머물 곳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책에서 종종 읽어왔고, 한번쯤 꼭 보고 싶었던 건축 예술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곳, 테베에 세워진 수많은 신전들을 한동안 구경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게 그런 여유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성벽이 없는 도시, 신의 수호아래에 있는 곳으로 성벽이 필요 없는 몇 안 되는 도시이기도 했다. 실제로 30년전의 대전쟁시에, 흑마녀의 세력에 가담한 흑기사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큰 위기를 겪게 되었지만, 정말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스승님과, 핀누나, 황제의 일행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스승님은 그 공로로 인해 장로회의 원수직을 맡게 되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스승님은 영웅은 영웅이었다니까.

하지만 그 위기를 통해 무력의 필요성을 실감한 유하네리스 교단이 주도하는 테베 장로회는 전 대륙에 퍼져서 유하네리스 교단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던 유하네리스 소속 신성기사단과 복사들을 테베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그 지휘권을 스승님께 맡겼고 스승님이 이끄는 신성기사단이 팽팽한 대치상태로 있던 중부 대평원 전투에서 인간과 엘프의 항마 연합군 측에 가세함으로 인해서 항마 연합군 측이 승리를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부터 여러 가지를 고려해 테베는 약 1만여에 이르는 병력을 항상 테베에 주둔시켜 놓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군사력의 확대를 통해 실질적으로 대륙내에서 자신들의 영향권을 확대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테베로 다가섬에 따라 신전들의 웅장함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듯 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마차가 도시 가까이에 다가서자 신전들의 크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흰빛 대리석으로 건설된 수많은 신전들, 이 많은 돌들을 어디서 구해왔을까 하는 의문이 감돌았다. 뭐, 어렴풋이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것 대로라면 커다란 배로 북부 산맥의 채석장에서 수송을 해온다고 하던데, 흐흠. 가능한 일일까? 하긴 마법사나 신관들의 도움을 받으면 그리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별다른 검문 없이 도시 안으로 진입을 했다. 내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추기경의 영향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뭐, 유하네리스 교단이 주도하는 도시다보니, 이제는 거의 일반인들에게는 잊혀지다시피한 힘없는 플라타니오 교단 최고사제의 존재보다는 유하네리스 교단의 추기경의 권위가 당연히 더 클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 역시 유하네리스 교단 소속 성기사들이었으니까.

"올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테베는 정말 굉장해!"

창밖으로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던 클라리의 감탄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리가 말하는 것을 보면 예전에도 몇 번 와본 경험이 있다는 말인데, 흐흠. 티베 단장과 핀누나를 따라 클라리 역시 꽤 여행을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검치고는 꽤 호강을 한 편이었다. 하지만 핀누나와 티베리우스 단장은 클라리를 가족으로 생각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테베에 진입하는 순간 펼쳐진 장관, 신들의 모습을 조각한 수많은 크고 작은 신상들과, 그리고 본격적으로 엄청난 크기의 구조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장엄함. 수도에서 그 검술대회 경기장을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소피와 티티, 그리고 심지어는 아미까지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창 밖으로 펼쳐진 멋진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시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꽤 활기찬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굳이 억지스러운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는 밝은 표정의 사제와 신관들의 모습, 그리고 큰 도로가 곳곳에서 지나가고 있는 갖가지 물건들이 실린 수많은 짐마차들의 숫자는 과연 이 곳이 신성도시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았다. 아무래도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요즘 유하네리스 교단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옆에 가던 추기경의 마차가 우리 마차 쪽으로 바싹 접근을 하더니, 추기경의 마차에 난 창에서 추기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추기경은 우리 마차 쪽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라네티스 예하, 내일 총회 때까지는 플라타티오 신전에서 쉬고 계십시오. 그리고 신전의 위치는 카밀 경께 알려 두었으니, 예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추기경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답을 했다. 물론, 추기경은 지금 내 표정이 결코 기분이 좋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추기경님. 바쁘신 분께서 저 때문에 귀중하신 시간을 허비하여선 안되겠지요. 어서 유하네리스 신전으로 가보시도록 하세요."

추기경은 내 대답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얼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자신이 이끄는 행렬의 속도를 빠르게 하더니, 도시 저 편으로 사라졌다. 곤란하다 싶으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는 추기경, 종교 지도자가 저렇게 사악해도 되는걸까? 흠. 그나저나 지금 추기경이 향하고 있는 저 길 끝에 보이는 거대한 신전이 유하네리스 신전이겠지?

흐흠, 그러고보니 테베에도 플라타니오 신전이 있다고 했었다. 물론, 추기경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플라타니오 대 신전은 아니었고, 신성도시란 이름 때문에 중간정도 크기의 신전이 세워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의 교단 사정으로 볼 때, 제대로 관리나 되고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추기경이 그 곳에서 쉬라고 했으니, 완전히 엉망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또 추기경이 무슨 장난을 쳤는지 모르니, 휴. 가보면 알겠지.

추기경 일행이 떠난 뒤, 카밀이 이끄는 데로 도시의 한 곳을 향해 행렬은 이동을 했다. 끝없이 펼쳐진 신전들, 그리고 신전들의 뒷편으로 일반 서민들의 주택들과 시장들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신전과 연관된 일로 먹고산다고 했다. 신전 건설과 관련된 일이라던지, 아니면 순례자들을 상대로한 관광사업, 또는 신전에 식량과 같은 것을 공급하는 일 같은 것을 한다고 했다. 한 때는 신전 측의 심한 착취로 인해 이 도시의 사람들 역시 고생을 한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꽤 살기 좋은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도시를 행단한 끝에 도시의 가장자리에 이르러서야 멀리 플라타니오의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단 한번도 플라타니오 신전을 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그 건물에서 특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친숙함과 편안함.

테베에 있는 다른 신전 건물들 역시 흰빛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지만 그 흰빛과는 또 다른 느낌의 흰빛을 플라타니오 신전은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나 깨끗한 느낌의 흰 빛. 꼭 작은 먼지 하나라도 붙어 있지 않은 것처럼 너무나 순수한 느낌을 보는 사람에게 주고 있었다. 또한 건물의 곳곳에 새겨진 작은 조각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신전의 분위기에 섬세함과 자상함이란 느낌을 덧붙여 주었다.

그런데 신전 앞으로 다가가며 플라타니오 신전 쪽을 살펴보니, 몇 명의 여신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신전 앞에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온다는 연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난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며 그들 앞에서 행렬을 멈춘 뒤, 클라리 일행과 함께 마차에 내렸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 여사제들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자한 얼굴의 여인이 내게로 걸어왔다. 부드러운 얼굴의 꼭 동네 아주머니 같은 느낌의 여사제였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엄청난 양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플라타니오 교단에서도 꽤 높은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urrl Isill Wid Mu(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라네티스님께서 도착하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곁으로 떠나기 전에 이렇게 최고사제님을 다시 뵐 일이 생기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그 여인은 내 손을 꽉 잡더니 조금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다. 정말,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플라타니오신은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날 왜하필 최고 사제로 뽑아서 정말 이렇게 만드는 걸까? 그나저나 어쨌든 일단 달래는 줘야 하겠지? 난 그 여사제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Ely Hamill Min Firu(언제나 들꽃의 마음으로)

모든 것이 그분의 뜻이겠지요. 저 역시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기뻐요."

여사제는 내 대답에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듯 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느껴졌다. 무슨 이유일까? 역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난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럼,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수많은 별꽃들이 라네티스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사제는 내 손을 잡아 신전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데, 선전 주위의 정원에 처음 보는 하얀색과 노란색 작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꽃들에게서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근함과 익숙함이 느껴졌다.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꽃들인가? 그런데 여사제가 그 꽃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보통 별꽃들은 낮에는 흰꽃, 밤에는 노란빛 꽃들만 피곤 한답니다. 하지만 최고사제님께서 근처에 오시면 흰빛과 노란빛 꽃이 동시에 정원 가득 피지요. 저희들이 라네티스님께서 근처에 오신 것을 알게된 것도 이 별꽃들 덕분이랍니다. 제 살아생전에 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그런 것이었나? 그러고 보니, 경전의 어디선가에서 비슷한 내용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도 같다. 흐흠, 어쨌든 이런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볼 때, 내가 최고사제로써 플라타니오신에게 인정을 받기는 받은 것 같았다. 여전히 왜 나 같은 놈에게 이런 고귀한 임무를 맡겼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 있는 정문을 너머 플라타니오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내가 플라타니오 신전에 들어와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서서히 걸음을 옮김에 따라 내 눈으로 들어오는 신전의 내부 모습, 너무나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맑은 흰색의 바탕의 기둥과 벽 가득 금빛으로 플라타니오 신성어가 쓰여져 있었고, 신전을 가득 매우고 있는 아름다운 벽화와 장식들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신전의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전체적으로 웅장함보다는 편안함과 아늑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편안한 느낌에 꼭 잠이 들어버릴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홀을 지나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배당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운데에 서있는 플라타니오 여신상, 내가 가지고 있는 여신상을 크게 확대한 듯한 모습이었다. 자애로움과 편안함, 작은 상에서는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왠지 엄마의 모습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분명 처음 와보는 것임에도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난 왠지 모를 끌림에 이끌려 신상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무엇인가 힘이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며 내 품속에 있던 목걸이의 보석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뭐지? 엄마가 준 목걸이가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난 갑작스러운 일에 조금 당황하여 아무 대처도 취할 수 없었다.

보석 그 자체의 색처럼 도저히 무슨 색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빛이 목걸이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신상 역시 신기한 빛에 휩싸였다. 헛. 그런데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부터 무엇인가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긴 시간을 걸쳐 결국 이 곳으로 돌아 왔군요.

하지만 당신에게 남은 것은 이제 단 하나뿐

다른 모든 것은 잃었어도 자애와 평화의 마음만은

여전히 가슴깊이 품고 있군요.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자애와 평화에 기초된 것, 언젠가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당신을 둘러싼 오랜 시간 얽힌 인연의 굴레는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 법.

당신 역시 인간의 운명을 가진 자  

당신이 만든 업보는 당신의 힘으로 해결을 해야하겠지요.

긴 여정, 아직 또 많은 여정이 남아있지만

3천년이란 시간에 비하면 그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랍니다.

하지만 3천년동안 당신이 겪었던 그 어떤 것 보다

더 힘든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힘내세요. 당신이 3천년 전에 약속했던 그 것을 이룰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요.  설혹 지금 가진 것은 한 개일지라도

나머지 네 개 역시 당신 곁에 머물고 있으니.

좌절하지 마세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언제나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까.-



정말 눈깜짝할 사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도대체 방금 전의 그 이야기는 무슨 의미였을까? 왠지 모를 혼란함이 날 감쌌다. 아직 20년도 살지 않은 내게 3천년전의 약속이라니? 뭔가 생각이 날 듯하면서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라네티스님!"

혼란스러움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것을 클라리와 그 여사제가 달려와 급히 날 부축하였다. 다행히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이 혼란스러움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전에 암흑신의 사제들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내 마음속 가득 생겨나는 번뇌.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어느 하나도 명확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괜찮아요."

난 조금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이런 정신적인 피곤함은 정말 하루종일 전쟁터에 파묻혀 있을 때의 육체적 피곤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버티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여신상을 다시 한번 보는 순간, 모든 혼란이 어느새 진정이 되버렸다. 그리고 무엇인가 힘이 생겨나는 듯한 느낌. 갑자기 엄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내가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날 부축하고 있는 두 여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두명을 향해 살짝 웃어줌으로써 괜찮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흐흠, 확실히 요즘은 정말 꼭 내가 내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속에서도 이 비슷한 것을 겪었던 것 같은데, 흠. 모르겠다.

"라네티스님, 그럼 조금 쉬실겸, 최고사제님들의 초상화가 그려진 곳에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믿어지시지는 않으시겠지만 라네티스님의 초상화도 이미 완성되어 있답니다."

초상화가 완성이 되어 있다고? 난 분명 이 곳에 처음 오는데 어떻게 초상화를 완성했다는 말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이것도 무슨 권능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일까?

"네? 제 초상화가 완성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내 질문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띄우곤 내게 이야기를 했다. 왠지 편안함이 느껴지는 미소, 예전에 엄마와 황제한테서 느꼈던 그런 느낌과 비슷한 것 같았다.

"초상화도 최고사제님께서 새로 임명되셨을 때 나타나는 기적 중 하나랍니다. 그럼 이 쪽으로."

난 계속되는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꼭, 내가 이 곳에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 내가 최고 사제를 맡게 된 것도 왠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운명의 길 중에 하나가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 하지만 난 내 초상화에 대한 호기심에 혼란스러운 생각을 잠시 접고, 여사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