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2장 여신의 사제(5)

푸른바람 BlueWind·2003. 3. 29. PM 1:08:56·조회 2239·추천 77
에피소드 79 여신의 사제-5


우리 일행이 머무는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놈의 클라리가 혹시 또 쇼핑을 가자고 날 부른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막연히 떠오르며 내 마음이 그리 편치 않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고생해서 겨우 찾은 책을 막 보려 하는 찰나에 귀찮게끔 날 끌어들인 클라리에 대한 원망을 속으로 누르고 방안에 들어선 난 방안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라네티스 예하 오셨습니까?"

그런데 방안에서 들려오는 전혀 뜻밖의 목소리에 난 조금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맑지만 또한 알 수 없는 힘이 조금 담긴 목소리, 엘프 길드 마스터, 동엘프족 수장 루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이말고도 추기경의 모습 역시 볼 수 있었다. 분위기상 종교 총회가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이 보이지 않았는데 추기경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것일까? 그리고 루이까지. 솔직히 루이가 지금의 날 찾아올 이유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조금 뜻밖이란 표정을 한 상태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두 명에게 인사를 한 다음, 방 가운데에 펼쳐진 테이블에 앉으며, 클라리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클라리 역시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단지 두명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나요? 요한 추기경."

난 실질적인 영향력을 떠나서 어쨌든 추기경보다는 한 단계 위라는 내 직위의 특권을 활용하여 추기경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내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추기경의 그런 내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필리포니스령이 함락되었습니다."

잠깐, 뭐라고? 난 추기경이 전해준 충격적인 소식에 잠시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치령 중에 군사력이 가장 약한 곳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한 때는 그릭 연맹의 한 축을 담당하던 독립 국가로써 아테네이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국력을 가졌던 필리포니스였기에 아테네이오스의 군대를 최소한 한 달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모두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필리포니스령에는 필리포니스의 군대뿐만 아니라 제국의 동부지역 수비대 역시 상당수 주둔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따르면 군사력이 약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필리포니스의 본성의 경우는 꽤 견고하게 지어졌다고 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황제와 스승님의 고민거리가 또 하나 늘었으리란 생각에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말씀은 저희의 일정 역시 예상하던 것보다 이주 이상을 단축시켜야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내 대답에 추기경은 아무 대답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하아, 그럼 최소한 오늘 내로 이 곳을 떠나야한다는 말인데, 쩝. 카밀 녀석들이 좀 피곤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맡게된 임무, 이 임무를 달성함으로써 구하게 될 수많은 아무 죄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해보더라도 내가 이 작전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네티스 예하. 아무래도 트로이아를 통해 투르크 훈으로 가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트로이아에서 대대적으로 투르크 훈을 향한 길을 통행제한을 실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심지어는 자국의 국민들까지도 통행을 금지를 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기경의 말은 필리포니스가 점령되었다는 말만큼이나 내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곳 신성도시 테베에서 투르크 훈의 수도 오스마니아를 향한 유일한 길이 트로이아를 통해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트로이아를 통할 수 없다면, 사회적 혼란이 커지겠지만 그럴 경우엔 아미를 타고 오스마니아를 향해 날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테네니오스 측에서 뭔가 냄새를 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옆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던 루이는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엘프 특유의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하긴, 이오니스령에서 아테네이오스가 우리를 통과시켜 준 것만 해도 정말 감지덕지해야 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테네이오스 측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제국이 투르크 훈과 손잡으려고 시도를 하려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아테네이오스의 영향권 내에 있는 트로이아로써는 그런 아테네이오스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임이 틀림이 없었다. 아테네이오스에서 트로이아까지의 모든 통로를 막아버린다면 사실상 서부대륙에서 사막으로 향하는 육로는 모두 막히게 되는 것과 마찮가지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바다를 이용해서 가겠다고 다시 이오니스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난 계속되는 절망적인 이야기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쉬운 일이 없는 건지, 마을에서 떠난 뒤부터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일어나 꼭 내가 해야하는 일을 방해를 하는 것 같았다. 내 운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 하긴 9살 이후로 내 삶에서 언젠들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최근에 잠시 맛본 작은 행복들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라네티스 예하. 수린 요새 탈환 작전 때와 동일한 방법."


루이는 천천히 하지만 무엇인가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방금 루이의 말은 내게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과 다름이 없었다. 수린 요새 때와 비슷한 방법이라면 엘프들의 길을 이용하는 것, 그래 그 방법이었다. 투르크 훈국이 위치한 마하메티 사막과 테베 사이에는 트로이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북쪽에 엘프들의 고향 엘프 포레스트가 있었다. 만약 그 곳을 통해 갈 수만 있다면 조금 둘러가긴 해도, 여러 가지 절차상 지체되기 쉬운 트로이아를 통해 가는 것 보다 오히려 시간을 더 단축할 수도 있었다.

잠깐, 그런데 지금 루이의 말은, 헛, 루이 역시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이잖아, 쩝. 이제는 워낙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되어,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루이라면, 그다지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흠이 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엘프들이란 인간들과 다르니까. 소피를 보면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엘프 포레스트라면 수린 요새 때와는 조금 상황이 다르지 않나요? 엘프 포레스트에 인간이 함부로 들어가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전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엘프 포레스트, 바로 엘프들의 고향이며, 모든 엘프들의 생명의 원천이라고 보아도 좋을 유하네리스 성수가 위치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다른 곳과는 달리 이종족의 통행을 엄격히 금지한다고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곳으로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라네티스 예하.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 엘프 포레스트에서 모든 이종족의 통행을 무조건 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는 얼굴에 엷게 미소를 띄우며, 나를 향해 말을 했다. 일단 희망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종족 전체의 통행을 금지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와 수십명의 카밀 녀석들 모두가 그 예외에 꼭 포함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라네티스님의 일행 분들 모두가 엘프 포레스트를 지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이자벨의 권한으로 세 명 정도의 이 종족은 통행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깐, 나를 비롯해서 클라리, 아미, 티티, 소피하면 다섯명인데? 아니, 그러고보니 소피 역시 엘프였으까 제외를 하고. 흐흠 그래도 한 명이 남았다. 게다가 결국 카밀 일행들은 이곳에 버려 두고 떠나야 한다는 말이겠군. 쩝, 하긴 세력과시를 하는 것 이외에는 그들의 용도가 그다지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있으므로 해서 왠지 든든한 느낌이 들었던 것 또한 솔직히 사실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창조신 플라타니오신의 최고사제이신 라네티스님은 제외, 그리고 클라리사제께서도 그 규칙에서 벗어나시니까, 나머지 일행 분들 중에서 세분을 고르셨으면 합니다."

흐흠, 그런 것이었나? 하긴 클라리는 정신체였으므로 이종족이란 범위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슬쩍 클라리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도 클라리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루이경의 세심한 배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지, 그 규칙에서 벗어난다는 말만 하였다. 역시 동엘프족 전체를 이끌 정도의 존재는 무엇인가 달라도 다르다는 뜻일까? 다시 한번 루이경이란 존재의 거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네 명이라. 일단 아미하고 티티,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카밀. 그 녀석으로 해야 할 것 같다. 그 때 수린 요새 때의 전투에서 카밀 그 녀석의 능력은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 데려간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뭐, 사막을 지나는데는 사람수가 지나치게 많으면 여러 가지 무리한 점이 뒤따랐으므로, 어떻게 보면 잘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 카밀 녀석들은 이 곳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물론 식비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경비들은 그다지 필요도 없는 내 재산에서 충분히 때서 이 곳 신전에 위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한 플라타니오 교단에, 최고사제란 작자가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피해를 끼쳐서는 안돼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감사드려요. 루이님. 루이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많이 힘들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저희는 루이님의 일정에 맞춰야할 것 같습니다만."

내 대답에 루이는 그 예의 싱긋 웃는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답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싱긋 웃는 미소가 그다지 기분이 좋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흐흠.

"라네티스 예하의 일정도 급하신 듯 하니, 내일 당장 출발을 할까합니다. 그 때까지 준비가 되시겠습니까?"

내일 출발이라, 뭐, 여러 가지 여행물품이야 핀누나가 준 배낭 속에 모두 든든히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준비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뭐 시간이 들일이라면 신전에 카밀 녀석들에 대해 부탁을 하는 것과 카밀 녀석을 설득하는데 드는 시간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네, 내일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뭐 굳이 루이 앞에서까지 이런 말투를 쓸 필요가 있겠냐마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중간에 어투를 바꾼다면 괜히 더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밀고 나가기로 결심을 했다. 흐흠, 혹시 내가 이 말투와 목소리에 서서히 적응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아닐거야.

"그럼 내일 제가 신전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예하."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하는 루이에게 나는 조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표했다. 최고사제라는 직위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 대상이 누구이던 간에 내가 그다지 예의를 차리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점. 어찌됐건 한 종교의 최고지도자로써 다른 이들보다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어떤 사람이나 존재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하께 계속 도움을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교단 사정상 아무래도 테베에 좀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추기경은 조금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흐흠, 이제 추기경으로부터 해방이라는 것, 물론 추기경이 있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면에 도움은 많이 되었지만,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추기경과 같이 갈 경우 추기경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과 같이 했어야 했기에 이제 제국이 아닌 타국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내 입장으로써 그리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원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에 처했을 경우 유연한 대처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설명하자면 머릿숫자가 많을수록 도망치거나 숨기가 힘들다는 말이었다. 테베로 오는 과정에서의 그 암흑신의 사제 녀석들도 그렇고 최근에는 보지 못했지만 그 회색 로브의 마법사 녀석들이 만약 공격을 해온다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피해가 커질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요한 추기경. 지금 까지도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 걸요."  

하지만 어찌됐건 날 이런 위험에 빠뜨리게 한 주범 중 하나로써 배째라하고 숨겠다는 그의 말이 괘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여성틱한 목소리와 어조로 싱긋 웃으며 말을 하는 것으로 추기경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그런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역시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조금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추기경이 방밖으로 걸어나가고 난 그제야 조금 편한 자세로 의자에 깊숙히 몸을 기대었다. 솔직히 지금의 내 입장에서 가장 불편한 점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누가 뭐라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최소한 이전 최고 사제들의 명성에 흠이 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고귀하고 숭고한 분들이었으므로.

"흠, 그럼 다시 내일부터 여행해야 하는 거야? 주인님아? 쇼핑도 못했는데."

클라리는 조금 투정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흐흠, 솔직히 이번에는 조금 투정을 할만도 했다. 제대로 된 도시한번 지나지 않고 고생고생해서 테베에 도착을 하였는데,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떠나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클라리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런 도시에서 플라타니오 여사제의 복장으로 클라리가 좋아하는 고급 사치품을 사는 것은 플라타니오 교단에게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클라리가 쇼핑을 하러 가려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려야만 했다.

"쇼핑은 이번 일이 끝나고 나서 해도 되잖아. 조금만 더 참아. 그리고 투르크 훈의 수도 오스마니아도 유명한 상업도시이니까 정 안되면 그 곳에 가서 해도 되고."

난 테베에 도착한 이틀 사이에 생긴 여러 가지 복잡한 일로 인해 생긴 여러 가지 심적 피로의 누적으로 지쳐 있었던 까닭에 별로 그럴 의도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클라리에게 말을 했다. 흐흠, 그런데 여자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하니 정말 못 들어줄 목소리가 나온다는. 쩝.

"훙, 왠지 이번이 아니면 정말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더 심하게 투정을 할거라 생각을 했는데 생각 외로, 클라리는 쉽게 포기를 한 듯 단지 힘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할뿐이었다. 하긴 클라리가 지금 이 상황을 이해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클라리 역시 이해를 하지만 단지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내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엘프 포레스트를 지나게 되는 건가 주인?"

갑자기 들리는 아미의 목소리,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아미였으므로 아미가 말을 할 때마다 난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워낙 외모하고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말투, 그런 아미의 말투는 왠지 익숙해지지 않는 듯 했다.

"그래, 아미. 그런데 왜?"

하지만 아미는 내가 대답을 한 뒤에도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드래곤이란 생명체의 특성 때문일까?

"어렸을 때 한번 그 곳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그 곳에 엄마와 무척 친한 엘프가 있었다."

흐흠, 그렇단 말이지. 하긴 장수를 하는 두 종족인 드래곤과 엘프의 특성상, 드래곤 쪽이 지나치게 권위적이나 포악하지만 않다면 드래곤과 엘프와 친해지는 것도 드물지는 않다고 들었다. 최소한 인간보다는 드래곤과 친해질 확률이 높은 것만은 확실했다.

어쨌든 아미의 말일 정확하다면 그 엘프를 만날 경우 아미의 엄마가 있는 곳을 알게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골치 아픈 짐을 하나 덜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엘프 포레스트에 사는 엘프가 한둘인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것일 뿐이므로 아미가 말한 그 엘프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 것이란 생각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휴, 어쨌든 내일 떠나가 위한 준비를 해둬야 하겠지? 카밀 녀석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제일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카밀 녀석이 자기 부하들이랑 떨어지려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만약, 카밀이 남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라고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내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들일지라도 지금 현재로써는 그들을 그다지 얽매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수린 요새 때처럼 그들 중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으니까.



해질 무렵의 테베, 주황색의 햇빛이 흰색의 대리석을 감싸며 도시 전체는 꼭 연주황빛 파스텔톤의 물감으로 색칠을 한 것같이 되었다. 낮과는 또 다른 색다른 느낌. 어떤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는, 해가 뜰 무렵, 그리고 한 낮, 마지막으로 해가 질무렵을 보아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 전체가 흰색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저녁 햇빛으로 덮인, 그 느낌의 이질성이 다른 도시들보다 더 커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신전의 본 건물과는 조금 떨어진 카밀 녀석들의 숙소를 향해 걸어가던 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앞으로 보이는 정경을 바라보았다. 따스함, 전란으로 죽어갈 수많은 생명들의 운명을 아는지 저녁의 주황빛 햇빛은 그지없이 따스하기만 할뿐이었다.

난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카밀 녀석들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감정, 내 자신의 감정을 느낄 정도로 내게 여유가 생겼다는 말일까? 스승님이 깨어나시고, 그리고 내게 관심과 정을 쏟아주는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며, 나도 어린 시절의 나로 조금 되돌아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자신이 없었다. 만약 내게 또 다시 이전의 그런 일과 같은 가슴아픈 일이 생긴다면, 지금의 이 모습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불행이라는 것은 그 불행에 익숙하면 할수록 불행을 접했을 때의 그 아픔 역시 더욱더 커졌으니까. 단지, 표시하지 않고 그 것을 가슴속에 묻는 법만 배우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었다.

카밀 녀석들의 숙소로 다가가니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녀석이 날 보고는 헤벌쭉해서 플라타니오 교단 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용병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그 어떤이보다 순수한 녀석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충분히 능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그 마법사 같은 녀석들에게 당하고 피해를 입고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카밀 경, 지금 안에 계시죠?"

내가 녀석을 보며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녀석의 헤벌쭉 웃는 얼굴은 더욱더 헤벌쭉하게 되어서, 내게 답을 하는 것이었다. 쩝.

"네, 물론입니다. 라네티스 예하. 두목, 단장님께서는 지금 단장님의 방에 계십니다."

녀석은 반쯤 넋이 빠진 듯한 상태, 쩝. 할말이 없었다.

"Eurrl Isill Wid Mu(별의 축복이 함께하길.)"

난 녀석의 기분이라도 좋게 해주자는 생각에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해주고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녀석의 표정 변화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생각은 정말 꿈에도 없으니까.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