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2장 여신의 사제(6)

푸른바람 BlueWind·2003. 4. 6. AM 12:04:20·조회 1950·추천 88
에피소드 80 여신의 사제(6)


쩝, 녀석들이 묶고 있는 숙소 건물 안으로 들어온 순간 펼쳐진 광경은 정말 가관이 아니었다. 물론, 실내를 지저분하게 더럽힌다거나 건물에 손상을 입혔다거나 장식 등을 부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풍경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조차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멀쩡한 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도에 그대로 엎어진 상태로 잠을 자고 있는 카밀 녀석들, 대부분이 여행을 하던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아마 복도를 가득 뒤덮는 코고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무슨 기습을 당하거나 한 것이라고 착각을 했을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어제 도착한 이후에 이 곳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져서 지금까지 계속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흐흠.

"쿵!"

뭐야? 이 소리는?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니 복도의 한쪽 벽에서 매달려서 자고 있던 녀석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나서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바닥과 충돌한 자신의 몸을 몇 번 긁더니 깨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바닥에 엎어져 자는 것이었다. 하아, 이 녀석들이 대단한 녀석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럴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라, 라네티스님, 사랑해요."

".............?!"

켁, 뭐야 이 소리는 난 갑자기 들려온 황당스러운 소리에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한 녀석이 기둥을 껴안고 잠을 자며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걸 진짜. 어떻게 해버릴까?

난 녀석들을 한 대씩 차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생각하고는 그냥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긴, 녀석들도 꽤 피곤하긴 피곤했을 것 같다. 나야 마차를 타고 왔지만 녀석들은 거의 몇 주일간을 거의 뛰는 것에 가까운 빠른 속도로 걸어왔으니. 게다가 수린 요새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에도 녀석들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출발을 했었으므로 그 피로야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난 강도를 최대한 약하게 해서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녀석들에게 피로 제거 마법을 시전 했다. 희미한 흰빛이 복도를 뒤덮은 뒤 서서히 사라지며, 자고 있던 녀석들의 표정이 조금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놈의 옷차림 때문에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꽤 정이 들었던 녀석들이었다. 만약, 이번 전쟁에 끝나고 녀석들이 원한다면, 이 녀석들도 우리마을로 데려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녀석들이라면 마을의 수많은 종족들과도 금방 친해질 것 같았다.

난 복도의 곳곳에서 엎어져서 자고 있는 녀석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중에는 녀석들을 피하느라 거의 폴짝 폴짝 뛰며 복도를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최고사제의 품위있는 모습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뭐, 특별히 볼 사람도 없으니, 괜찮겠지.

난 카밀에게 배정된 방 앞에 도착해서는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뭐, 카밀 녀석은 말을 타고 왔었으니, 깨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옷차림만 아니었다면 그냥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것이지만, 카밀 녀석들에게 심어놓은 이 옷차림의 이미지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문을 두드린 후에도 한참동안 반응이 없었다. 이 녀석이 어딜 갔나?

내가 문에 슬쩍 힘을 주니, 문이 잠겨있지 않았는지 별 어려움이 없이 문이 열려져 버렸다. 그리고 난 아무 생각 없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당혹스러운 광경, 카밀 녀석은 속옷 하나만 걸친 채 방 한곳의 침대에서 엎어져 있는 것이었다. 무슨 오크도 아니고 인간이 저렇게 하고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몸을 일으키는 카밀.

"아, 라네티스 예하......"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카밀은 눈을 비비며 내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완전히 정신을 차린 카밀 녀석의 표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으아아악!"

카밀은 괴성을 터트림과 함께,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며 시트며 닥치는 대로 잡아끌어서 자신의 몸에 두르는 것이었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아! 그렇지. 쩝. 저 녀석은 지금 내가 여자인 줄 알고 있지 그 것도 고귀하고 순결한 플라타니오스 신의 최고 사제. 젠장. 녀석이 놀랄만도 하지. 휴.

"죄송해요. 카밀 경. 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난 클라리에게 배운 연기실력을 십분 발휘해서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을 한 다음,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방밖으로 빠져 나왔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온통 빨갛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복도로 빠져 나온 난 주위에 깨어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본 후, 그리 표시가 나지 않게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작은 소리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카밀 녀석 얼마나 놀랬을까? 훗.

"저,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카밀 경."

난 한참동안이나 혼자서 킥킥거린 후에 난 방안 쪽을 보며 말을 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난 후 잠시동안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가 잠잠해 지고 나서 방안에서 카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라네티스 예하."

여전히 어쩔 줄을 몰라하는 카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다시 한 번 속으로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그리 빠르지 않게 들어갔다. 방안을 둘러보니 카밀 녀석은 어느순간엔가 플라타니오 성기사 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던 방안 역시 말끔히 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녀석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이 모두를 해냈단 말이야? 하하, 급하기도 급했군.

"저, 아까는 실례했어요. 카밀 경. 방안에 아무 기척이 없어서."

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이고 카밀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 정말 카밀 녀석과의 볼일을 끝난 다음에는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실컷 웃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참기가 힘들 것 같았다.

"괜, 괜찮습니다. 예하. 그런데 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슬쩍 카밀을 쳐다보니, 카밀 역시 얼굴이 온통 빨갛게 되어 있었다. 흐흠, 그렇게까지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 건 내 생각이고 내가 카밀의 입장이었어도 그리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카밀보다는 좀 더 차분하게 행동을 했겠지만 말이다.

"저, 조금 의논할 일이 있어서요."

난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카밀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나로서는 시급을 다투는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조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라네티스 예하의 일이라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돕겠습니다."

카밀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난 순간 깜짝 놀라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 실없기는 헐. 분명 란트일 때의 나와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란트일 때 녀석이 날 대하는 것은 물론 진심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처음의 그 차가운 느낌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모습일 때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상관이 없었으니까. 황태자 녀석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흠. 왜 이런 반응이 생기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저 실은 사정이 있어서 내일 출발하게 되었는데 카밀 경께서 수행해 주셨으면 해서요."

카밀은 내 물음에 녀석은 평소처럼 별다른 거부감이나 주저함 없이 쉽게 대답을 해주었다.

"물론입니다. 예하. 그런 명령이라면 언제든지 따를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묻는 듯한 자신감이 담긴 카밀의 목소리. 흐흠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데, 말이지. 더 중요한 내용이 다음에 있었다. 난 왠지 카밀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에 조금 주저함이 담긴 목소리로 카밀에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세 사람밖에 못 데려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카밀 경의 일행분들은 전란 속에서 혹시나 모를 일에 이 곳을 지켜달라 하고, 카밀 경 혼자서 절 수행해달라고 부탁하려했는데, 생각해보니 카밀 경께서 일행분들과 함께 있길 원하신다면 않으신다면 꼭 그렇게 하시진 않으셔도 되요."

내 말을 들은 카밀의 표정이 순간, 조금 어둡게 변하였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것인가? 하긴, 방금 전의 내 말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강요하는 것이긴 하였기 하였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카밀이 쉽게 결정을 내릴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용병이라는 것, 그리고 특히 카밀 녀석들처럼 생사를 함께 한 존재들이라면 더욱더 그렇게 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들간의 유대감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것이기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카밀은 의외로 밝은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예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예하. 대장께서도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예하의 명령을 따라달라고 부탁하신 이상, 그 부탁을 따르는 것이 부하의 도리. 다른 녀석들도 이해해 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곳 플라타니오 신전을 지키는 일 역시 녀석들에게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 일테니까요. 그리고 그 험난한 곳에 라네티스 예하께서 직접 가시는데 라네티스 예하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절대 없습니다."

고마움, 진심으로 카밀 녀석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솔직히 난 카밀의 행동에 다른 의도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카밀 녀석은 지금까지도 내 부탁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역시 우리의 행로를 아는 것은 마찬가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카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밀은 자신의 정든 동료들과 헤어지는 것을 각오하고서까지 내 부탁 때문에 라네티스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제가 잘 말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하."

카밀은 자신감이 담긴 밝은 목소리로 내게 답을 하였다. 후훗. 내 본 모습으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녀석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한마디 정도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도 괜찮겠지?

"감사드려요. 카밀 경."

내 말에 카밀은 묵묵히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난 마차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내가 극구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배웅하려는 듯 추기경과 플라타니오 사제들, 그리고 카밀 녀석들을 비롯한 꽤 많은 인원이 신전의 앞에 나와 있었다.

"들꽃의 앞길에 별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마차로 다가온 추기경은 자신의 두 손을 마주잡고 플라타니오 식으로 내게 인사를  했다. 훗, 추기경에게서는 여전히 미안함이란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뭐, 추기경이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태양신의 빛이 온 대지에 가득하길."

난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포기하고 추기경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인사를 마친 추기경이 잠시 물러서고 그 여사제가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군. 지금에 와서 물어보기도 그렇고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꼭 물어봐야지.

"언젠가 다시 이 곳에 들러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라네티스님."

여사제는 무척이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날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아쉬움, 하지만 그 것 말고도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여사제의 말로 볼 때 예전에 실비네스 최고사제와의 사이에서도 이 비슷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볼 뿐이었다.

"인연이 닫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들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여사제는 창 밖으로 내민 내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 역시 왠지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별이란 그 이별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간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니까.

저 편에서 예전의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서있는 카밀 녀석들, 카밀은 그들과 인사를 한 다음, 마차 앞의 마부석으로 뛰어올랐다. 그런 카밀을 보고있는 그 들의 표정 역시 그리 밝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날 향해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 역시 여사제처럼 단지 이별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럇!"

카밀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출발을 시작했다.

"라네티스님, 카밀 단장,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라네티스님 꼭 다시 오셔야 해요!"

"단장, 라네티스님이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하면 우리가 가만히 안둘테니 잘 모셔야 해!"

"라네티스님 사랑해요!"

훗, 녀석들도 참. 그래도 고마웠다.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 편하게 만들어주려는 의도임에 틀림이 없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그 때는 내 본모습으로 녀석들 사이에서 카밀만큼이나 친숙하게 어울릴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원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멀리 땅 끝, 지평선으로 서서히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마차는 속도를 서서히 높이며 달려갔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