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3장 엘프 포레스트(8)

푸른바람 BlueWind·2004. 1. 8. AM 12:46:05·조회 1945·추천 88

"실비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일단 안 이상 예를 차리는게 옳은 일인 것 같아."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의 말이었다. 남자는 큰 덩치에 굵은 목소리 톤과는 달리 아직 얼굴은 앳돼 보였다. 대략 나이가 스물 정도? 다른 인간 여자 두명도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굳이 예를 차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쩝. 에구, 엘프 포레스트에서는 그래도 인간들의 등쌀에는 벗어날 수 있을까 했더니, 직위나 직책이라는 건 그 위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책임 역시 커진다는 진리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플라타니오 사제가 이 정도로 유명한 존재였나? 플라타니오 최고 사제란 위치의 무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커져만 가는 것 같았다.  

"주인님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 옆에 앉은 클라리가 내 팔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내 대답에도 조금 걱정이 담긴 듯한 눈으로 클라리는 날 쳐다보았다. 확실히 최근 들어 쓰러지는 일이 종종 생기니 내가 조금 이상한 기미만 보여도 클라리가 걱정을 하곤 했다. 후후, 정말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서 이래서야 예전처럼 말으로라도 클라리를 버리겠다라고도 못할 것 같았다. 그 존재가 없음에 가장 힘들어할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였으니까.

다시 그 사람들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주의를 돌리니 그들은 이미 벌써 모두 일어서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약간의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살피는 아미와 어리둥절한 표정의 나머지 일행들.

이미 난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표시를 내지 않고 그냥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 언제나처럼 최대한 가식적인 모습으로...

"별빛은 따스히. 저희들이 미숙하여 최고 사제님을 알아보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인사를 하는 건, 그 중저음 목소리의 남자. 남자의 다른일행들은 그의 행동을 따라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쩝, 이제는 이런 상황도 익숙해진 까닭에 별 어려움 없이 그들을 향해 답을 해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젊은 모험가들이여. 쉽지 않는 여러분의 앞길에 플라타니오의 빛이 가호하길 기도드릴게요."

차분히 그리고 최대한 가식적인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말을 했다. 아무리 봐도 가식임이 분명한 이러한 내 행동에 왜 의심을 하는 사람이 없는걸까? 그만큼 플라타니오의 최고사제란 위치는 가식이란걸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순수한 이들의 자리란 말인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나 같은 존재가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최근 들어 줄곧 날 괴롭히던 의문이 다시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곧 이러한 고민들을 한곳으로 밀어놓고 그 들을 살펴보았다.

내 답을 들은 뒤 뭔가 강한 눈빛으로 날 한번 쳐다보는 남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왠지모를 강렬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예전에 카이사르나 카를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인연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곧 남자는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일행들을 이끌고 자리로 되돌아갔다.

"모험가들 같네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소피, 그래도 마을에 있을 때는 가끔 만나더라도 뭐 이렇게 저렇게 꽤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여행을 떠난 뒤부터는 솔직히 말을 꺼내는 게 부쩍 줄어들었다. 특히, 클라리가 함께 있을 때는 더 심하다고 할까? 흐흠. 뭔가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평범한 모험가들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듯 합니다만...."

역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카를, 솔직히 요즘 카를을 보면 많이 불쌍하기도 했다. 뭐, 자기 부하들하고 있을 때는 편하게 말도하고 농담도 많이 하고 그랬을 텐데, 졸지에 끌려와서는 마부노릇에다 평소처럼 행동도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 한번 꺼내지 않고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있는걸 보면 솔직히 고마운 감정이 많이 들었다.

"특히 저 인간에게선 마나가 끄껴지더군."

남자 쪽을 흘끔 보며, 말을 하는 아미, 그래 확실히 마법사의 복장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나가 느껴졌었다. 그것도 낮은 수준은 아닌듯한 느낌.

"한쪽허리엔 하르모크두 달려 있던 것 같아요."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소피, 하르모크는 길쭉한 상자모양의 악기로 금속을 세공해서 만드는 악기였다. 보통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연주를 하는데, 들고다니기 간편하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어서 음유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후웅? 주인님아, 그리구 내가 잘못봤는지두 모르겠지만, 엄마의 기억이 맞다면, 남자의 호주머니에 꽂혀 있던 책은 전세계에 10여권 정도밖에 남지 않은 매우 희귀한 책인 것 같은데? 전쟁이나 전투시 전략이나 전술같은거에 대해 쓰여진 책인 것 같아."

하아? 도대체 저 남자의 정체는 뭐란 말인지, 분명한건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며 다시 침묵에 빠지는 우리편 테이블. 그 조용해진 사이로 저 쭉 테이블의 대화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와,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까 정말 아름다우신 것 같아. 고귀한 그 모습에 그 기품있는 목소리, 정말 예술인 것 같아. 너무 부러워."

분홍빛의 약간 곱슬진 머리의 그 공녀라 지칭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칭찬이라도 그런 칭찬은 그다지 기쁘지 않다고요. 쩝.

"정말 그런 것 같아."

차분한 목소리의 검은빛 머리의 여자 역시 아까와는 달리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정말 할말없음.

"블루,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거야? 헤에? 너 최고 사제님께 반한거지? 그치?"

분홍빛 머리의 여자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 특이한 블루라 불린 남자를 보며 말을 했다. 뭔가를 생각하던 블루는 그 여자를 보며 한숨을 내쉰 후 말을 했다.

"아이리스, 넌 생각하는게 그런 쪽으로밖에 연결을 못시키는 거야? 뭐, 생각할게 있어서..."

그럼 그렇지, 역시 특이한 만큼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으흠, 내가 생각해도 방금 그 논리는 뭔가 이상하지만 암튼, 살짝 화가 나려는 상황에서 조금 진정은 되는 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에? 말해줘~~. 말해줘어~~"

아이리스란 여자는 블루를 보며 말을 보채듯 말을 걸었지만 조용히 무시하는 블루, 훗, 왠지 저 모습을 보니 클라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리고 잠시 후, 블루란 남자는 아무말 없이 허릿춤에서 하르모크를 꺼낸 다음 천천히 불기 시작했다. 뭔가 익숙한 듯하면서도 또 낯선 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적 하면서도 없는 음이었다. 그런데 그 음을 듣던 소피가 처음엔 조그맣게 하지만 점점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피의 노래 소리를 들은 남자는 소피 쪽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변화 없이 역시 천천히 음을 높여갔다.




누군가는 말을 하죠. 이 세상엔 사랑이란 없다고

사랑이란 인간들의 착각이 만든 환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 들 앞에서 그런 말은 꺼내지 마세요

여기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이였지만

억겁의 윤회의 굴레를 각오할 정도로  소중한 이였지만


자신의 숙명 때문에 자신의 꿈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할 다른 것들 때문에


그 사랑을 가슴에 품은체 눈물을 바람 속에 숨긴체

백색의 칼을 들고 말 위에 올라선 외로운이 있으니까요.


그런 아픔을 겪기 전에 사랑이 없다고 노래하지 마세요.

가슴이 찢어지고, 숨을 내쉬는 것조차 고통인...


그런 슬픔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없다고 노래하지 마세요

차라리 자신의 가슴에 칼을 찌르고 싶은.....


누군가는 말을 하죠. 이 세상엔 사랑이란 없다고

사랑이란 인간들의 착각이 만든 환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 들 앞에서 그런 말은 꺼내지 마세요

여기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노래는 천천히 끝이나고 식당안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 같이 다시 침묵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왜 노래를 듣고 나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파오는 걸까? 모르겠다. 단지 테이블밑으로 내손을 꼭 잡고 있는 클라리 손의 따스함만이 느껴질 뿐.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