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보석 14장 열사의 왕국(9)

푸른바람 BlueWind·2005. 1. 17. PM 3:51:22·조회 2088·추천 83
에피소드 99 열사의 왕국(9)

“저, 하지만 군대를 움직인다면 혹 차인티 제국으로부터의 위험은 없을까요?”

난 셀주크 주변의 지도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헛, 무의식적으로 던지는 말투까지 여자 말투라는 것에 이거 안도해야 하는 건지...휴..

암튼 아리타카 사막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차인티 제국, 셀주크와의 관계는 적이자 동반자라고 볼 수 있었다. 차인티 제국은 호시탐탐 셀주크의 부를 노리며 수많은 침략을 해왔지만 그 이면에서는 꾸준히 무역 역시 진행되어왔다. 해상 교역로도 있었으나 어찌되었건 실질적으로 동, 서방의 문물 교류의 중심지는 이 곳 셀주크였으니까. 지금은 일단 평화시기이긴 하나 셀주크에서 군대를 움직인다면 차인티 제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 것도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 것은 저희에게 방책이 있습니다. 일단 그들 역시 북부의 유목민족인 모아가롤리아와의 전쟁과 남부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등을 진압하느라 틈이 없을 것으로 사려되옵니다. 그리고 아테네이오스를 향한 원정군은 소수 정예 중심으로 편성하여 만약을 대비한다면 특별히 성모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 질문에 주저 없이 답을 하는 재상 케밀 파샤의 유창한 말에 살라딘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저렇게 금방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들 역시 어느 정도의 방책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었다. 단지 이 전쟁에 참여할 확실한 명분과 기회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런지. 여러 가지 정황들이 딱 맞아 떨어지며 제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운명의 여신이 황제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일까?

“후후, 제국으로부터의 사절이 올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성모님께서 오실 줄이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새로이 플라타니오의 최고사제가 임명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일 거라곤. 저 역시 플라타니오의 성기사의 길을 택할 걸하고 이제 와서야 후회가 됩니다.”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살라딘은 특유의 매끈한 말투로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 확실히 어떤 쪽을 말하는 재주가 보통은 아니란... 정말 국왕이 되지 않았다면 뭇 여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받아주기엔 내 진짜 성별이 아깝겠지?

“그 분께서 만드신 것들 중 아름답지 않은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는 수많은 백성들을 지키시는 분. 그 중함이 어찌 다른 것에 비하겠습니까? 그 분의 수많은 발걸음 중 하나일 뿐인 제게는 옆의 카밀 경만으로도 과분할 따름입니다.”

내 자신의 이 유창한 발언에 나 스스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오랜 기간 황제와 클라리 등등과의 말싸움 끝에 쟁취한 경지. 그런 것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거라곤 정말 생각이나 했을까?  헛, 그런데 카밀, 그렇게까지 감동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하하, 제가 성모님 앞에서 말실수를 한 듯 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피곤 하실텐데 쉬심이 어떠신지...그리고 혹, 한가지 걱정이 남으셨다면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저희가 해결할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저 역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내 대답에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살라딘은 답을 했다. 사람에서 풍기는 느낌, 물론, 좀 느끼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웅의 기운, 이름을 붙인다면 그런 느낌. 아직 많은 삶을 살지 않은 나의 사람 보는 눈에 큰 신빙성을 두기도 그랬지만, 어찌됐건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게 남은 마지막 한가지 걱정거리라면 뭘 살라딘은 말하고 싶은 걸까? 설마, 그 것을? 뭐, 기다려 보면 알겠지. 내게 또 다른 골칫거리를 안겨 줄 듯 하지는 않으니. 나쁜 일은 아니겠지.

“그럼, 전하 저흰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살라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던 파샤 재상이 뒤로 조금 뒤로 걸어가더니 줄 같은 걸 당기자. 곧 셀주크 특유의 하늘거리는 복장을 한 하녀들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배정된 사람들인 것 같군. 테베를 떠난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방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겠군.



사막 저편으로 저무는 붉은 빛의 강렬한 태양, 누만시리아의 발코니에 기대서 바라본 오스마니아의 풍경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 도시 역시 포세트립톤과 비슷한 활기가 가득 느껴지는 듯 했다. 누만리아스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시장에서는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다양한 피부색과 다양한 옷차림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금 테베와 아테네이오스를 통한 상로가 차단되었는데도 이정도의 시장이 유지 될 정도라면, 평상시에는 정말 엄청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잘 정비된 도시와 굳건한 도시의 외벽, 그리고 그 성벽과 접한 곳에 펼쳐진 바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티로트 호수의 모습. 조금 아쉬운 건 세계 최대규모의 오아시스란 마하바 오아시스가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낮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뜨거운 느낌을 주는 바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리 더워서 못 참겠다 하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정말 순수하게 뜨겁다는 느낌. 그 바람 사이로 조금씩 섞여서 전해지는 모랫가루의 느낌이 사막 여행을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인님아, 일은 잘 해결 됐어?”

어느 샌가 다가와서 말을 거는 클라리를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클라리하고 둘이서만 있는 것도 참 오랜만인 듯 했다. 바쁜 일상 때문에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까?

“세리 누나의 고민거리들 중 몇 가지는 해결 될 듯해. 그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고민거리 중 하나도 술탄이 해결해 준다고 했고.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는 것 같아.”

내 옆에서 나와 비슷한 자세로 발코니에 기대서서 도시를 바라보는 클라리, 그런데 왠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며칠 전부터 계속...그런 느낌이 들어. 뭔가 악몽을 꾼듯한데 기억은 잘 나지 않고...”

클라리도 그런 꿈들을 꾸는 걸까? 나도 종종 그 비슷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미래의 일보다는 왠지 과거에 일어났었던 일을 꾸는 것 같은데...난 그냥 조용히 클라리의 손을 잡아 줄 뿐이었다.

“좋게 풀리겠지.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내가 있잖아. 그리고 이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고, 힘내자!”

나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대사와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러한 내 모습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클라리 역시 그런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사막의 짙은 붉은빛 태양에 빛나는 클라리의 백금발, 평소와 다른 이 느낌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 주인님 말대루 괜찮겠지. 그래도 창세신의 최고사제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심각한 표정을 풀고 평소의 그 밝은 표정을 돌아온 클라리. 심각한 표정일 때도 나름대로의 매력은 있었지만 역시 클라리에게는 지금의 이 모습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주인님, 그거 알아? 지금 주인님 너무너무 예뻐서 꼭 안아주고 싶다는 거.”

그 말을 마친 클라리는 몸을 조금 숙여 내 품에 안겼다. 안아주고 싶다더니...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따스함이 영원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하지만 순간 한 켠에서 내게도 느껴지는 이 불안함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