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흠 이런저런 옛날 글들을 뒤지다 보니...

푸른바람 BlueWind·2003. 1. 2. 오후 9:15:43·조회 532
백범일지 독후감을 찾았습니다^^:;
작년 여름 무렵에 써서 백범일지 독후감대회에 내서
입선을 했던 작품입니다. 쩝 동상 정도만 탔으면 대학입시
할 때 도움을 조금이나마 받았을텐데
입선은 그다지 쓸데가 없네요.

흐흐 그 글을 올려볼게요^^;;(흐흠 지금 보니 수정할 부분이
조금 보이긴 하지만...그래도 나름데로는 잘쓴것 같다는 쿠,쿨럭 ㅡㅡ;;)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울린 총소리와 함께 민족의 큰 별이 떨어졌다. 백범 김구, 한민족이라면 누구나의 마음속에서 큰 기둥으로 자리잡고 있는 분, 그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던 그의 죽음, 그것도 같은 민족의 손에 돌아가셨기에 더 큰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김구 선생과 그가 이끌었던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학교에서 배운 정도와 단편적인 이야기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는 노력을 행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연히 책장에 꽂혀 있었던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그의 정신을 높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김구선생의 출신은 지극히 평범하다. 몰락한 양반층에 재산도 그리 많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던 그였고 어린 시절 역시 평범했다. 하지만 점차 커가면서 구한말의 부정부패에 실망하며 자신의 공부 역시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관상공부를 하게 되지만 자신의 관상을 보니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상이란 걸 깨닫고 가장 중요한 심상을 다듬기로 결심한다. 나는 이 대목이 소설로 친다면 복선이라 할 정도로 후에 김구선생의 일생을 압축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항상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 고생을 하지만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독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모습, 그리고 우리민족에 큰 기둥이 된 그의 모습이 바로 이 구절 그대로 인 것이다. 그런지 몰라도 지금 남아있는 백범의 사진을 보면 관상보다 심상이 중요하단 말의 참뜻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의지가 굳은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보일지언정 가난에 찌든 초췌한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심상을 다스리기 위해 동학에 입교하였지만 여러 가지 모순이 있는 세상과 외세세력을 타파하려는 동학혁명의 시작과 함께 그는 혁명군을 이끌게 된다.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군의 참뜻과는 달리 그 당시 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군은 거의 도적단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김구가 이끄는 동학군은 본래 목적에 알맞은 행동만 했기에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고 결국 같은 동학군의 기습을 받아 군대를 잃고 안진사에게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이 때의 안진사가 바로 안중근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그 분이다. 진보적이지만 애국심이 투철한 그를 그 당시에는 선생께서도 이해하시지 못하지만 훗날 그를 이해하고 김구선생께 정신적인 큰 선생이 되신다. 그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 만큼 그 집안에서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안진사의 아들이 바로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안진사의 집에서 유학자인 고선생에게 곧은 정신을 배운 백범은 여행을 하며 큰 사건을 일으킨다. 일본군 중위를 죽인 것이다. 아무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보인 그 기개와 배포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언론효과를 고려하여 한 여러 가지 행동 역시 후에 임시정부를 구성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감옥 속에서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그 전과는 달리 서양의 그 학문 역시 우리 민족에게 필요하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백범의 모습을 보며 한가지 학문에 얽매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 비해 그 큰그릇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재판정이나 감옥 속에서 일본순사한테도 당당히 대하는 모습은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사형이 구형 될 정도였지만 절망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죄수들을 모아서 교육을 시키며 감옥 속에 있는 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큰 일을 할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사형을 당할 상황에서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는 대목에서는 모습은 심상이 제일 중요하단 김구선생의 생각이 표현되는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의사도 포기할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법한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는 목숨을 구하게 된다. 또한 선생의 어머니께서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시는 모습 역시 큰 인물의 곁에는 항상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말에 한치 어긋남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의 일생을 보면 우리 나라의 독립 운동사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학농민운동부터 시작해서 계몽사업,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그의 일생은 바로 독립운동의 표본 그대로인 것이다.
그는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로서 만으로도 만족한다 했지만 세상은 그를 임시정부의 주석의 위치까지 올렸다. 혼자 쳐 본 순사시험에서 떨어졌다 하여 그 스스로는 민족의 앞장을 설 인재가 될 수 없다 하였지만, 고작 일제의 순사시험으로 민족의 큰 어른을 평가할 수 없음이 당연한 이야기 일 것이다. 부족한 자금과 배신, 그리고 일본군대와 경찰의 위협 속에서도 민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심지어는 일제 치하의 상황에서 죽을 수 없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친일적 행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욕하지 않고 그들에게서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는 모습은 친일이란 이름아래 사소한 것까지 배척하면서도 정작 진짜 친일로 돈을 벌이거나 이익을 본 사람은 처벌하지 않아 독립 후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던 해방직후 정부의 친일파 대책과는 많이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윤봉길, 이봉창 등 수 많은 애국선열의 도움과 몇 안 되는 자금으로 가장 큰 홍보 효과를 발휘했다. 그 두 분의 도움으로 중국정부도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큰 일을 하게 된 그 계획 뒤에는 두 분을 진심으로 믿고 보냈던 김구 선생이 계셨던 것이다.
민족의 독립보다 공산주의운동을 중시했던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측이 한 행동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 민족이 있고 나라가 있어야 공산주의도 노동혁명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다. 자신들의 세력확대를 위해 독립 운동가들을 이간질 한 까닭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군들이 일본과의 싸움보다는 공산주의의 침투로 인한 내분으로 자멸한 점은 나중에 광복군이 군대의 인원수 부족으로 고심하였다는 점으로 볼 때 더욱 안타까운 점이다. 요즘에도 종교나 자신의 사상을 민족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있다. 다른 종교단체의 우상이라며 종교단체의 우상 이전에 민족의 국조인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등 그 시대 공산주의운동가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요즘에도 있다는 것을 철학과 사상, 종교, 언론의 진정한 자유와 공존을 주장하셨던 선생께서 아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훗날을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공산주의가 융성하지 못할 것임을 그는 이미 반세기전에 알고 계셨고 글을 남기셨다.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취하데 우리 나라의 옛 제도 중 좋은 것을 더하자는 그의 넓고 큰 생각은 서양문물에만 매달려서 한동안 우리 것을 잃어 버려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 지금에 더욱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결국 잘못된 욕심에 눈이 먼 일본군이 중국 땅을 유린하기 시작하면서 상해에 있었던 임시정부요인과 가족들도 많은 고생을 겪었다. 앞서 목숨을 바친 여러 의사의 공이 있었기에 중국정부는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에게 성심 성의껏 있는 힘을 다해 도움을 주려하였고 또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김구선생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며 중경까지 간신히 피신을 하게 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학생들이 일본군을 탈출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경까지 찾아왔다는 대목을 읽을 때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김구 선생께서 느끼셨던 무언가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감정을 조금이나마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우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조금 더 조국과 민족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해외 교포들의 모습 속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애국가를 부르며 중경시내를 걸어가던 50년 전의 바로 그 청년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 같다.
미국인 장교가 이끄는 훈련에서 중국인 수십 명도 못해낸 일을 우리 민족은 10명도 안 되는 숫자로 해낸다. 그런 작은 모습 하나 하나에서 김구선생은 광복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국의 광복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주적 광복을 생각하셨던 김구 선생의 바램은 무산으로 돌아갔고 외국의 간섭에 휩싸인 해방 직후 우리 나라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 혼란 속에 선생께서 돌아가셨고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후 민족상쟁의 6.25가 일어났다. 이 사실을 백범께서 아셨다면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이 여민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 앞서가는 민족이 되기를 바라신 백범선생의 바램만큼은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국민 모두가 일치 단결하여 극복하고 더 낳은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의 지식인층이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코리아란 나라에 대해 알게 될 정도로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이 굶주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우리 나라가 발전하게 된 건 우리가 독립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의 정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백범선생의 공일 것이다.
그 나라가 발전하는 나라인지 아니면 쇠퇴하는 나라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 그렇지 않고 좌절하여 주저앉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여러 위기 때마다 국민모두의 노력으로 슬기롭게 극복해내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작년에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원수같이 지내던 남북도 서로에게 표시하던 적대적 감정을 서서히 없애고 조금씩 통일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아직까지 테러와 전쟁을 일삼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보다는 훨씬 진전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백범의 죽음과 함께 반세기나 늦어졌지만 우리민족은 백범이 바라던 그러한 발전된 나라로 나아 갈 것이다. 88서울올림픽으로 냉전의 벽을 허물고 인류를 하나로 만든 큰 역할을 백범선생이 바라셨던 것처럼 우리 민족은 당당히 이룩해 내었다. 아직 남아 있고 앞으로 생길 많은 어려움 역시 백범과 같은 선조들이 계셨고 백범이 자랑스러워한 우리 민족이 있기에 극복하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 하여 어느 순간엔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써 세계무대에 등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적 사료로 귀중한 회고록 중 가장 유명한 건 아마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일 것이다. 뛰어난 문체와 표현력은 회고록 중 최고로 일컬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백범일지가 있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중요한 시대를 그 자신의 일생이 민족 독립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구한말부터 광복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백범께서는 아들들에게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하는 생활 속에서 만약을 대비해 아버지에 대해 알리기 위해 글을 쓰셨다지만 인도의 독립운동가이며 수상을 지냈던 네루가 감옥 속에서 썼던 "세계사 편력"이 딸에게만 읽히지 않았듯 백범의 글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백범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백범일지가 남아있는 한 우리민족은 대대손손 독립의 귀중함과 그 독립을 위해 노력하셨던 선조들의 피와 의지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