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썼던 신라관련 헛소리^^;;

푸른바람 BlueWind·2003. 12. 8. 오전 1:34:52·조회 377
옛날에 제가 만들었던 홈피 뒤지다가 보니 제가 썼던 글이 나왔는데
맘이들어서 올립니다^^;;;

신라는 박혁거세란 인물에서 시작한다. 6촌의 촌장이모여 지도자를 걱정하는데 우물가에서 말이 알을 품고 있다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마후에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촌장은 그를 그 들의 왕으로 삼는다.

이 신화의 내용을 해석하자면 말이란 기마민족을 뜻하는데 북쪽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인 박씨 성을 가진 부족이 6촌의 토착세력과 융합하여 왕위에 오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뒤에 신라 금관이라든지 여러 유물에서 시베리아지역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들과의 유사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라는 3성이 돌아가면서 왕이되는 이채로운 지배체제를 가진다. 그만큼 왕권이 약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유이민들이 토착세력을 완전히 억누르고 그래도 한 성씨에서 왕이 선출 되었지만 신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신화에도 문제점이 있다. 그 당시에 아무리 소국이 많았다 하더라도 6촌으로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6촌으로선 일개 군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6촌보다는 큰 개념이 축소되지 않았나 싶다.

그 뒤 신라는 왕권의 약화와 문화적인 열세로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이것은 광개토대왕 때까지 지속되며 나제동맹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많은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3성이 돌아가며 왕위에 오르던 혼란기가 끝나고 신라는 김씨성에의한 왕위 세습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항상 가야에게 문화나 군사적인 열세로 밀리던 신라는 오히려 가야를 억누르며 자신의 세력권에 넣을 정도로 발전을 한다. 그리고 그 전의 신라에게는 대국이었던 백제나 고구려와도 대등한 외교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나제동맹이 시작됨으로 해서 신라의 발전은 시작된다. 달도차면 기울 듯 알게모르게 여러 가지 쇠퇴의 기운이 보이던 백제와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는 화랑제도라는 신선한 인재양성법으로 삼국의 주도권을 지게 되는 것이다. 백제와함께 고구려를 북쪽으로 밀어내고또 백제와의 전쟁을통해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신라가 두 나라와의 일전을 벌려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 된다.흔히들 영토만을 놓고 고구려의 강함을 이야기들 하지만 오히려 영토보다는 백성들의 머릿수가 그 시대의 국력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영토가 넓은들 국민이 없다면 그 국가는 강한나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신라와 고구려 백제는 영토의 크기는 달라도 전성기 때에는 서로 대등한 국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와의 일전을 하였던 시점의 고구려의 인구는 약 350만으로 추정되며 백제는 무령왕때 250만, 신라는 진흥왕때 300만이 었다고 한다. 이렇게 영토가 아니라 인구의 수치로 본다면 왜 고구려가 삼국을 쉽게 통일하지 못했냐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다른 두나라와는 달리 외교적인 면에서 아주 뛰어났다. 그 다음단계로의 발전을 위해 여러나라와 힘을 합치는 방법을 알았으며 항상 자신의 이익을 달성하는 편이었다. 세력이 약할땐 고구려의 속국으로 보호를 받았으며 나제동맹을 통해 자신들의 자주성과 국력을 넓혔고, 결국엔 중국과의 동맹으로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동시적인 공격을 막아내고 또 반격한 것을 볼 때 진흥왕이후에는 군사적인 전략이나 기술 면에서도 아주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백만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정예병, 바다를 누비며 요서와 산둥반도에 속국을 건설한 백제의 병사들과의 전쟁에서도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보적인 면에서도 뛰어나 적국의 내정의 허실을 탐지하여 분열을 시키며 결국 내부에서 무너지게 만들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신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통일 후 한반도 지배야욕을 들어낸 당군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다. 우리는 고구려가 수와 당의 군을 격파한 것은 크게 보면서도 신라의 것은 그리 크게 보지 않고 있는게 현실이다. 오히려 고구려때보다 신라가 더 위급한 상황이었다. 고구려가 공격을 받았을 때는 당군이 천천히 외곽에서 고구려의 방어선을 뚧고 들어와야 되기 때문에 고구려는 시간적 여유가 있엇지만 신라의 경우 이미 영토 한가운데에 당군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수비로서의 유리함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신라가 당나라의 일전을 불사하고 북쪽으로 진출하였다면 고구려의 영토을 회복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위해 벌인 전쟁의 대의명분 때문에 대동강이남 선을 지키지만 신라의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신라의 전기 역사에대한 대략적인 소개와 설명을 하였다 주로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지만 이건 개인적인 소견일뿐 모모 교수님이나 모모 학자가 쓴 정확한 이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통일에 이런점도 있다는 것에대해 알리고 싶었을 뿐 더 이상 다른 뜻은 없다.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와 후삼국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한다.

이 글은 옛 글터(2013–2021)에서 보존된 읽기 전용 아카이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