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이야기
해상 추격 (퇴고본)
폭음과 함께 거대한 물기둥이 배 좌우로 솟구쳤다. 물기둥이 무너지며 배가 좌우로 기우뚱 피칭을 시작했고, 케네시스 함장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조타수! 풍하로 키 꺾어! 우현 고정!"
함장의 명령에 자기 몸통만 한 타륜을 잡고 있던 조타수가 끙, 외마디 소리를 내며 힘껏 우측으로 타륜을 돌렸다. 톱니가 맞물리는 둔탁한 감각과 함께 배가 우측으로 기울었다.
펑, 펑!
"…저놈들, 화약 아끼는 법도 모르나."
함장은 이를 악물었다. 호위대도 없이 나선 게 실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행한 단독 항해가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는 우울한 눈으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멀리 육지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혔다. 보이긴 보이는데 — 너무 멀다. 그리고 너무 느리다.
함장은 함교로 뛰어들어 해도를 펼쳤다. 컴퍼스로 현재 위치와 육지까지의 거리, 도착 예정 시간을 계산했다. 어차피 부질없는 짓이었다. 종이 위의 숫자가 배의 속도를 끌어올려 줄 리는 없었다. 결국 그는 해도를 구겨 던졌다.
"…심각한 상황인가요?"
"보면 모르 ——, 맙소사. 공주님."
함장은 하마터면 컴퍼스를 집어 던질 뻔한 자신을 다잡았다. 분명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라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공주님! 여기 계실 곳이 못 됩니다. 어서 격실로 돌아가세요!"
"토할 것 같아서 바람 좀 쐬러 왔어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배가 흔들리는 통에 떨어졌어요. 멀미가 너무 심해서요."
이 나라가 자랑하는 미모의 재원, 엘바 공주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서 더 도드라지는 새빨간 입술을 보고, 함장은 하마터면 자신의 신분을 잊을 뻔했다. 저분은 공주님이다. 함장은 자신에게 두 번 일렀다.
"그래도 공주님, 안에 계시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공주는 보이지도 않을 함미 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누구도 그 표정을 지적할 수 없었다. 무릎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곧 죽는 건가요?"
"그런 말씀 마세요, 공주님! 제가 기필코 육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펑!
거대한 소리가 가까이서 터졌다. 좌현 지근거리에서 폭탄이 떨어지며 물기둥이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거리가 있던 포탄이 점점 배에 근접하고 있었다. 솟구친 물기둥은 그대로 함교를 휩쓸었고, 공주와 함장, 조타수는 순식간에 바닷물을 뒤집어썼다. 공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정 함미 선박 네 척 발견! 거리 사 마일! 거리 점점 —!"
콰직, 소리와 함께 돛에 올라가 있던 견시의 말이 삼켜졌다. 포탄이 돛을 관통하면서 돛은 그대로 우측으로 쓰러져 바다로 떨어졌다. 견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다로 휩쓸려 들어갔고, 배가 지나며 만들어내는 물결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평상시라면 배를 돌려 구조에 나섰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첫 명중탄. 그것은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는 뜻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측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구나. 화약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까. 함장은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백지장이 된 공주에게 다시 격실로 들어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배가 갑자기 붕 떠오르더니 거칠게 롤링을 시작했다. 몸이 위로 살짝 떴다 싶은 순간, 강한 중력이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함장도 비틀거리다 간신히 해도대를 붙들어 넘어지지 않았다.
"함장님! 타륜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방금 그 롤링으로 타륜이 망가진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조타수, 비상 타기로 뛰어!"
조타수는 복명복창도 잊은 채 부리나케 뛰어 함미로 내려갔다. 함미 아래쪽 비밀 공간에는 만약을 대비해 만들어둔 비상 타기가 있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이야. 함장은 브리지로 뛰어가 재빨리 노를 살폈다. 예상대로였다. 어떤 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이 엉켜 멈춰 있었다. 추진력을 잃은 배가 파도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롤링을 시작한 이유였다. 돛을 펼치면 속도를 더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바람이 역풍으로 불고 있었다. 돛을 펼치는 순간 노조차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함장은 속에서 온갖 욕설을 끌어올렸고 실제로 입 밖으로 쏟을 뻔했다. 공주가 곁에 있어 입을 다물었다고 하기엔, 사실 그 순간 너무 많은 욕들이 동시에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다 서로 걸려버린 탓이 더 컸다.
함장은 공주를 그대로 둔 채 갑판으로 뛰어내려가 해치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노예장! 똑바로 안 하나! 다 죽고 싶어!"
함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예장이 끙차, 소리와 함께 노예 하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노예는 탈진해 기절해 있었고 한쪽 팔뚝은 근육이 터졌는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노예장은 폭발 직전인 함장을 보고 외쳤다.
"함장님! 노예가 기절했습니다! 노 저을 사람이 없습니다!"
"개새끼야! 네가 저어! 죽기 싫으면!"
노예장은 자기 이름이 언제 개새끼가 되었나 따져볼 겨를도 없이 곧장 뛰어 들어갔다. 함장은 해치를 거칠게 닫으며 소리쳤다.
"포술장!"
브리지에서 측거의를 들고 함미를 쫓아오는 선박과의 거리를 가늠하던 포술장이 재빨리 달려왔다.
"당장 모든 대포를 함미로 집결시켜! 빨리!"
"네? 카로네이드포밖에 없는데요? 그 거리로는 도무지 ——"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나, 포술장! 빨리 집결 안 시키나!"
"네!"
포술장은 함장의 명령에 짧게 답한 뒤 갑판으로 뛰어갔다. 돛을 정리하고 만일의 전투에 대비하던 갑판요원 몇을 불러서, 나사로 고정되어 있던 포들을 분해해 함미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함장님! 준비 끝났습니다."
"쏴!"
"네?"
"쏘라고! 조준 따윈 됐다! 그냥 발사해! 포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포술장은 자신이 어디가 부족해 그런 소리를 듣는지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발사 명령만 외칠 뿐이었다. 케네시스 함은 카로네이드포를 함미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망원경으로 모든 상황을 여유롭게 관전하던 찰리가 멍한 소리를 냈다.
"어랍쇼?"
자신의 눈에 비친 광경이 자못 괴이했다. 케네시스 함이 대포를 쏘고 있었다. 물론 그 포탄은 자신들의 배 한참 앞바다에 떨어져 부질없는 물기둥만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시야 교란조차 못 만들 텐데.
"저것들, 포 쏘고 있는데요?"
케네시스 함과 줄루 함의 거리는 삼 마일. 카로네이드로는 아무리 멀어야 이 마일이 한계일 텐데. 찰리는 속으로, 계산이 안 맞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도망치려는 거지."
줄루 함을 책임지고 있던 오스카가 씹어뱉듯 말했다.
"도망이요?"
"저쪽 함장이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야. 다만 타이밍이 늦었지. 조금만 일찍 했다면 모를까."
"네?"
"속도 말이다. 단순한 작용 반작용이야. 찰리, 육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지?"
오스카의 말에 찰리는 육분의를 잠시 살폈다.
"지금 이 정도면…… 대략 이십 마일 정도 남았네요. 지금 속도라면 육상 포의 사정거리인 십육 마일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따라잡습니다. 한 시간, 길어야 두 시간."
"각별히 신경 써라. 귀한 고객이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요. 마음만 먹으면 더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 아래 노예장이 좀 고생하긴 하겠지만요."
찰리는 자기가 말해놓고 무엇이 그리 웃긴지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이대로 쫓아가. 그리고 견시 똑바로 둬. 케네시스 한 척이니까 따라가는 거지, 군함이 한 척이라도 나타나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
"알겠습니다요."
찰리는 그 말을 남기고 함교를 빠져나갔다. 오스카는 저 멀리 도망치는 케네시스 함을 응시하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친다는 건, 공주가 타고 있다는 뜻이군. 따라잡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줄루는 속도를 내며 컬버린포를 계속 쏘아댔다. 포술장은 거리 측량을 끝냈는지 휘파람을 불며 포술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컬버린포의 장점은 긴 사정거리였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컬버린을 정확히 쏘기란 쉽지 않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육지와 달리 거리감을 잡기 어려워, 실전에서는 잘 쓰지 않는 포 중 하나였다. 대신 장전 속도가 빠르고 위치 이동이 자유로운 카로네이드포가 주로 사용된다.
또한 케네시스 함은 범선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순풍이 불면 상당히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지만, 바람이 없을 때는 함저의 노예들이 노 젓는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덩치 큰 범선을 노 힘만으로 끌고 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카로네이드포로 추진력이라도 더해보려 했겠지만, 그 작은 포로 얻는 반동은 미미했다. 예상대로 줄루 함과 케네시스 함의 거리는 순식간이라 할 만큼 좁혀졌다.
"차라리 근접했을 때 카로네이드로 붙어 싸워보지 그랬나."
오스카는 맨눈으로도 케네시스 함이 보이기 시작하자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쪽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물론 그래도 내가 이겼겠지만. 줄루 함은 준비된 카로네이드 포탄이 다 떨어졌는지 이미 조용했다. 포술장 칼커큰은 포 쏘기를 중단하고, 만일에 대비해 카로네이드포를 우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네시스 함은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줄루 함의 정면에 멈춰 섰다.
오스카는 줄루 함을 좌현으로 붙이라 명령한 뒤,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케네시스 함을 살폈다. 케네시스 함의 돛대 위로 하얀 천이 올라오자 줄루 함의 승조원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이윽고 줄루 함은 케네시스 함의 좌현에 완전히 붙어 섰고, 호줄이 케네시스 함을 붙잡은 뒤 줄루 함의 승조원들이 대거 케네시스 함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오스카가 케네시스 함으로 건너갔을 때는 이미 찰리가 먼저 들어가 고함을 치고 있었다.
"와후! 바다의 왕자, 찰리 납셨다! 엘바 공주 어디 있어? 어디 있어!"
함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옅은, 그러나 분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엘바 공주는, 여기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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