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1)

현이이야기꾼·2026년 5월 12일 AM 05:01·7,077

"All we are doing is looking at the time line... and we are reducing the time line by reducing the non-value adding wastes."

(우리가 하는 일은 오직 타임라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낭비'를 제거함으로써 그 타임라인을 단축시킨다.)

— Taiichi Ohno, Toyota Production System (1988)

“……결국, 올 것이 왔군요.”

최경원은 낮은 한숨과 함께, 들고 온 가죽 노트 위에 깃펜을 내려놓았다. 조웅철 상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알고 있었나?”

“3분기 재무제표를 봤습니다. 중동 플랜트 미수금이 장기화되면서 부채비율이 위험수위를 넘었더군요. 다음 달 돌아오는 PF 대출 만기를 막으려면, 당장 현금 흐름부터 개선해야 하니까요.”

최경원은 담담하게 팩트를 짚어냈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권단에 보여줄 가장 확실한 자구책은 결국… 인건비 절감이겠죠.”

조 상무는 씁쓸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역시 최 팀장이야. 회사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보고 있구만. 맞아. 회사는 지금 창사 이래 최대 위기야.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거고.”

“MBA 지원한 값, 제대로 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게라도 이해해주면 다행인거고.”

“……하지만 상무님. 이건 숫자를 지우는 게 아닙니다. 몇 명이 될지 모를 가장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입니다.”

“나도 알아! 나라고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하지만 지금은 살점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결단하지 않으면 몸통 전체가 썩어 문드러질 판이야.”

조 상무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서류철을 내밀었다.

“다른 놈들은 겁먹어서 도망가거나, 노조 눈치 보느라 우왕좌왕할 거야. 하지만 자네라면 가장 합리적인 기준을 세울 거라고 생각해. 누구보다 유능하니까.“

최경원이 그래도 망설이는 듯 보이자 조웅철 상무는 간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회사를 위해 하라는 게 아니야. 떠날 사람들과 남을 사람들을 위해 하라는 거지.”

최경원은 서류철을 바로 집어 들지 못했다. 서류철에는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고정비 절감 및 재무구조 개선안]이라는 제목이 맑은 고딕체로 찍혀 있다. 아마도 채권단에서 요구하는 숫자와 전략기획실에서 추산한, 그래서 최경원이 절감해야 할 숫자가 높은 확률로 적혀 있을 것이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가 짊어져야 할 원망과 비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최경원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기서 자기가 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지면 더 엉망진창인 방식으로 칼춤이 벌어질 것이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결심한 듯 상무를 똑바로 응시했다.

“맡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희망퇴직 위로금, 업계 최고 수준으로 보장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직 지원 프로그램 예산도 최대로 편성해 주셔야 합니다.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친 분들입니다. 빈손으로 내쫓을 순 없습니다.”

조 상무는 잠시 망설이다가, 최경원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재무팀하고 싸워서라도 그건 내가 책임지지.”

최경원은 그제야 서류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서류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언제까지입니까?”

“에이에스에이피(ASAP). 최대한 빨리. 보안 유지는 생명인 거 알지?”

“내일 오전 회의 전까지, 가장 합리적이고 예의 갖춘 기준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최경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조 상무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내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최경원이 자리를 나오자마자 주변 동료들이 웅성거리면서 다가왔다.

“뭐예요, 팀장님? 조상무님이 왜 불렀대요?”

최경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최경원은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치근대던 팀원도 최경원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CHRO인 조상무님이 인사기획팀장을 별 이유없이 부르진 않았을 테다.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최경원의 주변을 어른거렸지만 애써 모른척 했다. 비밀리에 하라고 했으니 동료들이 다 일하는 시간에 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고, 최경원은 별 핑계를 다 대면서 야근을 자처했다. 모든 동료가 다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최경원은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경영 효율화 및 조직 체질 개선을 위한 희망퇴직 시행(안)>

제목은 희망퇴직이었지만 사실상 구조조정이었다. 한동안 최경원은 제목만 치고 움직이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KKS 앵커 박연우입니다. 오늘 주요 기업 소식은, 국내 초대형 건설사인 (주)거신건설의 충격적인 구조조정 발표 소식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현장 리포터 나와 주세요.”

뉴스 화면이 바뀌면서 거신건설의 본사 화면이 비춰졌다. 리포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리포터의 목소리가 뉴스로 흘러 나왔다. 뉴스 화면에서는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항의하는 노조의 모습이 연달아 비쳐졌다.

“네, 국내 굴지의 초대형 건설사 거신건설이 오늘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인력 구조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회사 측은 경영 효율화라고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이를 사실상 대규모 희망퇴직 수순으로 보고 있습니다.

회사 측에 따르면, 글로벌 경기 침체와 주요 해외 플랜트 사업장의 부실, 그리고 국내 부동산 시장 경색의 삼중고로 인해 유동성 위기가 심화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거신건설은 전체 임직원 중 약 6%에 해당하는 450명 규모의 핵심 인력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인력 구조조정은 조직의 핵심인 전략기획 및 기술직을 포함하고 있어, 단순한 현장 인력 감축을 넘어선 ‘조직 체질 개선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됩니다.

회사 측은 ‘미래 경쟁력 확보와 비용 절감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지만,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경영 위기가 곧바로 수백 가구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만큼, 정부와 채권단의 신속하고 면밀한 대응이 요구됩니다.”

거신건설은 표면적으로는 희망퇴직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군살 도려내기였다.

450명. 전체 임직원 7,000여명 중 약 6%.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별거 아닐 수 있지만 IMF 외환  위기 시절을 제외하면 업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 감원이었다. 이는 단순히 책상 몇 개를 빼는 차원이 아니었다. 적자 늪에 빠진 사업부 하나를 통째로 들어내면서도, 회사를 지탱하는 캐시카우인 주택 사업부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아야 하는 고난도의 외과 수술이었다.

450명은 채권단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최경원이 산출해 낸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거신건설 정규직 450명 뒤에는 그들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수십 개의 협력업체, 수천 명의 하청 노동자들의 밥줄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본사의 기침 한 번에 하청업체는 독감을 앓는 법. 이번 구조조정의 여파는 건설 현장의 밑바닥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띠띠띠띠띠-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최경원이 어두운 집안으로 스윽 들어왔다. 최경원은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현관문 앞에 누워버렸다. 조 상무로부터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6개월이 지났다. 하루종일 붉은 머리띠를 두른 노조원들의 고성 속에서 갇혀 있던 최경원은 아직도 그 고성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환상을 겪었다. 머리가 또 지끈 아파왔다.

겨우 신발을 벗고 기다시피 방으로 들어가 두통약을 찾아 꺼냈다.

“후, 이놈의 두통. 최근 들어 너무 잦은데. 약발도 안 받아. 일 마무리되면 병원부터 찾아야겠어.”

물과 함께 약을 꿀꺽 삼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최경원은 약을 먹고 나서 바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약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지끈거리는 두통은 여전했지만 빨리 일을 마무리 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작은 희망퇴직이었지만 사실상 구조조정이었다. 대상자는 정해져있고, 그 대상자들을 상대로 씨름해야 한다. 남은 것은 그들을 대상으로 한 지루하고 잔인한 씨름 뿐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른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는 요건이 까다롭다. 강제로 내보낼 수 없다면 스스로 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가 얼마나 위급한지, 왜 당신이 나가야 하는지 완벽한 당위성, 즉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시간은 촉박하지만 경영진의 의지는 확고하다.

최경원은 노트북에 금방 몰입했다. 빠르게 채워지는 노트북의 엑셀 화면에서 보여주는 숫자는 회사가, 그리고 그가 진행하고 있는 인력조정이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해준다. 거신건설은 해외 투자에 분명히 실패했고, 그로 인한 유동성 부족에 휘말릴 염려가 있다. 최악의 가정이겠지만, 이번 작업이 실패하면 도산은 물론이고 그룹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 결국 실패의 책임은 누군가가 져야 한다.

두근. 지끈.

약을 먹었지만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괴롭히고 있다. 심장은 누가 쥐어짜는 것 같이 답답하다. 노트북 키보드를 타이핑 치는 손은 고통에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느덧 목표했던 일의 대부분이 마무리되고, 마지막 회의록 작성을 할 차례다.

최경원은 가만히 눈을 감고, 낮에 있었던 3차 노사회의를 떠올렸다.

“이봐, 최 팀장. 지금 장난해?”

회의실의 적막을 깬 것은 서류 뭉치가 테이블 위로 내리꽂히는 둔탁한 소리였다. '결사 투쟁'이라고 적힌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노조위원장, 강학철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게 어디 있어! 나 거신건설 노조위원장이야! 현장에서 20년 구른 사람이라고. 우릴 바지저고리로 알아? 이렇게 하고도 당신들이 무사할 줄 알아?”

최경원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짐짓 차분한 표정으로 빔프로젝터 화면을 가리켰다.

“아유, 알죠. 위원장님 노고 누구보다 잘 압니다.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위원장님,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이것 좀 봐주십시오. 수치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수치? 놀고 있네. 그 잘난 엑셀 놀음이 우리 밥 먹여준다디?”

“엑셀 놀음이 아닙니다. 생존 지표입니다. 보세요. 올해 3분기 영업이익률 마이너스 12%, 부채비율은 400%를 넘겼습니다. 당장 다음 달 돌아오는 PF 대출 상환 못 하면, 우리 다 같이 죽습니다.”

최경원의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하지만 위원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수치는 무슨 얼어 죽을 수치! 그렇게 회사가 어려우면, 그동안 벌어놓은 사내유보금은 다 어디다 까먹고 이제 와서 직원들 쥐어짜는 거야? 난 납득 못 해. 이번 구조조정안, 절대로 도장 못 찍어주니까 꿈도 꾸지 마!”

“위원장님, 제발 현실을 직시하세요. 이대로 가면 450명이 아니라 7천 명 전원이 길거리에 나앉는 유동성 위기가 옵니다. 지난달에도 어음 겨우 막은 거, 아실 만한 분이 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래! 해외 투자 실패라고 하자고!! 그 알량한 신도시 짓는다고 사막에 돈 쏟아부은 게 누구야? 본사 임원들 아니야?”

위원장은 삿대질을 하며 최경원의 넥타이를 잡을 듯이 들이댔다. 그의 거친 숨결에서 믹스커피와 담배 냄새가 섞여 났다. 절박함의 냄새였다.

“경영적 판단 미스였으면 경영진이 옷을 벗어야지! 왜 임원들은 연봉 쥐꼬리만큼 깎는 척하고 자리는 보전하면서, 엄동설한에 우리 같은 근로자들만 내보내냐고! 이게 당신들이 말하는 합리야?”

“경영진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임원 급여 30% 반납하기로 결의했고, 본부장급 이상은 스톡옵션 포기했습니다.”

“30% 반납? 하! 그 양반들은 그거 없어도 골프 치고 외제차 굴리는 데 지장 없어! 하지만 우리 조합원들은 이번 달 월급 끊기면 당장 대출 이자에 애들 학원비가 막힌다고! 그 무게가 같아?”

최경원은 말문이 막혔다. 위원장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논리로는 최경원이 이길지 몰라도, 명분과 도의에서는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사 팀장이었다.

“위원장님. 저도… 저도 괴롭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십자가를 져야 남은 사람들이 삽니다. 희망퇴직 위로금, 업계 최고 수준으로 책정했습니다. 전직 지원 프로그램도….”

“집어치워! 돈 몇 푼 쥐여주고 내쫓으면 그만이야? 난 책임 있는 경영진, 그러니까 사장 나오라고 해! 사장이 직접 와서 무릎 꿇고 빌기 전에는 절대 동의 못 하니 알아서 하쇼! 만약 강행하면….”

위원장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일부터 본사 로비 점거 들어갈 거야. 그리고 부당노동행위로 노동부 고발에 가처분 신청까지, 법대로 끝까지 갈 거니까 각오해!”

쾅!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최경원은 낮에 있었던 노조위원장과의 대화가 머리속에 계속 잔상처럼 남았다.

“이러려고 인사 일을 시작한게 아닌데…….”

최경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오늘 노조와의 회의록이 갈무리 되었다.

인사일을 시작한지 어느덧 14년차가 됐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겠다고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정적이고 드라이한 공무원 공부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기업에 입사하여 시작한 게 바로 인사과다. 처음에는 인사라는 단어가 주는 파워에 설랜적도 있었다.  실상은 모든 일에서의 조연일 수밖에 없는 부서가 인사과다. 실망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연을 자처했다.

“이렇게 주연이 되어 버리다니.”

평생 조연으로서 일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주연 무대로 등장했다. 출근하면 기자들의 전화가 쇄도한다. 사람들은 누구보다 팀장 자신의 입과 손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회의록을 회사 클라우드 시스템에 업로드를 시킨 참이었다.

“억, 윽!”

갑자기 가슴 통증이 오자 최경원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우당탕 하면서 최경원이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팔에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트북의 전원선이 강제로 빠지면서 허공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끝나면…….’

흐린 시야 속, 그것이 최경원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이제 겨우 프로세스가 발동 돼 노조와의 첫 삽을 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아 남았다. 기획이자 실행까지 맡고 있는 그가 사라지면 후임자가 누가 됐든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특히 노조는 지금 적대적 감정을 품고 있다.

그래도 그와는 이제 상관이 없는 사건이 됐다. 노트북에서는 최경원의 마지막 일인, 노조와의 회의록만 빛을 내고 있었다.

 

이 글에 대해 합평을 남기시겠어요?

합평은 본문 옆에 댓글이 아니라, 광장의 합평방에 별도의 글로 올라갑니다. 작가에게 알림이 가요.

합평 작성하기 →

댓글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