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5)

현이이야기꾼·2026년 5월 16일 PM 11:14·6,225

 

“전원 동작 그만! 다들 하던 거 멈춰!”

갑작스러운 콘라드의 고함에 주방 사람들이 일제히 멈춰서 그를 쳐다보았다. 콘라드는 팔짱을 낀 채로 흠,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닭을 잡던 하인은 엉거주춤하게 멈췄고, 마사는 감자를 깎다가 깜짝 놀랐는지 딸꾹질을 했다. 장작을 나르던 하인은 급히 멈추다 장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국자를 든 주방장이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도련님?”

“왜, 주방장?”

“지금 저녁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요. 장난치실 거면 남작님께서 경을 치실 겁니다. 한스 집사님이라도 알게 된다면…….”

“한스 집사가 그렇게 무서워?”

“아닙니다요.”

콘라드의 말에 주방장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고함친 건 장난이 아냐. 잠깐 봤지만 너무 엉망진창이라서 그랬어.”

콘라드는 주방장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지금 잠깐 봤는데. 자네는 국자를 찾느라고 화덕에서 도마까지 무려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더군.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과 계속 부딪힐 뻔하고.”

콘라드는 닭을 잡고 있는 하인에게 다시 다가갔다.

“너는 뒷문에서 닭을 들고 들어오면서 하녀와 부딪혔어. 덕분에 깨진 접시 조각이 바닥에 있는데 아무도 치우지 않아. 그 위를 식재료를 든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고 있는데. 이게 평소의 주방 모습이 맞아?”

주방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라 반박을 하고 싶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의 콘라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기에 당황해서 미처 대처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콘라드는 우울한 기운에 언제나 소심한 모습이었다. 콘라드는 주방장의 머뭇거림을 확인하고 다시 소리 질렀다.

“모두 마당으로 나가!”

머뭇거리던 주방 사람들은 마사가 먼저 나가자 뒤따라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주방장은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콘라드를 째려보고는 마지못해 나갔다.

“도련님, 장난이면 도를 지나치셨습니다. 한스 집사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한스 집사라. 안 무서운데.”

콘라드, 아니 최경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는 한스 집사가 콘라드보다 위였다. 아무리 서자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은 귀족의 아들이고, 한스 집사는 평민이다. 아무리 잘 봐줘야 자유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저질러버렸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최경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따라 나갔다. 이렇게 일을 벌리는 것은 최경원 성격은 아니다. 천천히 데이터를 모으고, 기획을 한 뒤에 준비가 되었을 때 실행한다. 인사 팀장이었지만 전략통 소리를 듣고, 사내 MBA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콘라드의 기억과 감정이 섞이면서 무언가 달라졌다.

마당으로 나가자 주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콘라드는 옆에 있는 마구간 구석에서 하얀 석회석을 집어 들었다.

“모두 잘 봐. 이제부터 내가 그림을 그릴 거야.”

콘라드는 주워 든 석회석으로 마당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넓은 네모 모양부터 해서 하나하나 사각형과 동그라미들이 그려지고, 콘라드는 이윽고 멈춰 섰다.

“이 그림이 뭔지 짐작이 가는 사람?”

“……주방인가요?”

누군가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맞았어.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요리를 할 거야.”

“보이지 않는 요리요?”

“그래. 진짜 요리 할 필요는 없지만 너희는 진짜 요리하는 것처럼 움직여야 해. 바로 모의훈련이지.”

최경원은 MBA 시절 케이스 스터디를 하며 발표했던 맥도날드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을 떠올렸다. 당시 미국에서도 오래 걸리던 햄버거 조리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경영 효율을 만들었던 전설적인 시스템이다. 맥도날드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각자 할 일을 정해주는 것도 방법이지만, 직무를 정하는 것은 당장의 환경에서 월권에 가깝다. 차라리 동선을 정리하는 게 더 깔끔하다. 시스템만 갖춰지면 사람은 누가 와도 어떻게든 굴러간다. 물론, 언젠가는 직무 분류를 해야 완성된다.

‘우선 이것부터. 현재 상황에서는 직무 배정보다 시스템 설정이 더 우선이야.’

주방장은 콘라드의 말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콘라드 도련님, 이거 월권입니다!”

주방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도 화가 나 있는 상황인지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이제 곧 저녁 시간이 됩니다, 도련님. 이런 장난 놀음에 맞춰주다가 저녁 시간에 늦기라도 한다면 남작님과 남작 부인께 경을 치르는 건 저희입니다.”

“아니, 난 지금 장난하는 게 아냐. 설사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하지.”

“……서자 주제에 무슨 책임을 진다고.”

누군가 조그맣게 중얼거렸고, 최경원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대신 더 크게 소리쳤다.

“내가 비록 서자이지만, 그래도 헨릭이라는 성을 달고 있다. 그게 어머님의 요청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지도록 하지. 설사 이름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콘라드의 결연한 말에 사람들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는 선을 그린 바깥에 서서 외쳤다.

“모두들, 아까 주방에서 하던 자리에 서서 일을 하는 척을 시작해 보자.”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있지!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거니까.”

“시멜……이션? 그건 뭡니까?”

“있어! 그런 거! 하여튼, 모두들 각자 자리에 서봐!”

콘라드의 호령에 하인들과 주방장은 마지못해 마당에 그려진 주방 그림 위로 올라섰다. 시뮬레이션인지 시멜리션인지, 하인들은 콘라드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하인들은 어색한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지만, 콘라드는 이내 재촉했다.

“요리를 진짜 하지는 않지만, 실제 재료는 직접 가지고 와서 움직여 보는 거야. 주방장,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였지?”

“닭 훈제 요리와 당근 수프가 메인이었습니다.”

“그럼 각자 자리에 필요한 재료를 가져오는 것부터 해보지. 자, 시작!”

하인들은 콘라드의 말에 이것저것 움직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움직인 것은 마사였다. 마사는 콘라드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자,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움직였다. 그녀는 재빨리 뛰어가서 감자를 가지고 오더니 자기 자리에 섰다. 마사는 감자를 깎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우와,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재밌네요?”

“그러게. 그냥 노는 것 같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콘라드 도련님이 이름 걸고 한다고 했으니까 무슨 생각이 있으시지 않겠어?”

“서자 주제에 무슨……”

그 놈의 서자. 최경원은 이번에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사람들은 이윽고 각자 중얼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하다가 금세 “어어” 하며 부딪히기 시작했다. 실제 장비가 없고, 실제로 요리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병목 현상이 금세 발생했다.

“불을 피우려면 장작이 필요하지……. 장작 좀 갖다 줘!”

“잠깐만! 어이쿠, 뭐야, 왜 여기에 있어?”

“뭐 하고 있기는. 설거지하고 있었지.”

“설거지를 왜 여기서 해?”

“여기 말고 그럼 어디서 하나?”

“닭! 닭은 누가 가져올 거야?”

“닭은 내가 가져올, 아차차! 부딪힐 뻔했네.”

“거참, 조심 좀 하지. 잘못하면 손 베일 뻔했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최경원은 이 꼴이 딱 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꽈당! 마사가 다 깎은 감자를 들고 가다가 화덕이라 표시된 지역에 서 있는 주방장과 부딪히며 넘어지고 말았다. 감자 바구니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주방장은 그 광경을 보고는 콘라드에게 소리쳤다.

“도련님! 이제 이런 장난은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도 재미없고,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이럴 시간에 빨리 주방으로 복귀해서 일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최경원은 속으로 문제점이 생각보다 빨리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콘라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냐. 아주 좋아. 내가 생각한 대로 가고 있어. 여기서 마사와 주방장이 부딪힌 이유를 파악하면 많은 것이 해결될 것 같은데. 주방장, 보통 자네가 화덕을 보고 있나?”

“당연하죠. 불은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데 제가 그걸 보지 않으면 누가 봅니까?”

“그러면 자네는 화덕을 보면서 장작을 넣으려면, 장작 통은 어디에 있는 게 가장 편할 것 같아?”

“아, 당연히 오른손에 있어야죠. 국자를 왼손에 쥐고 있으니까요.”

콘라드는 하얀 석회석을 들어서 주방 선을 일부 수정했다. 장작 통은 주방장 뒤에서 오른쪽으로 이동을 했다. 콘라드는 마사를 보면서 다시 이야기를 했다.

“마사, 주방장이랑 왜 부딪힌 것 같아?”

“어……. 그냥 감자를 씻어서 갖다 주려는데 주방장님이 여기 계셨어요.”

“좋아. 그러면 여기를 완충지대로 만들자고.”

콘라드는 석회석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 넣고는 마사에게 이야기했다.

“여기는 전달대라고 하지. 마사가 감자를 씻은 다음에 굳이 가져다줄 필요는 없어. 여기 전달대 위에 재료를 올려놓으면 주방장이 필요할 때 가져다가 쓰는 것으로 하자. 그러면 부딪힐 필요 없겠지. 자, 계속해서 연습하자.”

하인들은 잠시 멈춰있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콘라드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까와 같이 어정쩡하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개입해서 석회석 그림을 다시 그리는 걸 반복했다.

“여기 통로가 굉장히 좁게 느껴지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왔다 갔다 하는 통로인데. 조금 더 넓혀보자.”

하인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콘라드가 계속 수정하는 그림에 따라 몸이 맞춰지면서 동선이 점점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방장도 처음에는 콘라드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투덜거리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적극적으로 선을 수정해 가는 도련님의 모습을 보면서 표정이 변해갔다. 확실히 뭔가 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최경원은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겠다는 판단하에 연습 종료를 선언했다.

“좋아,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자. 하루 만에 되지는 않겠지. 일단 오늘 그린 이 그림대로 주방을 조금 고쳐보고 시작해 보자고. 큰 공사가 필요한 건 바로 못 하겠지만 간단한 부자재 옮기는 거 정도는 바로 가능할 거니까.”

하인들은 주방으로 돌아가서 마당에 있는 그림대로 위치들을 조금씩 변경한 뒤 다시 조리를 시작했다. 문의 크기를 넓히는 것은 바로 하기 어려웠지만 그 외의 자재들을 옮기는 것은 쉬웠다. 복도는 자재를 조금 움직이자 금세 확보됐다. 움직이기 어려운 화덕을 중심으로 배치를 바꾼 상황에서 하인들은 확실히 움직이기 편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방장도 주방에서 한동안 조리를 하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왜 되지? 사고가 안 일어났어? 벌써 다 만들었어?”

콘라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맥도날드를 만든 미국의 시스템은 헛되지 않았다. MBA 케이스 스터디 발표를 위해 밤늦게까지 자료를 조사하고 준비했던 그때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럼 나도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군.”

그날 저녁 이후 콘라드는 매일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아침과 점심은 각자 해결했지만 저녁만큼은 같이 먹는 분위기였다. 콘라드는 석회석 가루가 잔뜩 묻어 하얗게 변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깨끗이 씻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손을 씻고 하다 보니 서빙을 하는 시녀들과 거의 동시에 식당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콘라드가 들어가자 식당 안에는 이미 뷔르트 헨릭 남작과 엘레노어 부인, 그리고 에리히 헨릭이 앉아 있었다.

“어딜 다니다가 이제 오는 거냐! 시녀들과 같이 들어오다니. 네 이름을 깎는 짓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오히려 더 하는군. 반항하는 거야?”

“에리히, 동생에게 그게 무슨 말이니.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아이다. 조금 상냥하게 대해주렴.”

“……네, 어머니.”

“아닙니다, 어머님. 형님 말이 맞습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리히는 콘라드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가 엘레노어 부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콘라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헨릭 남작은 머리가 아픈 듯 식탁에 앉아서도 의자에 반쯤 기대앉아서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콘라드가 자리에 앉자마자 시녀들은 준비된 음식을 정신없이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속도에 놀란 것은 에리히였다.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음식이 빨리 나와?”

헨릭 남작은 앞에 있는 음식을 먹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음식이 상당히 맛있는데. 메뉴가 달라졌나? 아냐, 메뉴는 그대로군.”

“그…… 별일 아닙니다.”

“그런가?”

시녀가 콘라드의 눈치를 보며 말을 머뭇거리자 헨릭 남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금세 관심을 껐다. 최경원은 이야기를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시스템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나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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