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바다와 외눈박이 거인
태양이 사라진 지 20년. 지상은 거대한 수정 무덤이었다.
이중 에어록의 기압 조절 램프가 녹색으로 바뀌자, 육중한 티타늄 해치가 소리 없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영원한 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헬멧 내부 디스플레이에 외부 환경 데이터가 붉은 글씨로 떠올랐다.
[외부 온도: -210°C (질소 액화점 도달)]
[대기압: 0.0002 atm]
[생존 가능성: 장비 미착용 시 0%]
시온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뒤,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부츠는 땅에 닿지 않았다. 밑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전도 자기장이 얼어붙은 지표면과 서로를 밀어내며 그를 공중에 띄웠다. 지면과의 거리, 딱 1cm.
그 1cm의 간극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영하 210도의 지면은 닿는 즉시 열을 앗아가는 열역학적 블랙홀이었다. 아무리 강화된 슈트라도 전도열을 막을 수는 없기에, 땅을 밟는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혈액이 결정화되어 심장까지 멈추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츠의 초전도 코일이 웅웅거렸다. 지표면 아래에는 20년 전 인류가 엔진 유지보수를 위해 매설해 둔 자기장 유도 그리드가 깔려 있었다. 시온은 그 보이지 않는 레일 위를 1cm 뜬 채 미끄러지듯 유영했다. 마찰이 없는 세상에서의 이동은 걷는다기보다 흐르는 것에 가까웠다.
눈앞에는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질소의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태양이 사라진 후, 대기를 구성하던 공기는 액체가 되어 낮은 곳으로 흘러내렸고, 이내 유리처럼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시온은 고개를 숙여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질소 빙하 수백 미터 아래, 20년 전 멸망한 구시대의 마천루들이 박제된 곤충처럼 갇혀 있었다. 멈춰버린 자동차의 행렬, 주인을 잃은 신호등, 영원히 멈춘 시계탑.
그 모든 풍경이 시온의 시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압도적인 공포와 고독에 미쳐버렸겠지만, 시온은 무표정했다.
'데이터 수신 양호. 감정 수치 제어 중.'
그는 루미너스(Luminous)였다. 극한의 환경에서 작업하기 위해 유전자와 뇌를 개조한 신인류. 그의 뇌간에는 감각 제어 칩이 박혀 있었다. 이 칩은 공포, 고통, 추위와 같은 생존에 불필요한 신호를 강제로 차단하고 억제했다. 동료 루미너스들에게 이 풍경은 그저 'H2O와 N2가 고체화된 덩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달랐다.
[경고: 감정 억제 프로토콜 오류 발생. 대뇌 변연계 활성화.]
시야 한구석에 뜬 오류 메시지. 시온은 그것을 익숙하게 무시했다. 칩은 그의 공포를 지워주었지만, 그 빈자리에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슬픔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그는 헬멧 유리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지구가 더 외로워 보이네."
기계가 되다 만 아이. 그것이 시온이었다.
[치직... 시온, 들리나? 목표 지점까지 거리는?]
헬멧 스피커를 타고 한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3,000미터 벙커에 있는 유일한 '인간' 보호자. 그의 목소리에는 항상 쫓기는 듯한 불안이 섞여 있었다.
"현재 통신탑 하단 도착. 진입합니다."
시온은 고개를 들어 앙상하게 얼어붙은 철탑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대기의 산란이 사라진 우주는 별들이 쏟아질 듯 선명했지만, 그것은 낭만이 아닌 냉혹한 심연이었다.
시온은 자기부상 출력을 높여 철탑의 유지보수 라인을 따라 수직으로 상승했다. 50미터 상공. 발밑의 질소 호수가 거대한 거울처럼 별빛을 반사했다.
"박사님, 정말 아르고스(Argos)가 살아있을까요? 10년 동안 신호가 없었잖아요."
[아니, 살아있다. 녀석은 원자력 전지로 움직여. 수면 모드에 들어갔다가 무언가 강력한 신호를 감지하고 깨어난 게 분명해. 지금 벙커의 메인 수신기는 동결돼서 먹통이야. 네가 직접 유선으로 데이터를 따와야 해.]
시온은 통신 포트 앞에 멈춰 섰다. 포트 덮개는 두꺼운 성에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플라즈마 커터를 꺼냈다. 푸른 불꽃이 닿자 얼음이 순식간에 기화하며 성에가 가루처럼 흩어져 헬멧에 부딪혔다.
[조심해라. 포트가 부서지면 끝장이야.]
"알고 있어요. 오차 범위 0.1밀리미터 이내로 절삭 중."
칩이 손의 미세한 떨림을 완벽하게 보정했다. 시온은 드러난 접속 단자에 헬멧에서 뽑아낸 데이터 케이블을 꽂았다. '딸깍'. 진공 속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에 체결되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 순간, 시온의 시야가 번쩍였다.
[데이터 다운로드 개시... 15%... 68%... 100%.]
[이미지 처리 중.]
아르고스가 우주 궤도에서 보내온 고해상도 사진이 시온의 망막 디스플레이에 펼쳐졌다. 시온은 숨을 멈췄다.
"이게... 뭐죠?"
어둠뿐이어야 할 우주 공간에, 거대한 붉은 형체가 떠 있었다. 목성보다 거대하고 태양보다는 작은, 둔탁한 갈색의 구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갈색왜성. 표면에는 거대한 폭풍의 소용돌이가 붉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어둠 속에서 지구를 노려보는 외눈박이 거인의 눈동자 같았다.
[...이그니스(Ignis). 우리가 기다리던 불씨다.]
한 박사의 목소리가 전율로 떨렸다.
[저 거인이 우리를 삼키러 오고 있어. 아니, 우리가 저 거인의 품으로 뛰어들어야 해.]
시온은 붉은 대적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각 제어 칩이 '위협 대상'이라는 경고를 띄웠지만, 시온의 본능은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것은 포식자인가, 아니면 새로운 어머니인가.
벙커로 복귀한 시온은 작전 회의실의 무거운 공기를 마주했다. 홀로그램 테이블 위에는 이그니스와 지구의 궤도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구는 3일 뒤 이그니스의 중력권에 진입한다. 그대로 두면 지구는 이그니스와 충돌하거나, 중력에 찢겨져 우주 먼지가 될 운명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한 박사가 지표면 지도를 띄웠다. 적도 라인을 따라 붉은 점 12,000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프로젝트 헤파이스토스(Hephaestus). 지구 궤도 수정용 플라즈마 엔진이다. 이그니스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이 12,000개의 엔진을 동시에 점화해서 지구의 진행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래야 이그니스의 위성 궤도에 안착할 수 있어."
회의실 구석에 앉아있던 다른 루미너스, 카이가 건조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카이는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았다.
"이론상 불가능합니다. 저 엔진들은 20년 전 미완성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영하 210도의 환경에서 내구도가 30% 이하로 떨어졌을 겁니다. 점화 순간 폭발할 확률이 98%입니다."
카이의 분석은 냉정하고 정확했다. 루미너스의 칩은 거짓 희망을 품지 않으니까. 하지만 한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버틸 거다. 저건 기계가 깎은 쇳덩이가 아니야."
박사는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시온아, 너는 태어나기 전이라 모르겠구나. 20년 전, 태양이 꺼진다는 소식을 듣고 인류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뭔지 아니?"
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역사 데이터에는 '대혼란'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살고 싶어 했다. 70억 인구 중 20억은 굶어 죽고 얼어 죽었지. 하지만 남은 50억 명은... 포기하지 않았어. 그들은 기계가 멈춘 혹한 속에서 맨손으로 땅을 팠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얼어 터지면서도 지하 깊은 곳, 맨틀까지 굴뚝을 뚫었어."
박사는 홀로그램 속의 붉은 점들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저건 단순한 엔진이 아니야. 살아서 내일을 보고 싶어 했던 50억 명이 자신의 목숨을 갈아 넣어 만든 지열 굴뚝이다. 그들의 묘비가, 이제 우리를 우주로 쏘아 올릴 로켓이 되는 거야."
시온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칩이 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차가운 데이터로만 보였던 엔진들이 갑자기 거대한 비명과 염원을 품은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한 박사가 시온의 어깨를 잡았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위해 만든 길이야. 그 길은 절대 무너지지 않아."
시온은 다시 화면 속의 외눈박이 거인, 이그니스를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파멸처럼 보이는 붉은 눈. 그리고 그에 맞서 지구에 박혀 있는 12,000개의 묘비들.
[심박수 증가. 아드레날린 분비 감지.]
경고 메시지가 떴지만 시온은 무시했다. 그는 처음으로 칩의 판단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어야 해. 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내가 저 별과 지구를 이어야 해.'
침묵의 바다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거인의 입김이 지구의 멱살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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