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3)

현이이야기꾼·2026년 5월 13일 AM 04:37·7,580

 

그날은 콘라드, 아니 최경원에게 정신없는 하루였다.

“어머님…….”

가장 먼저 방문한 사람은 콘라드의 어머니였다. 아니, 콘라드는 서자였기에 엄밀히 말하면 친어머니는 아니다. 그렇지만 서자 출신인 자기를 홀대하지 않고 집에서 머물게 해 준,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분이었다. 이 시대에서 서자가 처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 축복 같은 일이었다.

“몸은 괜찮니, 콘라드?”

“네, 몸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니? 네 형이 또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어?”

헨릭 남작의 정실부인인 엘레노어 부인은 콘라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순간 엘레노어 부인과의 기억이 최경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역시나 그림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가짜가 아니었다. 가슴을 저미는 뭉클한 감정이 올랐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게 된 어머님에게 죄송한 마음까지. 콘라드가 엘레노어 부인에게 느꼈던 감정은, 친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과 동일했다.

최경원의 친모는 오래전 돌아가셨다. 유방암으로 오랜 기간 항암 치료를 하시다 결국 화장을 하게 됐을 때, 최경원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유일한 혈육마저 돌아가신 그 상황에서는 사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졌다.

‘어머니가 생각나네…….’

돌아가신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실까? 10년도 지난 일이라 이제는 무덤덤해 졌을 거라 생각했지만, 엘레노어 부인을 보자 그 감정이 뭉클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최경원은 이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콘라드의 기억 탓이라고 애써 선을 그었다. 최경원 자신은 낯선 외부인이었지만, 콘라드에게는 누구보다 친근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이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느낌.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결국 조심스럽게 손을 뺐다. 엘레노어 부인은 콘라드가 손을 빼자 흠칫 놀라며, 손이 빠져나가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머님.”

“네 형은 내가 잘 다독이마. 무엇이 널 그렇게 힘들게 했어? 자살을 시도하게 할 만큼?”

“그건……, 죄송합니다. 어머님.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게요.”

엘레노어 부인은 콘라드의 말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도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나한 테 이야기를 하지 않고 버텼지. 그렇게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지냈는데도…….”

잠시 뜸을 들인 엘레노어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를 닮아 너도 마음이 여리구나. 그래, 쉬어라. 그렇지 않아도 막 일어났으니 얼마나 몸이 힘들까. 그래도,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 주렴. 기다리고 있으마.”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그래. 콘라드, 불쌍한 것. 푹 쉬렴.”

엘레노어 부인은 마지막으로 콘라드를 꼭 안아주고 방 밖을 나갔다. 뭔가 모를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지만, 이 감정이 콘라드의 것인지 최경원의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뒤이어 들어온 사람은 콘라드의 형이었다. 콘라드의 이복형, 에리히는 들어오자마자 최경원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너 안 뒤졌었냐?”

“그게 무슨 말이야?”

“목을 매달려면 제대로 매달 것이지, 왜 꼴사납게 실패하고 지랄이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죽길 바랐어?”

“흥, 너 같은 것이 살아있으나 마나지. 어머니 덕분에 헨릭이라는 성을 붙이게 되었으면 쥐 죽은 듯이 살란 말이야. 천한 것.”

에리히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굉장히 복잡했다. ‘어쩔 수 없어’에 가까운 자포자기, 그러면서도 두려움, 공포. 한편으로는 경멸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항심도 있나? 날카롭게 쏘아대며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는 에리히를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에, 최경원은 잠시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왜? 죽다 살아나니 말도 잊어버렸나? 병신아.”

저런 말에 일일이 반응하기에는, 속에 있는 최경원은 30대 후반의 노련한 사회인이었다. 애써 끓어오르는 말을 참으며 콘라드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할 말 다 했어, 형?”

“흥. 재수 없는 것. 뒤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조용히 살아라. 관심 받고 싶은 거야, 뭐야?”

에리히는 문을 쾅 닫고 방을 나갔다.

최경원이 콘라드의 기억을 토대로 분석한 에리히는 자격지심 덩어리였다. 표면적으로 자신의 친엄마인 엘레노어 부인은 자신보다 콘라드를 더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서자에게 줄 수 없는 헨릭이라는 본 성(姓)까지 허락해 주었을까.

실상은 콘라드의 친어머니가 자신이 아끼는 시녀였고, 콘라드를 낳다 죽어버리자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을 돌 봐준 것이 더 크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에리히는 자신의 자리를 침범당한다고 느꼈는지 사사건건 콘라드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콘라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당하기만 할 뿐.

자살을 결심하게 한 콘라드의 복잡한 심정, 그중 7할은 에리히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아버지인 뷔르트 헨릭 남작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에리히가 영주를 물려받을 것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그러면 상황이 나아질까? 아니, 상황은 더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부인이 콘라드를 아끼는 덕에 헨릭 남작은 콘라드를 데면데면하게 대했지만, 에리히가 작위를 계승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더 기상천외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콘라드를 괴롭힐 것이 뻔하다.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자살에 대한 생각은, 결국 아버지인 헨릭 남작의 병환이 방아쇠가 되어 콘라드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도련님! 살아 계셨군요!”

형 에리히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사람은 한스 집사였다. 한스 집사는 문을 닫으며, 뭔가 아쉬운 듯 묘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는데, 생각보다 안색이 괜찮아 보이시네요!”

“한스 집사?”

“예, 접니다, 도련님. 마사가 호들갑을 얼마나 떨었는지……. 지하실에서 그렇게 발견된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장례 치를 뻔했지 뭡니까.”

콘라드의 기억에서 꺼낸 한스 집사는 좋은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헨릭 남작과의 오랜 인연으로 집사 역할을 맡아 충분히 일을 수행하고 있지만, 묘하게 자신에게는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깊게 남기고 있었다. 에리히 형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모습은 알고 있지만, 그래서인지 서자인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는 묘한 괴롭힘에 콘라드는 한스 집사를 거의 무시하면서 지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사사건건 부딪힌다. 결국 피하는 건 한스 집사가 아니라 콘라드였다,

‘그런 감정이었단 말이지…….’

최근 들어서는 수입이 악화되었다는 명분으로 많은 것들을 없애거나 축소하고 있었다. 사실상 성 재정의 거의 모든 것을 주무르는 것이 한스 집사다. 헨릭 남작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에서의 실세는 한스 집사였다. 콘라드는 한스 집사를 한번 시험해봐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한스 집사.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도련님.”

“마사가 말하기를 장작 때기를 줄이라고 했다더군.”

“요새 성의 재정이 워낙 어려워 긴축하라고 말은 해 두었습니다. 아, ‘긴축’이라는 단어를 혹시 모르시지는 않겠죠?”

한스 집사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스쳤다.

“긴축, 알고 있지. 그보다 마사가 가지고 온 수프가 너무 차가워서 그런데, 음식을 데우는 장작만큼은 허가해 줄 수 있을까?”

한스 집사는 콘라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이고 도련님. 거참 까다로우십니다. 지금 영지 재정이 말이 안 되게 어렵습니다. 밀가루 값이 올라도 너무 오르기도 했고, 수입 자체가 반으로 줄어들어서요. 겨울을 날 준비를 하려면 장작은 아껴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영지민들도 굶는 사람이 많은데 찬 수프 먹었다고 앓는 소리를 내십니까. 남작가의 사람이라면 모범을 보이셔야죠.”

“……내 형, 에리히의 방에도 식은 수프가 들어가나?”

“에리히 도련님은 가문을 이을 후계자이시지 않습니까? 건강이 무엇보다 최우선이죠. 밤 늦게까지 공부하시느라 기력이 딸리시면 안 되니 따뜻한 음식을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도련님은…….”

한스 집사는 대놓고 비꼬는 투로 말을 이었다.

“하루 종일 방에 누워만 계실 텐데 굳이 따뜻한 게 필요하십니까? 어차피 속으로 들어가면 다 따뜻해 집니다.”

“…….”

“규정은 규정인지라,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남작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창고 열쇠는 불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 남작님 건강이 좋지 않아 괜히 말을 꺼냈다가 불호령 내릴까 겁납니다요.”

“그렇군……. 알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아, 혹시 ‘분수에 맞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한스 집사는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최경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대로의 문답이 이어졌다. 분수에 맞는 도움? 방금 전의 대화를 복기해 봐도, 그전의 콘라드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결론은 하나다. 한스 집사는 콘라드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서자 출신인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로는 당연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가주님이 쓰러지면 형이 작위를 물려받으니 줄을 서는 건가?’

속에 있는 최경원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집사가 서자인 자신을 잘 대해줄 리 만무하다. 지금이야 엘레노어 부인의 눈치를 봐서 움직이지만, 형이 남작 작위를 승계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 같다.

헨릭 남작은 예상대로 방을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콘라드, 아니 최경원도 굳이 그를 찾지는 않았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이 실감은 나고 있으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서자 출신인 콘라드의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다음 날이 되자 마사가 가장 먼저 콘라드를 찾아왔다.

“도련님, 몸은 좀 어떠세요?”

“생각보다 괜찮아. 마사, 넌 할 일 없니?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아.”

“어머, 도련님도 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짬짬이 찾아오는 거죠.”

마사는 베시시 웃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콘라드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팔다리를 주물주물 안마하기 시작했다.

“사흘 내내 누워 계셨으니 이렇게라도 안마를 해줘야 빨리 낫죠. 어때요? 시원하죠?”

“응, 시원해. 고마워, 금방 일어나겠네.”

“뭘요, 도련님! 빨리 건강 해지셔야 하늘에 계신 도련님 어머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래, 고마워. ……지하실에서 날 발견한 것도 마사였다고 들었는데.”

“아이고, 도련님.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위험했다고요. 까딱 잘못했으면 진짜로……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최경원은 문득 의아 해졌다. 어제 한스 집사가 보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멸과 적대감이 콘라드를 향한 이 성의 기본적인 정서일 터였다. 그런데 마사만은 달랐다. 아무리 젊게 봐줘도 30대 이상으로 보이는 마사의 얼굴은 나이를 잊게 만드는 천진난만함도 있었지만, 콘라드가 마사를 향해 느끼는 감정은 확실히 호의 이상이다.

‘아마도 마사도 콘라드에게 호의 이상을 느끼고 있겠지.’

최경원은 그렇게 짐작하며 콘라드의 입을 빌려 물었다.

“마사, 나에게 왜 잘해주는 거야?”

“네에? 무슨 말씀이셔요, 도련님. 도련님이니까 당연히 잘해 드리죠.”

“난 서자잖아. 에리히 형에게 잘 보여야 너도 이 성에서 잘 살아갈 텐데. 난 아무런 힘이 없어.”

마사는 안마를 하던 손을 멈추고는 콘라드를 빤히 쳐다봤다. 마사의 표정은 누가 봐도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 마사가 언성을 높였다.

“도련님! 그런 말은 하지도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건 도련님을 낳아 주신 분에게도 실례예요!”

“마사가 우리 엄마랑 같이 이 성에 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도련님의 어머니인 한나는 참 착한 분이었어요. 저야 잘 모르지만 서도, 남작 부인께서 아끼신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도련님은 한나를 많이 닮으셨어요. 누구든지 사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수없이 이야기해 드렸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여튼, 도련님. 건강만 회복하세요. 살아만 계시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인생이에요. 한나도 그렇게 바랄 거고요.”

“그래, 알았어.”

콘라드의 답변을 들은 마사는 다시 몸을 열심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온몸의 감각이 따끔하게 아파오면서 최경원은 다시금 자신이 콘라드의 몸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제 바깥 풍경을 본 다음에 확신했다고 느꼈지만, 하룻밤을 더 보내고 마사의 손길을 받으니 더 절실하게 와닿았다.

“마사, 가주님은?”

“아마도…… 침실에 계실 거예요.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신 지 통 나오질 않으셔서…….”

“그래? 그러면 점심 전에 방문하겠다고 좀 전해 줄래?”

“걸어 다닐 수 있겠어요?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어제 방안을 좀 걸어봤는데 다닐 만했어. 일어났으니 가주님께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어?”

“알겠어요. 한스 집사님에게 이야기해 둘게요!”

그러고 마사는 한참을 마사지하다가 청소하러 가야 한다며 방을 나섰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한스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콘라드 도련님?”

“한스 집사?”

“남작님 뵈러 가신다고요?”

“아, 지금 시간 되시나? 한번 가볼까 하는데.”

“마침 남작님께서도 시간 괜찮다고 하셔서요. 따라오실까요?”

콘라드는 한스 집사를 따라 방을 나섰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방 밖을 나가는지라 최경원은 바짝 긴장했다. 방 밖을 나가자, 마치 그림책을 읽는 것처럼 성 안의 지리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한스 집사는 별말 없이 콘라드를 방으로 안내했다.

“들어오게.”

한스 집사가 서재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는 문을 열고는 콘라드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콘라드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서재라고는 하지만 대단하지는 않았다. 양피지로 된 서류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고, 잉크통에 꽂힌 깃펜 한 자루가 놓여 있을 뿐이다. 헨릭 남작은 서재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콘라드를 맞이했다.

“어서 와라, 콘라드. 몸은 어떤가?”

“가주님의 관심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송구합니다, 가주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가주님 명예에 괜한 누를 끼친 게 아닌지 송구스럽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처럼 말이 오갔고, 남작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에리히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형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섣불리 행동하지 마라, 콘라드. 엘레노어의 떼를 받아준 거긴 하지만 엄연히 너도 헨릭의 성(姓)을 가졌다. 가볍게 행동하는 것은 용서 못 해.”

그리고 헨릭 남작은 쿨럭, 하고 기침을 했다. 가슴에 통증이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에리히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해 두마. 가서 근신해라. 몸이 괜찮다면 저녁부터는 가족 식사에 참여하도록 하고.”

“네, 가주님.”

헨릭 남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콘라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왔다. 방 밖에서는 한스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콘라드가 나오자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남작님과 무슨 대화를 하셨습니까?”

“별 대화를 나누진 않았어. 그냥 안부 인사 드린 거야. 몸이 조금은 나아졌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도련님도 어서 방으로 들어가 쉬시죠. 설마 길을 못 찾진 않으시겠죠?”

콘라드가 어깨를 으쓱이자 한스 집사는 대꾸 없이 후다닥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급할 건 없었다. 최경원은 우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보자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은, 생각이 정리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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