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지 못한 글을 끝내는 법(2)
내 폴더에는 끝내지 못한 글이 30개쯤 있다.

거짓말은 아니다. 메모장에 쓰다 만 첫 문단, 노션에 제목만 적어둔 글감, 한글 파일에 4페이지쯤 쓰다가 "이건 좀 더 무르익으면 쓰자" 하고 닫아둔 초고. 이런 글들 까지 쌓인다면 그 숫자는 아마도 더 늘어날 것이다. 단순히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글의 갯수만 그렇다. 그렇게 글들이 쌓인다. 다음 달에도 쌓일 거다. 내년에도.
문제는 내가 그 글들을 정말 끝낼 생각이 있냐는 거다.
"예술은 끝내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보통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다 빈치의 노트에 그대로 적힌 문장은 없다고 한다. 더 정확한 원조는 시인 폴 발레리의 "시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다만 버려질 뿐이다"라는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출처는 둘째치고 — 나는 이 말이 어떤 식으로 위로가 되면서 동시에 함정이 되는지 알겠다.
위로가 되는 부분은 이렇다. 글이 완벽하지 않아도 끝낼 수 있다. 끝내는 건 완성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건 좋은 말이다. 진심으로 좋은 말이다.
함정이 되는 부분은 이렇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끝내지 못한 글들을 더 안 끝내게 됐다. 어차피 완성은 없으니까. 어차피 떠나보내는 거니까.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다는 핑계가 너무 우아하게 정당화됐다.
끝맺음에는 세 종류가 있다
요즘 나는 끝맺음을 이렇게 분류한다.
닫힌 결말 — 모든 게 정리되고 결론이 내려진 끝. 우리가 보통 "완성됐다"고 부르는 끝. 가장 어렵고, 가장 드물다.
열린 결말 — 결론을 내리지 않고 독자에게 넘기는 끝. 의도된 미완. 잘 쓰면 닫힌 결말보다 더 강력하다.
그냥 멈춤 — 작가가 그만두기로 결정한 끝. 완성도와 무관하게, 여기까지 쓴 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전부라는 선언. 가장 정직한 끝이기도 하다.
내가 30개의 미완성 글을 못 끝냈던 이유는, 세 번째 끝맺음을 끝맺음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닫힌 결말이나 열린 결말 같은 그럴듯한 끝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는 건 패배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냥 멈추는 것도 끝맺음이다. 그것도 완전히 정당한 끝맺음이다.
내가 쓰는 세 가지 방법
1. 끝맺음 문장을 먼저 써둔다
글을 시작할 때 마지막 문장을 미리 적어둔다. 지금 내가 이 글을 통해 도달하고 싶은 한 문장. 본문이 진행되면서 그 문장이 바뀔 수도 있고, 그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어딘가 닿을 곳이 있다는 감각이다.
목적지가 정해진 글은 끝난다. 목적지 없이 시작한 글은 그냥 어딘가에서 멈춰버린다. 그리고 그 멈춤은 그냥 멈춤이 아니라 길을 잃은 멈춤이 된다. 둘은 다르다.
2. 분량 상한을 정한다
"이 글은 1500자 안에 끝낸다" 같은 식으로 미리 정한다. 분량 상한이 있으면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줄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후자가 훨씬 빨리 끝난다.
분량은 글의 친구다. 무한한 분량이 주어지면 글은 끝나지 않는다. 한정된 분량이 주어지면 글은 그 안에서 마무리되려고 한다. 글에는 그런 자기 보존 본능이 있다.
3. 마감을 정한다, 진짜로
가장 강력한 방법인데 가장 안 쓴다. 일요일 밤 12시까지 끝낸다. 정하면 끝난다. 안 정하면 안 끝난다. 이건 거의 자연법칙이다.
마감은 외부에서 주어질 때 가장 잘 듣는데, 그게 없을 땐 스스로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글터 같은 공간에 "다음 주에 2편으로 돌아온다"고 적어두는 식의 자기 구속을 자주 쓴다. 누군가 읽고 있을 거라는 가벼운 압박은 내 안의 미루기 습관보다 약간 더 세다. 약간이면 충분하다.
끝나지 않은 글에 대해서
그럼 30개의 미완성 글들은 어떡할까. 솔직히 — 대부분은 안 끝낼 거다. 그 글들도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이 오히려 지금 쓰고 있는 글을 방해해서, 가끔 폴더를 통째로 비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끝내지 못한 글이 87개 있다는 건, 시작한 글이 87개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작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낫다. 시작한 사람만이 끝낼 기회도 가진다.
그러니까 끝내지 못한 글이 있어도 괜찮다. 다만 지금 쓰고 있는 글 하나는 끝내자. 닫힌 결말이든, 열린 결말이든, 그냥 멈춤이든. 어떤 식으로든.
그게 30개를 31개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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