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2)

현이이야기꾼·2026년 5월 12일 AM 05:03·3,814

 

“헉!”

최경원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털썩 드러누웠다.

“추, 추워!”

일어나자마자 느낀 첫 감각이었다.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때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에어컨을 켜고 잠들었나?’

첫 번째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최경원은 눈앞에 펼쳐진 환경이 굉장히 이질적이고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천장이 나무였다.

‘나무?’

21세기 대한민국 아파트에서 나무로 된 천장을 보기는 쉽지 않을 터다. 다시 벌떡 일어선 최경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게 낯선 환경이다. 자기 몸을 덮고 있는 침대 시트부터, 방안을 구성하는 가구들까지.

“여긴, 어디지?”

분명 기억으로는 노조와의 회의록 갈무리를 마무리한 참이었는데…….

“억!”

갑자기 최경원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경험하지도 않은,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댐이 무너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지 않을 수 없었다. 멍하니 있자니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끼익.

“콘라드 도련님!”

아득한 정신 밖에서 누군가 자기를 흔드는 것을 느낀 최경원은 멍한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내가, 콘라드?”

“그럼요! 도련님이 도련님 말고 누가 있겠어요? 아이고! 멀쩡하시네요! 다행입니다!”

최경원은 순간, 눈앞의 사람을 처음 봤지만 이미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사?”

“아이고! 제 이름도 기억해 주시네요. 맞아요, 저 마사예요. 정신 좀 드세요?”

“여긴 어디지?”

“어디긴요! 도련님 방이죠. 세상에, 왜 그런 짓을 하셨어요!”

마사와 있었던 기억이 순식간에 번뜩하고 지나갔다. 최경원으로서의 기억이 선명한 가운데, 콘라드의 기억은 마치 그림책을 읽는 듯한 느낌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사에 대한 뭉클한 감정이 떠올랐다. 고맙고도 반갑고, 또 미안한 느낌.

‘뭐지, 이 감정은?’

40년 가까이 살면서 잊고 있었을지도 모를 복잡 미묘하지만 따뜻하고 뭉클한 감정에 최경원은 혼란스러웠다.

‘콘라드가 알고 있는 감정이야? 아니면 내가 지금 새롭게 느끼는 감정이야?’

최경원은 우선 마사를 보면서 콘라드의 기억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도 40년 가까이 산 연륜도 있었지만 10년 넘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사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힌 처세술 덕분일 것이다.

마사는 최경원, 아니 콘라드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도련님, 앞으론 절대 그러지 마세요! 난리가 났어요, 난리가! 특히 남작 어른께서 얼마나 노발대발하시던지……. 에휴,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아, 물 좀 주겠어? 마……사?”

“제 정신 좀 봐! 목은 어떠세요? 물은 마실 수 있겠어요?”

마사의 말에 콘라드는 목을 어루만졌다.

‘그래, 콘라드의 마지막 기억은 자살이었지. 목을 매달았고……,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나 보네.’

왜 실패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의식을 잃고 난 뒤에 실패한 모양이다.

“일단 목이 너무 말라. 물 좀 줘, 마사.”

“네, 도련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사는 말을 마치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최경원은 잠시 방에 혼자 남은 틈을 타서 기억을 정리했다. 분명 자신은 21세기 거신건설의 인사기획팀장 최경원이다. 그런데 동시에 아베르니아 왕국의 뷔르트 헨릭 남작의 서자인 콘라드 헨릭이기도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환경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백하게 후자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장소를 드라마나 영화 소품 말고는 찾기 어렵다.

‘여기 설마 영화 세트장인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콘라드의 기억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을 갑자기 그런 세트장에 갖다 놓을 이유도 없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져 봤지만 잘 모르겠다. 30대 후반 아저씨로 늙어가는 흔적이 보이던 손과 다르게 20대의 탄력 있는 피부가 느껴진다. 이미 지나갔다고 느꼈던 젊음이 다시 찾아온 것인가? 기분이 무척 이상하다.

“그렇네……. 나는 여기서는 콘라드인가.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나는 결국 죽은 건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최경원은 여기서 콘라드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자신은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죽었다고 봐야 정상일 것 같다.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하던 일을 마무리 못 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것뿐. 결혼을 한 것도 아니어서 한국에 별다른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련님! 물 가져왔어요!”

마사가 때마침 들어왔다. 콘라드는 마사가 준 물을 받고는 꿀떡꿀떡 마셨다. 목이 아리고 시큰거리긴 했지만 물을 못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물 맛에 정신이 좀 개운해졌다.

“마사,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발견하고 침대에 눕히신 지 3일이 됐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못 드셨죠? 수프라도 드릴까요?”

“아……, 응. 그래주면 좋겠어.”

“잠시만요, 도련님!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아침을 준비하고 남은 수프가 아마도 있을 거예요!”

마사는 다시 활기차게 나가더니 금세 돌아왔다. 마사가 들고 온 쟁반에는 단출한 그릇과 빵이 놓여 있었다. 마사는 테이블을 침대 옆으로 끌고 와서 숟가락으로 수프를 뜬 뒤 콘라드에게 내밀었다.

“내, 내가 먹을게.”

“에고고! 줄 때 마다하지 마세요! 도련님도 참. 이제 막 깨어나셨으니까 한 끼 정도는 괜찮잖아요.”

 “아냐. 내가 먹을게.”

마사는 이런 성격이라는 것이 기억에 떠올랐다. 뭐든 적극적이고 열심히는 했지만 요령은 별로 없었다. 마사는 콘라드의 계속되는 말에 숟가락을 결국 건네주었다.

“윽, 차가워. 좀 데워 줄 수 없어?”

콘라드는 수프를 먹다 말고 이야기했다.

“그게, 한스 집사님이 장작을 아끼라고 하셔서요.”

“한스가? 그 정도로 어려워졌어?”

“저야 모르죠. 그냥 한스 집사님이 밤에 잘 때 외에는 이제 장작불을 아끼라고…….”

콘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수프를 떠서 먹었다. 옆에 빵이 있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윽, 딱딱해.”

“빵은 그것 뿐이네요. 요새 들어오는 빵들이 굉장히 부실해졌어요.”

“별수 없네…….”

콘라드는 빵을 수프에 찍어서 천천히 적신 다음 입안에서 굴리면서 먹었다. 이 정도로 어려웠나? 기억 속 영지는 엄청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못살지는 않았는데.

마사는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콘라드를 보면서 3일 동안 있었던 일을 모조리 말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스 집사님이 원래부터 짠돌이 기질이 있는 건 알았지만, 갑자기 이틀 전부터 더 짠돌이가 되어 버렸어요. 그 뭐라더라…… 기, 기추?”

“긴축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역시 도련님이네요! 한스 집사님이 어려운 용어를 뭐라 뭐라 말하면서 재정을 아껴야 한다고 말한 거거든요.”

“재정을? 갑자기?”

“그러게 말이에요. 저 같은 말단이 뭘 알겠어요.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죠. 그래서 장작도 취침 시간에만, 그것도 잠깐만 쓰도록 했어요. 음식을 할 때도 최소한으로! 빵도 어제부터 안 좋아졌고요. 집사님이 하신 거니 남작님이 하셨겠 거니 하고 넘어가는 거죠, 뭐.”

“그렇구나……. 그런데 마사, 이렇게 내 방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만요……! 도련님 일어나셨으니 가봐야겠네요. 남작님이랑, 마님이랑, 집사님에게도 이야기해야 하고.”

“그래, 어서 가봐.”

“그럼 가볼 게요! 도련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남은 빵조각을 마저 삼킨 콘라드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나무 판자로 덧대어진 창문을 힘겹게 열었다.

끼익.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진 풍경. 높은 성벽, 중세 양식의 건물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낯선 깃발들.

최경원은, 아니 콘라드는 현기증을 느끼며 창틀을 꽉 움켜쥐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아베르니아 왕국이구나.”

 

이 글에 대해 합평을 남기시겠어요?

합평은 본문 옆에 댓글이 아니라, 광장의 합평방에 별도의 글로 올라갑니다. 작가에게 알림이 가요.

합평 작성하기 →

댓글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