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4)
며칠이 지났다.
최경원은 그동안 천천히 성안을 둘러보며 콘라드의 기억을 갈무리했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쌓여 있는 콘라드의 기억을 단 며칠 사이에 최경원이 온전히 흡수하는 것은 무리였다. 가끔은 한국에서의 기억과 뒤섞여 엉망진창인 상태로 배회할 때도 있었다.
“메릴다, 안녕. 청소하고 있어?”
“아, 도련님. 안녕하세요? 건강은 괜찮으세요?”
“많이 좋아졌어.”
하인들과 만나면 으레 이런 식으로 인사를 건네곤 했다. 인사팀은 인사를 잘해서 인사팀이라는 말도 있었다. 사회 초년생 때 쑥스러운 마음에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선배들에게 호되게 혼난 기억도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하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어. ……그때 나를 가장 많이 혼냈던 게 조웅철 상무님이었는데.’
한국에서의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당시 인사팀장님이었던 조웅철 상무님은 훗날 CHRO가 되어 자신에게 구조조정 미션을 던져줬었다.
최경원은 며칠 동안 그렇게 한국에서의 기억과 콘라드의 기억을 오가며 나름의 싱크를 맞추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콘라드가 마치 진짜 자신인 양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하지 않겠어?’
최경원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해도 살아가기 어려운 게 삶이다. 굳이 부정적으로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마음먹자 이곳 성안의 삶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콘라드의 방은 성 3층에 위치해 있었다. 서자이긴 해도 귀족의 아들 대접인지는 모르겠으나 방 안에 작은 창문도 나 있었다. 비록 돌벽에 구멍을 작게 뚫어놓고 널빤지로 대충 가린 모양새긴 했으나, 어쨌든 여닫이 기능은 작동했다. 최소한 비가 들이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그 아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참 많은 하인이 수도 없이 바쁘게 오갔다. 이 조그마한 성에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쉼 없이 돌아다녔다. 마당 한 켠으로는 마구간 구석이 보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방의 화덕에서 나오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경이 펼쳐진다.
“저게 흑참나무 숲인가?”
콘라드의 기억 속에 헨릭 영지는 흑참나무를 특산품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한 땅이지만, 흑참나무만으로 영지의 재정이 어느 정도 꾸려질 정도는 됐다. 돌을 가공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대부분의 건축은 나무를 활용한다. 내구성이 중요하므로 참나무 계열이 많이 사용되는데, 헨릭 영지의 흑참나무는 유난히 검고 단단하다. 즉, 건축하는 데 있어 인기가 높은 소재였다. 배를 만들 때는 용골과 같이 단단한 부분에 헨릭 영지의 흑참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왜 수입이 줄었을까?”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최경원은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서 흑참나무 숲을 응시했다. 흑참나무와 같은 재료는 경기와 상관없이 일정하게 수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헨릭 영지의 흑참나무가 특산품인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그 퀄리티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수가 줄다니?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일단 생각하지 말자. 내 일도 아닌데, 뭐.”
최경원은 애써 그 의구심을 지웠다. 헨릭 남작의 성은 높은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라드의 방은 3층. 어지간한 시야는 다 확보가 됐다. 다만, 성벽 너머에 있는 영지민들의 거주 공간은 성벽에 가려져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에 한번 구경이나 가봐야겠다.”
콘라드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볼 생각을 하자 괜히 들떴다.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를 것이다. 한국에서의 삶과 비교하며 우울해했던 감정은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이제는 아침의 추위가 제법 익숙해졌다. 일어날 때 오들오들 떨면서 일어나는 것도,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며 잠을 깨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안녕, 프릴. 오늘은 프릴이 청소하네? 어제는 마사였던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도련님.”
“청소하는 데 불편함은 없어?”
“…….”
프릴은 콘라드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쌩하고 지나가 버렸다. 콘라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멀어져 가는 프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콘라드는 시간 날 때마다 인사를 하고 있지만, 개중에는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아예 받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성 안에서 콘라드의 지위는 서자다. 그것도, 승계가 가장 유력한 에리히가 미워하고 있는 서자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괜히 기분이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우연히 지나가던 마사가 콘라드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이렇게 축 처져 계세요? 혹시 아직도 몸이 안 좋으신 건…….”
“아, 마사. 안녕. 그런 건 아냐.”
“그럼 누가 또 괴롭혔나요!”
“아냐, 마사.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프릴을 보고 상처받아 잠시 가라앉아있던 콘라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마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라도 간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사실, 이 성의 대부분 사람이 콘라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도련님! 도련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서자이긴 하지만, 엄연한 귀족이에요. 우리는 꿈도 못 꾸는 헨릭이라는 성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어머님이 남작님께 허락을 구해서 겨우 얻은 거라고 들었어. 내가 잘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뭐.”
“도련님! 세상 모든 아이들이 잘해서 이름을 얻는 건 아니에요. 태어나면 당연히 얻는 게 이름이라구요. 비록 도련님은…… 그, 에리히 도련님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지만 뭐 어때요? 마님이 도련님을 지지하고 계시잖아요!”
“그래, 맞아. 그건 마사 말이 맞는 것 같아. 괜히 의기소침해 할 필요 없지.”
최경원은 마사의 따뜻한 말에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에 갑자기 떨어져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처음에는 꽤 컸지만, 마사의 이런 한결같은 위로는 큰 도움이 되었다.
“도련님! 기운 내세요. 뭐, 이런 말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아요? 저나 남작 마나님이 계시니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좋았어, 마사. 덕분에 힘이 많이 났네.”
마사는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이동했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정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뭔가 위화감이 있는데…….”
난데없이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인사 담당자로서의 촉이라고 할까, 최경원으로서의 감이라고 할까. 콘라드의 기억은 평소의 성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있기에, 이 느낌은 콘라드가 아닌 최경원의 기억과 경험에서 발생한 경고음이었다.
최경원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뭔가 잡생각이 들 때는 생각을 비워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이곳에서는 훌륭한 대안이 있다. 바로 창문으로 바깥 구경하기.
콘라드의 방에서 보는 바깥은 정말 기가 막히게도 가슴을 뻥 뚫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진정한 하늘색이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하늘과, 초록과 검정이 어우러져 들판에 펼쳐져 있는 흑참나무 숲까지. 그리고 멀리서 아스라히 들리는 영지민들의 작은 소란까지. 콘라드는 창문에 턱을 괴고 앉아서 바깥을 내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내려 마당을 바라봤다.
마당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한쪽에서는 닭을 잡느라 뛰어다니고, 바로 옆에서는 장작을 패고 있었다. 도끼질하는 사람 옆으로 달걀 바구니를 든 하인이 위태롭게 지나갔다. 동선이 엉망이라 서로 부딪히기 일쑤였고, 누가 무슨 일을 담당하는지조차 불분명해 보였다. 많아 봤자 십수 명. 잠깐 지켜보는데도 같은 사람이 다른 일을 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같은 일을 하려다 엉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잠깐 마찰이 일어나서 중단됐다가 합의가 되고 다시 일이 재개된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정신없는 마당의 풍경이었지만, 순간 최경원은 깨달았다.
‘청소하는 인원이 매일 수시로 바뀌고 있었어.’
마당의 풍경은 늘 소란스러웠지만 행위의 주체는 뒤죽박죽이었다. 톰은 마구간에 있어야 할 터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장작을 쪼갤 준비를 하고 있다. 마샬은 어제는 빗질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물을 긷고 있었다. 딱히 할 거 없는 이세계 생활에서 최경원의 취미가 '창밖 구경'이었기에 발견할 수 있는 모순이었다.
‘성에서 가장 바쁜 곳이 어디일까? 바로 주방!’
최경원은 방을 나와 본능적으로 성 안의 심장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 하루 종일 제일 바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최경원은 주저 없이 주방이라고 답을 내렸다. 군 시절 조리병으로 파견되어 복무하며 뼈저리게 체감했던 사실이다.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는 곳이 주방이었다. 아침이 끝나면 쉴 틈도 없이 점심, 점심이 끝나면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해군이었던 최경원은 배가 항해라도 나갈라치면 저녁 이후 야식까지 준비해야 했다.
마음속에 들어온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에효, 이것도 직업병이다.”
최경원은 주방으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인사 담당자로 오래 일하다 보니 R&R 없이 마구잡이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고문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직무분석과 그에 따른 배치가 우선이었다. 그렇게 해야 다음 순서가 진행이 되었더.
‘그런데 내가 가서 그 R&R을 정리할 수 있을까?’
콘라드는 이곳에서 아무 권위도 권한도 없다. 머릿속에 고민이 떠올랐지만, 걱정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단 가보고 생각하지 뭐.’
예상대로 주방은 아수라장이었다.
“비켜! 뜨거운 물 지나가!”
“야! 닭 잡아오라니까 왜 빈손이야!”
고함과 욕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귀를 때렸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난장판 한복판에서 앞치마를 두른 마사가 어느새 주방에 들어와 땀을 뻘뻘 흘리며 감자를 깎고 있었다.
“마사?”
“어? 도, 도련님! 여긴 웬일이세요? 평생 부엌 근처엔 오지도 않으시더니…….”
“그냥, 좀 둘러보려고. 그런데 마사, 네가 왜 여기서 요리를 하고 있어? 원래 주방 담당이야?”
마사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담당이 어디 있어요. 그냥 바쁘면 와서 돕는 거죠. 닭 잡을 사람 없으면 제가 잡고, 설거지 밀리면 또 제가 하고…….”
“……일단 하던 거 마저 해. 잠깐만 지켜볼게.”
마사가 다시 전쟁터로 뛰어들자, 콘라드는 주방 구석에 서서 매의 눈으로 현장을 스캔했다.
잠깐 살펴봤지만 엉망진창에 총체적 난국이었다. 창고와 연결된 뒷문에서는 생닭이 들어오고 있는데 바로 옆 도마에서는 야채를 썰고 있었다. 닭털과 핏물이 야채로 튀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물로 몇 번 툭툭 털어버리고 만다.
설거지통에는 헹굼 물과 비눗물이 섞여 회색빛 구정물이 되어 있는데, 아직도 닦지 못한 식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헹굼 물을 새로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물을 길어오는 게 오래 걸리는지, 아니면 위생 관념이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바빠서 그런 건지, 그 더러운 물에서 식기를 대충 헹궈 음식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악으로 느껴지는 건 동선이었다. 출입구는 창고 쪽 뒷문과 홀 쪽 정문 딱 두 개였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두 군데의 출입구에서 뒤섞여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요리 나가는 사람, 물 긷는 사람, 재료 가지고 오는 사람,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간혹가다가 부딪히면 음식이나 재료가 쏟아지고, 그렇게 시간과 재료가 낭비된다. 사람들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모두가 같은 일을 하고 있거나, 뜬금없이 다른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야……. 엉망진창이잖아. 이게 요리하는 주방 맞아?’
최경원이 주방을 처음 보고 든 생각은 '개판 5분 전'. 순간적으로 자기가 이 시대로 온 것이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런 난장판을 보면서 최경원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자기 안에 있는 콘라드가 외쳐주는 것 같았다. ‘바로 잡아 줘!’
깊은 숨을 들이쉰 최경원은, 아니 콘라드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대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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