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함을 피하는 한 가지 질문(3)
가슴이 미어졌다.
이 문장이 왜 진부한가, 라고 누가 물으면 나는 잠깐 망설일 것 같다. 뜻이 안 통하는 건 아니다. 문법도 멀쩡하다. 한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무슨 감정인지 안다. 그런데도 진부하다. 왜일까.
오웰이 1946년에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인쇄물에서 흔히 봤던 은유, 직유, 그밖의 비유 표현은 절대 쓰지 말라."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라는 에세이의 첫 번째 규칙이다. 70년이 넘은 조언인데, 이게 진부함의 정체를 거의 다 설명한다. 진부함은 틀린 표현이 아니다. 남이 먼저 써서 닳은 표현이다.
이 글은 그 이야기다. 닳은 표현을 알아차리는 법, 그리고 — 알아차렸으면서도 가끔은 그냥 쓰는 이유에 대한 노트.
진부함은 익숙함을 깊이로 착각하는 것이다
가슴이 미어졌다가 진부한 이유는, 그게 내 표현이 아니라 어디서 읽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느낀 다음에 그 슬픔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직접 들여다보지 않고,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된 슬픔 카탈로그에서 가장 가까운 표현을 꺼내 쓴 거다.
문제는 이게 너무 익숙해서 깊은 표현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 있다. 닳은 표현은 부드럽다. 입에 잘 붙는다. 이게 그 감정의 정확한 표현이지라는 착각을 준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 슬플 때 정말 가슴이 미어지나. 미어진다는 게 정확히 어떤 감각인가. 나는 모른다. 한 번도 그 감각을 직접 묘사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냥 슬프다고 쓰기엔 너무 평범해서, 가슴이 미어졌다고 쓴 거다. 슬픔의 대용 표현이지, 슬픔 그 자체가 아니다.
진부함을 잡아내는 한 가지 질문
내가 글을 쓰다가 멈춰서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이 문장을 내가 처음 쓰는가, 어디서 읽은 걸 옮기는가."
이 질문이 통과되면 다음 문장으로 간다. 통과되지 않으면 — 지운다. 그리고 다시 쓴다.
이게 작동하는 이유는, 진부한 표현은 거의 항상 어딘가에서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말문이 막혔다, 온몸이 떨렸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런 문장들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어딘가의 소설에서, 드라마 대사에서, 옛날에 본 만화에서 — 옮겨온 거다.
내가 직접 본 적 없는 감각을, 내가 직접 만들지 않은 표현으로 쓰면 글은 남의 글의 메아리가 된다.
진부함을 피하는 두 가지 도구
1. 구체화 — 추상을 감각으로 바꾸기
가슴이 미어졌다는 추상이다. 이걸 구체적인 감각으로 바꿔본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들이마신 숨을 한참 못 내쉬었다. 그 말을 듣고 입안에서 침이 안 삼켜졌다. 그 말을 듣고 손에 들고 있던 컵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세 문장 다 가슴이 미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슬프다. 추상적 감정 단어 대신 구체적인 신체 감각을 적었기 때문이다.
이게 Show, don't tell이라는 영문 글쓰기 격언의 핵심이기도 하다. 감정을 말하지 말고, 그 감정이 만든 장면을 보여주라는 것. 닳은 표현을 피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2. 빼기 — 감정 단어를 통째로 지우기
더 과감한 방법이 있다.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를 글에서 다 빼버린다.
슬프다, 기쁘다, 화나다, 무섭다, 그립다. 이 단어들이 본문에 등장하지 않게 한다. 대신 그 감정이 발생한 장면만 남긴다. 독자가 그 감정의 이름을 직접 알아맞히게 한다.
이게 잘되면 글은 묘하게 강해진다. 슬프다고 쓰지 않은 글이 가장 슬프게 읽힐 때가 있다. 독자가 직접 도달한 감정은, 글이 떠먹여준 감정보다 훨씬 깊이 박힌다.
그런데 — 진부해도 괜찮은 순간이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좀 미안해진다. 이 글을 읽고 내일부터 가슴이 미어졌다를 못 쓰게 되면, 그건 내 의도가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 나쁜 게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 내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쓰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알면서 쓰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일기에는 가슴이 미어졌다고 쓰자. 친구에게 보내는 카톡에서도 그래도 된다. 사적인 메모, 즉흥적인 글, 빨리 써야 하는 글 — 이런 글에서 진부함을 피하느라 멈추는 건 손해다.
진부함을 의식해야 하는 건 내가 정성을 들여 쓰는 글에 한해서다. 어떤 표현으로 이 감정을 가장 정확히 담을 수 있을지 고민할 시간이 있는 글. 그런 글에서는 익숙한 표현이 입에 붙는 순간이 위험 신호다. 그때 멈추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 이걸 내가 처음 쓰는가, 어디서 읽은 걸 옮기는가.
질문이 답을 만든다. 닳은 표현 대신 내가 만든 표현이 들어오는 자리가 그렇게 생긴다.
그래도 가슴이 미어졌다가 떠오르면
그건 내가 그 감정을 아직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신호다. 닳은 표현이 떠오른다는 건, 내가 그 감정을 내 것으로 소화하지 않고 그냥 남이 쓴 모양 그대로 받았다는 뜻이니까.
그럴 땐 글을 잠시 덮고, 그 감정이 실제로 내 몸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가만히 떠올려본다. 슬플 때 정말 가슴 어딘가가 미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부위가 다른 식으로 움직였는지. 그걸 묘사하면 진부함은 자연스럽게 빠진다. 진부함은 게으름의 흔적이지, 재능 없음의 증거가 아니다.
게으름은 누구나 부린다. 다만 글을 다 쓴 다음 한 번만 더 들여다보면 — 그 게으름의 자리를 내 표현으로 채울 시간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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