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에서 막히지 않는 법 (1)
한국 웹소설계에 오래된 격언이 있다.
"지금 쓰는 장면이, 갑자기 닌자가 나타나서 등장인물을 다 죽이는 것보다 재밌지 않으면 다시 써야 한다."
원래는 모든 장면에 적용되는 말이었다. 작가 이경희의 트윗에서 출발해 웹소설판에서 한참 회자됐고, 지금은 일종의 밈처럼 남았다. 본뜻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뜬금없이 닌자가 튀어나오는 식의 전개)보다도 내 글이 시시하다면 그건 전면 재수정감이라는 농담 섞인 자기 검열 기준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첫 문장에 적용해 버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
내 글의 첫 문장이 닌자가 모두를 죽이는 장면보다 흥미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첫 문장이 안 써졌다. 어떤 일상의 풍경도, 어떤 감정의 묘사도, 닌자 앞에서는 시시해 보였다. 며칠을 모니터만 봤다.
이 글은 그 이야기다. 첫 문장에서 막히지 않는 법에 대한, 닌자가 일찍 떠나는 노트.
왜 첫 문장에서 막힐까
첫 문장에는 이상한 무게가 실린다. 이게 이 글의 인상을 결정한다는 강박.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우리는 다 안다. 카뮈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 김영하의 "나는 자살 안내인이다" 같은 첫 문장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면서 내 첫 문장도 저래야 한다고 속삭인다. 거기에 닌자까지 가세하면 답이 없다.
그래서 못 쓴다. 머릿속 모범 답안과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문장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데 한 가지 의심해볼 만한 게 있다. 위에 적은 그 유명한 첫 문장들 — 그게 작가들이 처음에 쓴 첫 문장이었을까.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알기로는, 많은 작가들이 글을 다 쓴 다음 퇴고 단계에서 첫 문장을 바꾸거나, 원래 본문 어딘가에 있던 문장을 첫 자리로 옮긴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그래서 의심한다 — 어쩌면 우리가 외운 그 첫 문장들도,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게 아닐 수 있다고. (이건 단정이 아니라, 내 작업 경험에 기댄 추측이다.)
내가 쓰는 세 가지 방법
1. 두 번째 문장부터 쓴다
진심으로 추천하는 방법이다. 첫 문장 자리를 그냥 비워두고, 두 번째 문장부터 쓴다. 첫 문장은 나중에 채운다.
이게 효과적인 이유는 두 번째 문장은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두 번째 문장을 외우지 않는다. 두 번째 문장은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 두 번째 문장을 잘 쓰고 나면, 첫 문장이 저절로 떠오를 때가 많다. 두 번째 문장 앞에 뭐가 와야 자연스럽지? 라는 질문이 첫 문장을 만든다.
2. 가장 구체적인 장면부터 쓴다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을 거다. 한 문장으로 묘사해본다.
"그날 비가 왔다." "엄마가 부엌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의 손이 차가웠다."
닌자가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이게 첫 문장이 될 수도 있고, 글의 한가운데로 들어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작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보통은.
3. "오늘 나는"으로 시작하고 나중에 지운다
가장 후진 방법인데 가장 자주 쓴다. "오늘 나는" 또는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같은 평범한 시작을 일단 쓴다. 그리고 글을 다 쓴 다음 그 부분을 지운다.
이게 왜 효과 있냐면, 글의 시작과 문장의 시작은 다르기 때문이다. 글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이 움직여야 하는데, 손가락은 완벽한 문장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늘 나는"은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마중물이다. 다 쓰고 나면 마중물은 버려도 된다.
그래도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글이 아직 안 익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첫 문장이 안 나오는 건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글로 뭘 말하고 싶은지 아직 모른다는 문제일 때가 많다.
그럴 땐 첫 문장을 고민하지 말고, 이 글에서 가장 하고 싶은 한 문장을 먼저 적어보는 게 낫다. 글의 중심이 잡히면 첫 문장은 의외로 쉽게 나온다.
다시, 닌자 이야기로
닌자 격언의 본뜻은 내 글의 어떤 장면도 닌자가 다 죽이는 장면보다 시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자기 검열의 기준으로는 무서운 격언이지만, 가끔은 무서워서 글을 못 쓰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그걸 첫 문장 한 줄에만 적용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닌자가 모두를 죽이는 글이 정말로 재밌는 글일까. 그 순간은 강렬할지 몰라도, 그 다음을 이어가기는 어렵다. 첫 문장도 마찬가지다. 강렬한 첫 문장에 어울리는 두 번째 문장, 세 번째 문장이 따라붙지 않으면 첫 문장은 공허한 한 줄로 남는다.
그러니까 첫 문장은 좋을 필요가 없다. 그냥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게 해주면 된다.
그게 첫 문장의 유일한 임무다. 닌자는 다음 글에 나오면 된다. 아니, 어쩌면 안 나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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